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하 수능) 점수가 발표된 후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제) 논란은 변죽만 건드리다 이내 잠잠해졌다. 킬러 문항은 작년 6월 대통령실이 수능에 공교육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을 배제하고 출제기법을 점검하도록 지시한 후 공론화되었다. 킬러 문항이 배제된다면 ‘물수능’(쉬운 수능)이 될 것을 우려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수능점수를 대입전형 자료로 사용해야 하는 대학들에 혼란이 예상되므로 교육부와 수능 출제담당 기관은 난이도 조절을 위해 노력하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문항의 난이도는 상·중·하 3단계나 5단계, 7단계 등 다양한 단계로 나누는데, 수능 문항은 예상 정답률로 난이도를 구분하고 있다. 수능 문항의 난이도는 문항과 선택지 내용의 난이도에 따라 결정되는데, 교육과정 범위 내에서 출제해야 하므로 문항 내용이 평이하다면 선택지를 어렵게 하여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는 대통령실이 언급한 출제기법 정교화 중 한 방법일 수 있지만, 평가해야 할 내용을 평가해야 하는 문항 제작의 기본을 어긴 것이며 비교육적이다. 올해 수능이 ‘불수능’(어려운 수능)이 된 이유는 킬러 문항 못지않은 고난도 문항들이 출제되고, 정답과 헷갈리는 선택지를 배치하여 전반적으로 난이도를 상향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수능 역사에서 물수능과 불수능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물수능일 때는 변별력이 낮아서 상위권 대학의 원성만 들으면 되지만, 불수능일 때는 교육부장관이나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의 경질로 이어지기도 했다. 대학별 고사가 불허된 상황에서 상위권 학생이나 상위권 대학과 학과에 변별력있는 입시자료를 제공하려면 킬러 문항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불수능인 해에 특정 영역이나 과목이 주범으로 비난을 받는데 그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수능점수의 변별력을 높이기 위한 의도에 따라 악역을 돌아가며 맡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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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의 난이도와 점수에 학생과 학부모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대학 지원자의 당락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수시 모집에서는 수능 최저학력기준만 충족하면 수능점수가 영향을 주지 않지만, 정시 모집에서는 수능점수가 당락을 좌우한다. 특히 수능 1등급, 즉 상위 4%에 속하는 상위권 학생들은 미세한 점수 차이로 대학과 학과에 당락이 결정된다. 수능의 난이도 조절은 출제위원들의 인간적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매년 논란은 불가피하다.
1993년부터 시행된 수능의 성격과 목적은 세 가지이다. 첫째,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 능력을 측정한다는 점에서 능력 평가이고, 둘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내용과 수준에 맞게 출제한다는 점에서 성취도 평가이며, 셋째, 대입 전형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변별력을 갖춘 평가여야 한다. 이처럼 수능은 시행 30년을 지나면서 본래 의도한 세 가지 성격과 목적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아 왔지만, 공정성과 신뢰성 측면에서 수능보다 더 설득력 있는 대입시험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대입시험 개선 차원을 넘어서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가진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객관식 상대평가인 수능의 변화를 추진해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오래전부터 창의성 신장 교육을 주장해 왔지만, 가장 중요한 시험인 수능이 객관식 시험으로 실시되어 정작 학교에서는 ‘정답을 집어넣는 교육’을 실시해왔다. 그리고 수능은 전 과목이 객관식 문항으로 구성되어 기계가 채점하며, 영어 이외의 과목은 점수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상대평가이다. 반면에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토론식 수업으로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신장하여 ‘학생의 생각을 끄집어내는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따라서 대입 시험은 절대평가로서 논술형으로 출제되어 교사가 채점한다.
나라마다 교육 방법과 대입 시험이 있지만, 여기서는 어느 한 나라의 교육과정이나 평가가 아니라 비영리 민간 교육재단에서 개발·운영하는 국제 바칼로레아(International Baccalauréat, 이하 IB)를 살펴보고자 한다. IB 교육은 창의적 사고, 유연한 의사소통,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미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한다. IB에는 초등학교 프로그램, 중학교 프로그램, 고등학교 프로그램, 직업교육 프로그램 등 네 가지 프로그램이 있다. 이 중 고등학교 프로그램인 디플로마 프로그램은 1968년부터 개발·운영되어 왔는데, 교육적 우수성과 채점의 엄정성을 인정받아 전 세계 주요 대학들이 대입 시험으로 활용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세계 159개국 이상의 5725개 학교에서 6816개 IB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국내 IB 교육은 2017년 서울시교육청이 수업·평가 혁신 방안으로, IB 프로젝트를 진행하자 제주교육청이 한국어 IB의 공교육 도입 확정을 공식 발표했으며, 이어서 대구교육청, 충남교육청에서 IB 교육과정을 도입하였다. 2021년 1월 기준 국내 IB 공식 인정학교는 17개교이며, 대부분 사립학교이지만 두 개의 국립학교에서도 실시하고 있다. IB 교육과정을 도입한 교육청과 학교가 증가하여 IB 평가를 입시에 반영하는 대학도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초·중·고교에서 IB 교육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야 IB 평가가 국가시험으로 도입될 수 있다. IB 평가에서는 숙련된 채점관들이 필요하므로 교육부는 1인당 700만원을 지원하여 7∼8개월씩 채점관을 교육할 계획이다.
정해진 교과서 없이 실시하는 IB 교육은 지금까지의 교육과는 판이하게 달라서 학생과 교사들에게 고부담 교육이다. 따라서 IB 교육이 국내에 연착륙하도록 하려면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실시했을 때처럼 초등학생과 교사부터 적응하도록 하면 좋을 것이다. 1997년 당시 문자언어(읽기)와 이해(듣기) 중심이던 중·고등학교 영어교육을 의사소통 중심 교육으로 변화시키기 위하여 음성언어(말하기)와 표현(말하기)을 강화한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도입하였다. 그렇게 초등학교부터 음성언어와 표현기능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중·고등학교로 진학하며 변화가 정착되도록 하였다. IB 교육과 평가도 초등학교부터 도입하면 지금까지 실시되어 온 정답 찾기 객관식 평가를 ‘내 생각’을 표현하는 주관식 논술·서술형 평가로 순조롭게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국가교육위원회가 2023년 말 ‘2028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최종 의결하자 교육부는 2028학년도 대입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이 대입안도 여전히 수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현재의 ‘집어넣는 교육’ 관행을 미래 인재 양성을 위해 ‘끄집어내는 교육’으로 바꿀 수 있는 대입 시험으로 바꿔야 한다.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 교육정책이나 대입제도에 대한 계획을 발표하지 않는 것은 교육 당국의 직무유기이다. 국가교육위원회와 교육부는 창의성 교육을 위한 대입 시험과 대학 자율화 방안 마련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이다.
이재희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졸업 ▶ 서울대 대학원 교육학박사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미 텍사스대(어스틴) 연구교수 ▶한국초등영어교육학회 회장 ▶경인교육대학교 6대 총장 ▲국제언어대학원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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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이런 무책임한 논리에 끌려다닐 것인가? 코로나 후유증을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우울에 시달리고 있다. 효율적이고 행복한, 우리의 교육과정을 만들기 위해 모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교사들과 협의가 되지 않는다고...외국 유료 교육과정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여도 되나? 참..한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