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이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여야는 승패 분석과 향후 정국 전망에 여념이 없지만 이번 선거가 “역대급 저질 선거”였다는 오명을 벗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반듯한 어젠다는 물론 이렇다 할 정책도 이슈도 안 보였고 그저 막말뿐인 선거였다. 우리 정치가 왜 이렇게 작아지고 남루해졌을까. 선거가 미래를 선도하지 못하고 과거에 매임으로써 정치의 퇴행은 가속화됐다. 산적한 국가적 과제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국민의힘의 선거 참패는 한마디로 불통 이미지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도, 무슨 호소를 해도 귀 기울여 듣지 않을 것처럼 꽉 막힌 벽 같은 이미지에 국민이 질린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또 몰랐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초엔 도어스태핑(door stepping)을 통해 제법 소통도 할 것처럼 보였으나 곧 이를 중단했고, 이후 기자회견다운 기자회견 한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인사에서도 검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대통령은 능력 있고 똑똑한 사람을 데려다 쓴다고 했겠지만 국민을 우습게 아는 행위였다. 특정 대학에 검사면 다 우수하다는 인식은 이미 구시대의 잔재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 AI 시대에 웬 검사냐는 국민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직시한 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불신과 혐오의 선거판
크게 보면 여야가 ‘정권 심판론’과 ‘이·조(이재명·조국) 심판론’으로 맞붙는다고 했을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민생을 비롯한 모든 이슈들이 두 심판론 사이에서 증발했고, 그 빈자리를 끝 모를 불신과 혐오가 채웠다. 선거판은 지난 대선에 이어 다시 ‘검사 대 피의자’ 프레임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이 프레임에선 어느 한쪽이 무죄로 방면되거나 처벌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사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갈등의 심화가 우려돼 일각에선 ‘정치의 복원’을 거론하기도 했으나 윤 대통령 치하에선 쉽지 않은 일임은 누구나 알았다.
검찰은 선거 중이던 지난 8일 이재명 대표의 최측근으로 쌍방울 불법 대북송금 의혹 사건의 핵심인 이화영 전 경기도 평화부지사에게 징역 15년, 벌금 10억원과 추징금 3억4000만원을 구형했다. 이 대표 또한 이 사건과 관련해 제3자 뇌물 혐의를 받고 있다(이화영 부지사에 대한 선고기일은 6월 7일이다).
조국혁신당으로 인해 상황이 더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조국 대표는 그동안 드러내놓고 ‘복수혈전’을 예고해왔다.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이 “너무 길다”고 했고, “김건희 특검법과 한동훈 특검법도 발의하겠다.”고 했다, 총선 직전에는 “김건희 특검법이 통과되면 여러분은 하반기에 김건희씨가 법정에 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자녀 입시비리 혐의로 1·2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범죄 피의자가 대통령과 정치를 겁박한 셈이다. 조 대표는 대법원 판결로 유죄가 확정되면 바로 감옥행이다. 정치판 자체를 떠나야 한다. 그런 그가 윤 대통령을 레임덕(Lame duck·절름발이 오리)에서 데드덕(Dead duck·죽은 오리)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정상은 아니다.
조 대표의 움직임은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당 재정비 작업과도 맞물린다. 이 과정에서 조 대표와 민주당의 선명성 경쟁 또는 연대로 대여 투쟁 강도가 더 세질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총선으로 새롭게 원내에 진출한 군소 정당들이 가세할 수도 있다. 벌써 조 대표의 ‘복수혈전’이 윤 정부에 비판적인 범야권에 의해 대통령 탄핵의 불쏘시개로 쓰이고 있다.
이 막장 드라마의 연출자는 재야 원로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다. 그는 지난달 14일 오마이TV와 인터뷰하면서 “이번 총선은 문재인 정부(제1기 촛불정부)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성공하는 제2기 촛불정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조국혁신당의 바람도 있지만 조국은 조연일 수밖에 없고 민주당의 이재명이 주역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재명 말고 누가 2기 촛불정부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돌려서 말할 필요가 없다. 제2기 촛불정부의 조기 수립이라는 얘기는 윤석열 정권을 빨리 끌어내리고 이재명을 다음 대안으로 빨리 만들자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이 기사를 봤을 때 나는 설마 했다. 우리 사회의 원로이자 재야 지도자인 영문학자(86‧하버드대 영문학박사)가 드러내놓고 사실상 ‘민중혁명’을 획책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대북 문제와 이념 문제에 정통한 한 선배는 딱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이른바 좌파라는 사람들의 생리와 투쟁 방식에 대해 그렇게도 모르냐는 핀잔이 담긴 표정이었다.
이재명·조국의 연대 가능성
그는 조국 대표와 이재명 대표가 연대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둘이 손을 잡거나, 이 대표가 대장동 사건으로 사법 처리돼 영어의 몸이 된다고 해도 그 뒤를 이을 사람들 중에 조 대표는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이미 야권과 진보 좌파 또는 친북 좌파는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면서 “어쩌면 우리는 공천파동으로 민주당에서 한때 배제된 박용진 의원과 임종석 전 의원에게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그들이 갖은 수모를 참아가며 당에 잔류한 것은 우리마저 떠나면 70여 년 의회민주주의 전통을 고수해온 민주당은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라고 했다. 한국 야당사의 큰 맥(脈)이었던 DJ(김대중) 민주당의 동교동계는 사실상 사라졌다. 남은 인사는 올해 94세인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 정도다. DJ의 3남인 김홍걸 전 의원은 지난 1월 이재명 대표가 주도한 공천 심사에서 낙마했다. 재산신고 누락 등이 문제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선거에서 우리는 한국 정치의 세대교체, 임무교체를 현장에서 지켜보았다. 그 교체가 정치 발전과 국민 통합, 그리고 협치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인가 혹여 맹목적 종북이나 시대의 유물이 된 좌파 이념에 대한 수용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끝까지 살펴야 한다.
조 대표는 일관되게 “민주당과의 합당은 없다”고 했다. 이번 총선에서 선전한 그가 민주당과 국민의힘 사이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게 된다면 사안에 따라 국민의힘과 연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전에 사법처리될 가능성이 있지만 어제의 적(敵)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셈이다. 이제 국민의힘은 조 대표의 심기까지 살펴야 하게 됐다. 그는 당선 후 일성으로 윤 대통령에게 그동안의 실정(失政)에 대해 국민께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조 대표 뒤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있다. 이미 정치에 뛰어든 문 대통령은 총선 중 일부 민주당 후보 지원 유세를 펼치면서 “대한민국이 퇴행하고 있다”고 현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나도 숟가락 하나 얹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또 하나의 게임 플레이어(game player)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재임 중 그의 비서실장이었던 임종석은 ”(윤석열 정부 들어) 무너져가는 외교나 정치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시고, 그렇게 소리를 내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당신 책임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고 했지만 본격적인 ‘정치 재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한동훈의 거취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거취도 관심사다. 8월로 예상되는 새 지도부 구성 때 당대표를 맡아 대권 주자로서 위상을 굳힐 수도 있고, 아니면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잠시 정치판을 떠날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유력 대권 주자로서 위상은 살아 있을 것이다. 비록 선거를 승리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고군분투했던 그의 헌신과 열정은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동훈의 움직임에 따라 차기 대권 경쟁은 조기에 가시화할 게 분명하다.
벌써 잠룡(潛龍)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여권에선 한동훈, 오세훈, 안철수, 나경원, 원희룡 등이, 민주당 쪽에선 이재명 대표 외에 김동연 경기지사 이름이 나돈다. 정치는 ‘생물(生物)'이라고 했다.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크고 있는지 누가 아는가. 벌써 이쪽저쪽으로 줄을 섰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 모두가 윤 대통령에겐 부담이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칙과 상식에 충실하되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과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필자는 지난번 칼럼에서 윤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1대1 영수회담 가능성에 대해 “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에 관한 문제일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제는 갑과 을이 바뀐 것일까. 선거는 끝났지만 22대 총선 얘기는 계속된다.
필자 주요 이력
▷고려대 정치학 박사 ▷동아일보 정치부장 ▷동아일보 논설실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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