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9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 관리를 위해 지난해부터 바짝 조여왔던 대출규제를 완화할 채비에 나서고 있다. 그동안 연봉 수준으로 묶여있던 신용대출 한도 규제를 풀고 무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인정비율(LTV)을 높이는 등의 방식이다. 최근 본격적인 금리 상승기에 접어든 시점에서 이같은 대출규제 완화 조치가 실수요자나 국내 금융시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주요 시중은행들은 신용대출 한도 규제가 다음 달부터 풀리는 것으로 가정하고 관련 시스템을 점검하는 등 제반 작업에 돌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이 현재 시행 중인 신용대출 한도 제한 규제의 효력이 일몰 규정에 따라 이달 말을 기해 종료될 예정인 가운데 추가 연장 없는 조항 폐지를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은 앞서 지난해 8월 "개인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 수준으로 줄여달라"는 취지의 메시지를 은행권에 전달한 바 있다. 같은 해 10월 발표된 ‘10·26 가계부채’ 관리대책에서는 결혼과 장례, 수술 등 불가피한 자금수요에 대해서만 일시적으로 신용대출 한도를 넘길 수 있도록 예외조항을 마련했고 뒤이어 12월에는 연 소득 이내 취급 제한 규정을 '금융행정지도'로 명시했다. 정부의 이같은 방침에 따라 은행들 역시 신용대출을 차주의 연 소득 범위에서 제동을 걸고 공급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이번 행정지도가 종료될 경우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일정 기준만 충족하면 은행권에서 다시 연봉 이상의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신용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 문을 두드린 차주들이 규제 이전과 비교해 2분의1, 3분의1 수준의 대출금만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출자의 신용등급·직장정보 등에 따라 다시 연 소득의 2∼3배까지 자금 융통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연봉 이내'로 제한된 한도 규제가 경직적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던 데다 세입자의 대출 여력 등을 감안해 해당 규제를 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당국 조치에 따라 즉각 관련 규제를 풀 수 있도록 내부적으로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정부의 대출규제 완화 기조는 신용대출뿐 아니라 주택담보대출(주담대) 등 대출 전방위에 걸쳐 적용되는 분위기다. 금융당국은 올해 3분기부터 생애 첫 주택 구입자에 대한 주택담보인정비율(LTV) 한도를 기존 60~70%에서 80%까지 상향 조정하는 안을 추진 중이다. 이는 새 정부 인수위원회가 부동산 정책 정상화 일환으로 발표했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다.
이번 조치가 시행될 경우 생애 첫 주택 구입자가 내 집 마련 시 받을 수 있는 대출 한도 폭이 기존보다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차주가 서울 등 투기과열지구에서 시세 5억원 상당의 아파트를 구입한다고 가정했을 경우 그동안은 LTV 60%를 적용받아 3억원까지만 대출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LTV 80%에 해당하는 4억원까지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청년층의 경우 미래에 발생할 소득을 대출 한도에 반영하는 제도도 마련 중에 있다. 소득에 따라 대출 한도를 제한하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규제가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청년층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발표한 긴급 민생안정 10대 프로젝트에도 청년층의 금융 접근성을 제고한다는 취지에서 미래소득을 반영한 DSR 산정 방침이 포함돼 있다.
여기에 대출 상품에 대한 만기 확대도 은행권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신한은행은 최근 신규 고객뿐 아니라 기존 주담대 고객에 대해서도 대출 만기를 5년 더 늘려 최장 40년까지 연장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마련했고 여타 주요 시중은행들도 잇따라 초장기 주담대 상품을 내놓았다. 보험사와 상호금융권도 주담대 만기 확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보금자리론, 적격대출 등과 같이 정부에서 공급하는 정책대출 상품 또한 오는 8월부터 최대 만기를 청년·신혼부부 기준 기존 40년에서 50년으로 확대한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청년층과 신혼부부 등 실수요자의 내 집 마련 기회를 확대, 실수요자의 '주거사다리'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은행권은 일단 일몰 예정인 신용대출 규제가 종료될 경우 전세대출 수요가 일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달 말을 기해 새 임대차법이 시행된 지 2년을 맞기 때문이다. 임대차법에 따라 이미 계약갱신청구권을 사용한 세입자는 오는 8월 시세에 맞춰 전세보증금을 올려줘야 한다. 신용대출 한도가 연소득 이내에서 이전과 같은 수준인 연소득의 2~3배로 늘어날 경우 실수요자 입장에서는 그나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일 치솟는 금리와 주택거래 둔화 움직임 속 규제 완화가 실수요자에게 도움이 될 것인지는 다소 회의적인 시선이 제기된다. 최근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의 고정형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단은 지난 10일 기준 6.81%로 연 7%대에 근접한 상태다. 이는 작년 연말(3.600~4.978%)과 비교하면 반 년 만에 상단은 1.8%포인트나 급등한 것이다. 변동형 주택담보대출(상단 5.41%) 역시 연내 6%를 돌파할 것으로 관측된다. 부동산 거래 관련 시장 침체 기조 역시 계속되고 있다.
또한 관계당국의 대출 문턱 낮추기가 가까스로 숨고르기에 나선 가계대출 증가세에 다시 불을 붙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시선도 여전하다. 금리 상승기에 대출을 늘리게 될 경우 가계부채 건전성 악화와 함께 은행의 부실채권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물가 상승에 대한 우려 속 한은의 기준금리 추가 인상 기조가 이어지며 대출 이자 부담이 증가한 데다, 집값도 조정 국면으로 접어들어 전체적으로 매수세가 줄고 있다"며 "추가 금리 인상도 예상되면서 빚을 내면서까지 내 집을 마련하려는 매수 효과가 크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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