임금이 왕족이 아닌 신하의 빈소에 친림 조문한 (반만년 한국사상 유일무이한) 사실(史實)을 아시나요?
각급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 한국학중앙연구원(박정희 설립의 정문연 전신)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두산백과사전'을 비롯한 국내 모든 온·오프라인 텍스트엔 누락됐으나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만 기재된 대마도와 큐슈의 이키섬 정벌을 아시나요?
흔히들 1419년(세종 1년)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은 알고 있으나 그보다 22년전 1397년 태조7년 김사형 장군의 대마도 정벌을 '조선왕조실록'상의 기록을 간략히 밝혀보겠다.
1397년 (태조 6년) 양력 1월 10일(음력 1396년 12월 3일) 태조 이성계는 대마도와 이키도 정벌을 떠나는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린다. 승전을 기원하며 숭례문을 나와 한강까지 그를 전송한다.
문하 우정승 김사형으로 5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 태학사 남재로 도병마사를 삼고, 중추원 부사 신극공으로 병마사를 삼고, 전 도관찰사 이무로 도체찰사를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서 일기도와 대마도를 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김사형에게 부월(도끼)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모관(毛冠)·갑옷·궁시·약상자를 내려 주었으며, 남재·이무·신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에게 명령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이니,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의 명문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氣稟)이 삼엄하고 입지가 홍의해서 서정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와 실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를 삼고 절월 을 주어 동렬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을 어기거나, 수령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處決)하라."
(태조는) 도당(都堂)에서 한강(漢江)까지 전송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약 두달 후 3월 7일(양력) 김사형이 대마도 이키도 정벌에 대첩을 거두고 돌아오니 흥인지문(동대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아 환영했다.
5도 도통사 김사형이 돌아오니 흥인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아 위로하였다.
( 五道都統使金士衡還, 上幸興仁門外迎勞) 1397년 태조 6년 3월 7일(양력) 1월 30일(음력)
다시 태조는 김사형에게 잔치를 배풀게 하였다.
1397년 태조6년 3월 15일(양력) 2월 8일(음력)
의안백 이화와 좌정승 조준 등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
의안백 이화·좌정승 조준·봉화백 정도전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니, 사은사 권중화 이하 여러 사신과 구육(㡱六)도 이에 참예하였다. 김사형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하였다
1407년(태종7) 7월 30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태종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卒)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부대언 윤수(尹須)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翼元公)이라 하였다.
- 1470년(태종7) 음력 7월 30일
김사형이 죽은지 한달여 후 태종은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소재 그의 빈소와 묘막에 친히 조문했다. 한국 역사상 왕족이 아닌 신하의 빈소와 묘막에 직접 조문한 일은 정사는 물론 야사에도 찾기 힘든 일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김사형의 빈소에 친림(親臨)하여, 악차(幄次; 묘막)에 나아가 주상(主喪)하는 손자 김종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지냄)하고 돌아왔다. 태종실록 14권, 1407년 (태종 7년) 음력 9월 13일
'고려사'는커녕 '조선왕조실록' 맨 앞 '태조실록'조차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뭔지 두려워 자기 검열한 것이나, 이미 전지적 일본인 시각이 되어 버린 것이거나, 셋 중 하나에 내 양손 모가지를 다 걸고 싶다.
각급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 한국학중앙연구원(박정희 설립의 정문연 전신)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두산백과사전'을 비롯한 국내 모든 온·오프라인 텍스트엔 누락됐으나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만 기재된 대마도와 큐슈의 이키섬 정벌을 아시나요?
흔히들 1419년(세종 1년)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은 알고 있으나 그보다 22년전 1397년 태조7년 김사형 장군의 대마도 정벌을 '조선왕조실록'상의 기록을 간략히 밝혀보겠다.
문하 우정승 김사형으로 5도 병마 도통처치사(五道兵馬都統處置使)를 삼고, 예문춘추관 태학사 남재로 도병마사를 삼고, 중추원 부사 신극공으로 병마사를 삼고, 전 도관찰사 이무로 도체찰사를 삼아, 5도의 병선을 모아서 일기도와 대마도를 치게 하였다. 길을 떠날 때에, 임금이 남대문 밖까지 나가서 이를 전송하고, 김사형에게 부월(도끼)과 교서(敎書)를 주고 안장 갖춘 말·모관(毛冠)·갑옷·궁시·약상자를 내려 주었으며, 남재·이무·신극공에게는 각각 모관·갑옷·궁시를 내려 주었다. 교서는 이러하였다.
"예로부터 임금 된 자는 항상 중외를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는 데에 힘써왔다. 불행히도 쥐나 개 같은 좀도둑이 생겼을 때에는 오로지 방백에게 책임을 지워서 몰아 쫓고 잡게 하였으며, 그 세력이 성해져서 방백이 능히 제어하지 못할 때에야 대신에게 명령하여 출정하게 하는 것이니, 이제 하찮은 섬 오랑캐가 감히 날뛰어 우리 변방을 침노한 지가 3, 4차에 이르러서, 이미 장수들을 보내어 나가서 방비하게 하고 있으나,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수륙으로 함께 공격하여 일거에 섬멸하지 않고는 변경이 편안할 때가 없을 것이다. 경은 의관)의 명문이며 조정에서는 재상의 큰 재목이라, 기품(氣稟)이 삼엄하고 입지가 홍의해서 서정을 처리할 때는 다 이치에 맞고, 인재를 천거하면 모두 그 소임에 합당하여, 밝기는 허와 실을 잘 알고, 슬기로움은 외적의 난을 제어할 것이다. 이에 제도 병마 도통처치사를 삼고 절월 을 주어 동렬을 시켜 돕게 하고, 널리 막료를 두어서 그 위엄을 중하게 하니, 여러 장수들이 부복해서 명령을 들을 것이요,
적은 소문만 듣고도 간담이 떨어질 터이니, 경은 앉아서 계책을 세워서 장수와 군사들을 지휘하여 두 번 출병할 일이 없게 하여, 만전을 도모하여 나의 생각에 맞게 하라. 혹시나 장수나 군사가 군율을 어기거나, 수령들의 태만한 일이 있거든 법대로 징계할 것이며, 크거나 작은 일을 물론하고 즉시 처결(處決)하라."
(태조는) 도당(都堂)에서 한강(漢江)까지 전송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약 두달 후 3월 7일(양력) 김사형이 대마도 이키도 정벌에 대첩을 거두고 돌아오니 흥인지문(동대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아 환영했다.
5도 도통사 김사형이 돌아오니 흥인문 밖까지 거동하여 그를 맞아 위로하였다.
( 五道都統使金士衡還, 上幸興仁門外迎勞) 1397년 태조 6년 3월 7일(양력) 1월 30일(음력)
다시 태조는 김사형에게 잔치를 배풀게 하였다.
1397년 태조6년 3월 15일(양력) 2월 8일(음력)
의안백 이화와 좌정승 조준 등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 등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다
의안백 이화·좌정승 조준·봉화백 정도전에게 명하여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잔치를 베풀게 하니, 사은사 권중화 이하 여러 사신과 구육(㡱六)도 이에 참예하였다. 김사형에게 서대(犀帶)를 하사하였다
1407년(태종7) 7월 30일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태종실록』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평하고 있다.
김사형은 깊고 침착하여 지혜가 있었고, 조용하고 중후하여 말이 적었으며, 속으로 남에게 숨기는 것이 없고, 밖으로 남에게 모나는 것이 없었다. 재산을 경영하지 않고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아서, 처음 벼슬할 때부터 운명할 때까지 한번도 탄핵을 당하지 않았으니, 시작도 잘하고 마지막을 좋게 마친 것이 이와 비교할 만한 이가 드물다. 졸(卒)한 나이가 67세이다. 조회를 3일을 정지하고, 좌부대언 윤수(尹須)를 보내어 빈소에 제사하고, 시호를 익원공(翼元公)이라 하였다.
- 1470년(태종7) 음력 7월 30일
김사형이 죽은지 한달여 후 태종은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소재 그의 빈소와 묘막에 친히 조문했다. 한국 역사상 왕족이 아닌 신하의 빈소와 묘막에 직접 조문한 일은 정사는 물론 야사에도 찾기 힘든 일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김사형의 빈소에 친림(親臨)하여, 악차(幄次; 묘막)에 나아가 주상(主喪)하는 손자 김종준에게 명하여 치제(致祭;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지냄)하고 돌아왔다. 태종실록 14권, 1407년 (태종 7년) 음력 9월 13일
'고려사'는커녕 '조선왕조실록' 맨 앞 '태조실록'조차도 단 한 번도 읽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뭔지 두려워 자기 검열한 것이나, 이미 전지적 일본인 시각이 되어 버린 것이거나, 셋 중 하나에 내 양손 모가지를 다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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