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베트남은 역사상 중국의 수많은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 베트남과 중국 간의 문제는 중국의 영토 침범에 대한 베트남의 방어와 외교 정책문제로 이어져 왔다. 1788년 청(淸)나라의 베트남 침략도 당시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던 점에 한 원인이 있었으나, 주변국을 속국으로 삼고 고토를 회복하려는 중국의 야욕이 주된 원인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베트남은 중국이 강경할 때는 침략에 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온건한 태도로 실리를 추구해 왔다. 중국에 대한 베트남의 외교정책은 역대 왕조에서 모두 강온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 중국 황제들은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세상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베트남의 왕들도, “사방의 넓은 땅은 특정한 강역과 경계가 없어서 라오스, 태국, 캄보디아의 땅을 넘어서까지 번(藩)으로 삼으니,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고 했다. 중국은 천하가 모두 황제의 땅이라는 것이고, 베트남은 감히 ‘천하’라는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천하의 강역에 대한 중국 황제와 베트남 왕들의 생각은 대동소이했다. 베트남 역대 왕들은 베트남이나 중국이 같은 반열이라는 대등의식이 있었고, 자신들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 베트남의 청나라 침략군 격퇴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치세를 한 청나라 건륭제(1735~1796)는 60년간을 재위하면서 중국 북동부 지방의 투르크족과 몽골족의 위협을 제거했고, 현재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까지 제국의 영토를 넓혔고, 남·동부 지역에서 청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 18세기 말엽이 되자, 베트남은 1428년에 20년간의 명나라 침략을 물리치고 세운 레(黎)왕조(1428~1788)가 남북간 대립이 심해 나라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에, 1771년 응우옌후에(훗날의 꽝쭝 황제) 3형제가 중부 꾸이년 근처의 떠이선 지방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남북 대립을 종식시켰다. 왕조의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레(黎)왕조 마지막 왕 찌에우통(昭統)은 1787년에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1788년 10월 손사의(孫士毅)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꽝쭝(光中)황제는 10만 명의 수륙 양군을 이끌고 북으로 진격하여 마침 음력설을 즐기고 있던 청나라 군사를 1789년 1월 5일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동다(Đống Đa) 전투에서 꽝쭝 황제의 청나라 군사 격파는 베트남 역사상 3차례의 몽골군 침략을 막아낸 쩐흥다오(陳興道) 장군의 전승과 함께 가장 위대한 승리로 꼽히고 있다. 1789년 청나라 군사를 물리친 이듬해인 1790년은 청나라 건륭(乾隆) 황제의 팔순 잔치가 있는 해였다. 청나라에서는 베트남의 왕이 축하사절로 직접 입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다.
■ 가짜 왕을 청나라에 보내 위기모면
떠이선(西山) 왕조에서는 진퇴양난이었다. 만약 청나라의 요청에 불응하면 다시 한번 전화(戰禍)를 피하기 어려웠고, 요청에 응한다면 꽝쭝 황제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에서는 1789년의 패전으로 건륭(乾隆) 황제의 권위가 실추되어 베트남 재침의 명분을 찾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떠이선 왕조에서는 팜꽁찌(Phạm Công Trị:范公治)를 꽝쭝(光中) 황제로 가장하여 청나라로 보내기로 했다. 팜꽁찌(范公治)는 팜반찌(Phạm Văn Trị:范文治) 혹은 가왕(假王)이라고도 하는 떠이선(西山)왕조의 장군이었다. 팜꽁찌는 청나라 침략군을 대파하고 나서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駙馬)가 되었고, 꽝쭝(光中)황제의 성(姓)을 받았기에 응우옌반찌(Nguyễn Văn Trị:阮文治)라고도 한다. 건륭제 팔순 잔치 축하사절로 가짜 왕을 수행한 공신이 판후이익(Phan Huy Ích: 潘輝益, 1751–1822) 선생이다. 판후이익 선생이 있었기에 가짜 왕이 축하사절로 왔다는 것이 청나라에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만약 가짜 왕이 입조하였다는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졌다면 사절단의 생명이 위태로운 것은 물론 재침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나라에 침략의 빌미를 주어 전쟁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롯이 박학다식하고 문장력과 외교술을 겸비한 판후이익 선생과 같은 위인이 있었기에 전쟁을 미리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 고려의 서희와 베트남의 판후이익
한국 역사에는 993년에 요나라(907–1125)군이 소손녕(蕭遜寧:) 지 휘하에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해 왔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西京)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려의 왕도 여기에 동의하는 등 국가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를 맞았다. 이때, 서희(徐熙) 선생이 적진으로 가서 소손녕과 담판하여 80만 대군을 물러가게 했다. 국가의 위기에서 외교술로 적을 물리친 서희 같은 인물이 바로 베트남의 판후이익 선생이다.
■ 베트남에 ‘중국몽’, ‘친중 사대주의’는 없어
조선 왕조의 역사에서 중국과의 관계에서 가장 치욕적인 역사는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가 59일 만에 남한산성을 나와1637년 2월 24일(정축년 음력 1월 30일) 삼전도에서 청나 라 2대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한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구한말 1887년에 조선이 미국에 전권공사를 파견 하려고 하자 청나라는 속국인 조선에서 미국에 공사 파견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반발했다. 청나라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바로 청나라 공사관에 보고하고, 신임장을 제정하는 부임 인사를 할 때는 청나라 관리와 동행하며, 공식 모임에는 청나라 관리 뒤를 따르고, 중요 외교 문제는 반드시 청나라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수용했지만, 초대 공사 박정양은 워싱턴DC에 도착하자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대통령 스티 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에게 신임장을 제정해 버렸다. 조그만 날갯짓이었으나 조선의 자주 외교의 의지를 볼 수 있는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이 굴욕을 피하기 위한 ‘가짜 왕’의 청나라 파견 사건과 비교한다면, 조선의 대(對) 청나라 외교자세는 너무나 소극적, 저자세였고 굴욕적이었으며, 베트남은 대국을 능멸하는 수준의 파격적인 외교자세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베트남의 대(對) 중국 외교는 항거(抗拒), 대등 (對等), 자주 (自主)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베트남에는 애당초 섣부른 ‘중국 몽’이나 ‘친중 사대주의’는 없었다. 베트남은 자신들이 ‘중국의 속국’이라는 중국의 관점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己酉春正即事(기유년 정초에)
皇道淸夷鳳曆新 : 운이 좋아 청평(淸平)한 시절 만났으나,
山村蕭散未知春 : 적막한 산촌엔 아직 봄이 왔음을 모르고,
故園石逕生荒蘇 : 정원의 좁은 돌길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深巷蓬扉隔俗塵 : 속세와 멀리 떨어진 누추한 집에서,
淡酌彊酬元始節 : 술잔 주고받으며 새해를 시작하려니,
幽棲另作皞熙人 : 유처(幽處)에 있어 사람이 그립고,
拜年私展歡悰後 : 새해라 기쁘다가도 생각해 보고는,
閒鑷霜髮覽鏡頻 : 흰머리 뽑으려 자꾸 거울만 보게 되는구나.
皇道淸夷鳳曆新 : 운이 좋아 청평(淸平)한 시절 만났으나,
山村蕭散未知春 : 적막한 산촌엔 아직 봄이 왔음을 모르고,
故園石逕生荒蘇 : 정원의 좁은 돌길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深巷蓬扉隔俗塵 : 속세와 멀리 떨어진 누추한 집에서,
淡酌彊酬元始節 : 술잔 주고받으며 새해를 시작하려니,
幽棲另作皞熙人 : 유처(幽處)에 있어 사람이 그립고,
拜年私展歡悰後 : 새해라 기쁘다가도 생각해 보고는,
閒鑷霜髮覽鏡頻 : 흰머리 뽑으려 자꾸 거울만 보게 되는구나.
판후이익 선생은 740편이나 되는 문학작품을 남겼다. 위의 시는 1789년 청나라 군사를 물리친 기유년 정초에 쓴 시로 새해를 맞이한 기쁨도 잠시이고, 나이 들어가는 쓸쓸한 맛을 느끼게 해주는 노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시이다. 판후이익 선생은 학문이 깊고 문장이 수려하여 베트남 외교사에 보배와 같은 인물이다. 향후로도 그의 외교적 성과는 중국은 물론 모든 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베트남이 본받아야 할 것이다. 마침 2022년은 판후이익 선생 서거 200주년으로 한•베 국제학술대회가 3월 22일 하노이의 판(潘)씨 종중 사당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베트남의 대(對) 중국 외교 자세는 한국의 대(對) 중국 외교에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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