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만 있으면 ‘자유’를 외치는 대통령,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집권 여당.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는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논란이 되고, 고등학생의 그림을 두고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인다. 나아가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의 자유와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이 정부의 간섭과 통제로 제한된다. 이런 대통령의 모순적인 언행과 한국 정부의 이중적인 태도는 지난 10월 19~2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자유권 규약 심의’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자유권 규약이란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1966년 12월 채택한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International Covenant on Civil and Political Rights)’을 가리킨다. 이 규약은 전문과 6부 53개 조로 구성됐고 생명권, 평등권, 신체의 자유,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고문과 비인도적 처우,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그리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자유권과 관련된 인간의 기본권을 폭넓게 규정한다.
한국 정부는 1990년 4월 10일 자유권 규약에 서명했고, 4년마다 이행에 관한 국가보고서 심의를 받아 왔다. 2018년 11월에 4차 심의를 종료했고, 이번에 5차 심의를 받은 것이다. 통상적으로 심의는 당사국이 이행보고서를 제출하고 자유권위원회가 이를 검토한 후 쟁점 목록을 작성해 발송하면 이에 대한 당사국의 답변서를 받은 후 자유권위원회가 심의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5차 심의는 약식 보고 절차(Simplified Reporting Procedure)를 채택해 당사국의 보고서 제출이 생략된 채, 자유권위원회가 질의서를 보내고 당사국이 답변서를 제출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자 참여연대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등 11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자유권 대응모임’은 자유권위원회에 NGO 공동보고서를 제출함으로써 유엔을 비롯해 국제사회의 거듭된 권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해결하지 않는 문제들을 지적했다.
심의 과정은 지난 심의에서 제기된 문제를 비롯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자유권 침해 사례들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검증했다. 예를 들어 심의위원들은 사형제 폐지 권고를 수용하지 않는 이유를 다시 질의했다. 하지만 “사형제의 형사정책적 기능과 대체 형벌의 가능성 등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정부 대표의 답변은 사실상 수용할 의지가 없거나 매우 약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2007년 이래 제기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은 이유가 다시 거론됐다. 정부 대표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자는 법 취지에 공감한다.”면서 “다만 4개 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고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형사처벌 등을 두고 법안 간 차이가 있는데, 정부는 논의 과정에서 합리적인 의견을 낼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법 제정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을 언급하면서 합리적인 의견을 도출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으나 사실 합리적인 의견이라는 표현은 매우 모호하여 시간벌기용으로 보일 따름이다. 실제로는 정부와 고용주에게 유리한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 유보하겠다는 태도와 다름없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질의와 응답은 정부의 의도를 상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피해자들을 위한 후속 조치를 알려 달라는 요청에 정부 대표는 “수사와 국정조사를 통해 대부분 진상이 규명됐고, 피해자 애로사항 해결과 지원 절차가 이뤄지고 있다.”며 “인파 사고 재발방지 대책 65개가 포함된 국가안전시스템 종합대책 또한 추진 중.”이라고 답변했다.
정말 국가는 진상을 규명했고, 책임자를 처벌했고,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을 수립했는가? 159명이나 희생자가 나왔는데 과연 이후 우리 사회는 공공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숙한 국가가 되었는가?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송 지하도 참사가 이를 입증한다. 어떤 징후를 신고하고 어떤 긴급 상황을 알려도 우리의 안전 불감증은 깨어나지 않고, 우리의 안전시스템은 작동하지 않고 있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하는 헌법상 대통령의 의무와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기는커녕 유엔 기구를 상대로 진실을 감추고 있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아무런 대국민 사과도, 진실 규명도 없었고 나아가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조차 수립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가 명백히 드러나니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언론은 자유권 규약 심의를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기껏해야 회의에 관한 소개, 질의 내용과 정부 대표의 답변 내용을 알려주는 데 그쳤다. 기사에는 심의위원의 지적 사항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정부 대표의 발언을 부각하고 자유권위원회의 포괄적인 분위기를 전달해 마치 정부의 답변이 수용된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그러나 일부 언론사의 보도는 심의 과정에서 다양한 질의와 답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심의위원들은 대통령실 주변 집회 금지 등 집회 자유 축소에 우려를 드러냈고 건설노조 집회에 대한 탄압,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정부의 업무 개시 명령, 파업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손해배상청구를 비롯해 과거 사법농단의 재발 방지 계획과 국가보안법 7조 폐지 계획 등 다양한 사안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특히 MBC의 관련 기사는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 답변이 사실과 다름을 유가족의 보도자료를 통해 독자에게 알렸다. “유가족들과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기초적인 진상규명조차 되지 않았고 피해자지원단과 유가족, 피해자가 직접 면담한 적도 없다”거나 “서울시는 추모행사와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고 철거 명령을 내리고 있고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부대표단의 답변은 허위 답변이나 다름없다”며 이태원 참사 유가족의 분노를 자세하게 다뤘다.
한편 경향신문의 기사는 제목(<그렇게 ‘자유’ 외쳤는데···시민단체 “유엔, 한국의 자유권 8년 전으로 후퇴 우려”>)부터 현 정부의 기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심의를 담당하는 산토스 파이스 위원의 견해를 실으며 “정부 대표단의 답변이 소극적이었으며, 상당수의 질의에서 사실상 8년 전 4차 심의와 똑같은 수준의 답변을 했다”고 지적했다.
자유권 규약 심의에서 드러난 본질적인 문제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현 정부의 무능과 허위의식이 그것이다.
현 정부의 권력은 검찰의 수중에 있다. 군대를 제외하고 모든 권력기관은 검찰 인맥이 장악했다. 그런데 집권 1년 반 동안 현 정부의 성과는 무엇인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느 분야든 칭찬할 만한 성과나 박수 칠 만한 업적 또는 기대할 만한 변화가 떠오르는 게 없다.
대통령은 3대 개혁, 즉 연금개혁·노동개혁·교육개혁을 추진하는 중이다. 성패에 따라 상당한 파장이 예상되는 개혁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현재 개혁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며칠 전 발표된 연금개혁안은 그야말로 빈껍데기다. 여전히 폭탄돌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연금개혁의 핵심은 두 가지 질문으로 요약된다. 과연 연금이 고갈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얼마를 내고 얼마를 받게 될까? 따라서 연금기금 고갈 시점을 정확히 예측하고 노후 소득의 적정성을 파악하여 보험료율(내는 돈)과 소득대체율(받는 돈)을 제시하면 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번 개혁안은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아예 제시하지 않았다. 추정하건대 정부 재정 부담을 고려해 제시하지 않았거나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부담을 지기 싫어 제안을 회피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쪽이든 무능한 정부임을 자인한 셈이다.
노동 개혁의 흐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 정부는 노동 개혁의 핵심 과제로 노사 법치주의 확립과 노동 규범 현대화,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내세운다. 이는 노조의 불법·부당 행위를 바로잡고, 노동 시간을 유연하게 개편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 검찰총장 출신의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 대통령에게 헌법상 기본권인 노동자의 단체행동권(파업권) 보장은 안중에 없다. 작년 12월 화물연대의 총파업은 즉각적인 업무개시명령으로 곧바로 진압되었다. 더구나 노조의 회계 장부 제출 요구와 회계 감사 진행으로 노조의 존재 자체를 혐오하고 근간을 훼손하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 나아가 노동 시간 개편안은 어떠한가? 노동자의 근로 시간을 유연하게 적용해 고용시장을 확대한다는 취지에 대해서 집중 노동과 휴가의 보장 여부, 근로기준법의 악용, 많게는 ‘주 69시간’ 노동 허용 등 다양한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거센 반대 여론에 밀려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 뒤 지금껏 감감무소식이다.
상대적으로 교육개혁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교육의 특성상 그 결과가 미래에 드러나고, 당사자가 유권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발표된 대입개편안은 결국 수능의 비중을 늘리고 내신을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됐다. 특목고를 부활하고 교육서열화를 더욱 강화해 학생의 선택권 확대를 통한 교육과정 정상화 의지를 완전히 뒤엎어버렸다. 이는 이전 정부의 성과를 철저히 무효로 만드는 동시에 다시 학생들을 지옥의 경쟁으로 몰아넣을 심산이다. 그러는 와중에 의과대학 정원 확대가 개혁의 실패를 만회할 호재로 부상했다. 처음에는 대통령이 직접 ‘해마다 1000명씩 정원을 늘리겠다’는 내용의 의사 수급 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한 차례 연기하고 발표된 내용은 의대 정원 증원 규모가 빠진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현 정부의 무능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어떤 개혁의 성과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과 정부는 결코 무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무능을 가리고 싶은 허세와 허위로서 이념전쟁을 꺼내든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어찌 됐든 대통령과 정부는 성장동력을 살리고 나라 곳간을 채우고 국민의 지갑이 두둑하게 채워지도록 국정을 운영해야 하지 않겠나. 시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점점 더 커지는 우려와 불안과 원성이 진정으로 우려스럽다.
필자 이력
△국립안동대 사학과 교수 △독일 보쿰 루르대학(Ruhr Univ. Bochum)에서 서양중세사로 박사학위 취득 △(전) 한국중세사학회 회장 △컬럼비아대 해리먼 연구소 방문교수 △교수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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