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박물관과 전시
한국 미술의 세계화가 속도를 내는 요즘 여전히 예술가와 큐레이터, 그리고 미술박물관이 전시와 전시도록 발간 등의 역할에 대해 서로의 주장이 상충하면서 작가가 미술박물관과 큐레이터를 향해 볼멘소리를 내놓는 봉건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여기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는 속담과 달리 작가와 큐레이터, 그리고 미술박물관의 갈등을 부추기는 ‘말리는 시누이’까지 합세해 점입가경이다.
사실 작가와 큐레이터와 미술박물관은 문화예술계는 물론 당대 문화예술을 형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상호 보완적이며 협력적인 관계라야 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미술박물관 양자 또는 삼자는 우선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
특히 ‘전시’는 미술박물관의 제2 저작행위이자 그 성과물로, 이때 큐레이터는 작가는 물론 미술박물관의 구성원들과 협업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기반으로 이를 해석하고 맥락화하는 큐레이션을 통해 생산되는 창작물이다. 따라서 미술박물관의 큐레이터는 작가의 작품에서 시작하지만 이를 근거로 새로운 예술적 성과물을 생산해내는 창작자라는 점에서 미술박물관 전시에서 큐레이터는 작가와 같은 창조적 행위를 하는 작가인 것이다. 따라서 전시에서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는 동업자 또는 공범(?)과 같은 관계다.
이때 하나의 성공적인 전시를 위해서는 서로의 역할에 대한 존중과 자율성이 중요하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충실하고 큐레이터는 다면적인 전시 개념의 정리, 전시가 지향하는 여러 목적에 부합하는 것은 물론 관객과 뚜렷한 방식으로 소통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미술박물관의 전시는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상설전시(Permanent Exhibitions)와 기획전시(Temporary Exhibitions)로 나뉜다. 상설전시는 미술박물관의 필수로 자체 컬렉션을 기반으로 전시가 구성되며 미술박물관의 목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특징과 성격을 지닌다. 관람객은 언제든지 컬렉션을 둘러보며 미술박물관이 수장 보존하고 있는 문화유산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미술박물관은 가장 중요한 상설전시가 매우 형식적이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도 상설 전시 없이 기획 전시에 집중하는 소장기능이 없는 전시관(Exhibition Hall)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마치 고양이를 호랑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일이자 상설전시 없이 기획전시로 일관하는 기관을 미술박물관이라 칭하는 것도 난센스다.
기획 전시는 미술박물관이 지향하는 목표를 전제로 특정 주제, 예술 사조 또는 개별 작가를 탐구하는 전시를 말한다. 전시는 대개 소장품 일부가 포함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전시 기간이 제한적이란 점은 공통점이다.
기획 전시를 통해 미술박물관은 현대 작가와 교류하며 그들의 세상을 대하는 다양한 관점을 선보이며 현재의 정치, 사회, 문화적 문제에 대한 작가들의 눈을 통해 신선한 통찰력을 제공하며, 이를 확인하고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며 관람객과의 대화를 촉진한다. 물론 전 세계 모든 미술박물관은 고대 문명에서 현대 미술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기획 전시를 연다. 고대나 외국 예술 품을 전시해 교육 프로그램과 가이드 투어를 통해 유물 또는 미술품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때 미술박물관은 단순히 대중의 기호에 봉사하고 취미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를 지닌 전시로 관객의 마음을 살찌우고 예술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야 한다. 특히 큐레이터는 전시에서 유물 또는 미술품의 보존과 접근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고 고민해야 한다.
결국 미술박물관 전시는 문화 교류, 역사 탐구 및 예술적 감상을 위한 역동적인 플랫폼 역할을 하며 이 플랫폼에서 큐레이터는 우리를 과거와 연결하고, 창의성을 고취하며,공유하는 문화예술적 유산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촉진한다.
◆공생 관계
특정 작가의 회고전이나 예술적 성과를 드러내고자 하는 기획 전시의 경우 작가와 큐레이터의 협업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원만한 협업을 위해서 작가는 작가대로, 큐레이터는 큐레이터대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야 하며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특히 전시에서 작가와 큐레이터는 미술박물관이란 무대에 하나의 작품을 올리는 공동창작자이기 때문에 큐레이터는 작가의 창의성과 독특한 관점을 인정하면서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미술박물관의 전시목표와 관점을 설명하고 작가의 이해와 동의를 받아야 한다. 사실 이런 동의가 없다면 전시 기획을 시작하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전시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이런 합의와 동의 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
따라서 작가는 큐레이터에게 자신의 예술적 비전과 의도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전시에 관한 큐레이션에 한해서는 큐레이터의 전문성을 존중해야 한다. 특히 작가는 작품에 관한 영감과 예술적 성취 여정, 그리고 전시 아이디어와 자신의 전시에 대한 구상을 설명해야 한다.
큐레이터는 이를 바탕으로 전시의 개념, 주제, 목표를 투명하게 작가에게 전달한다. 특히 기획 과정에서 작가의 의견을 구하면서 협업하는 과정에서 큐레이터는 전시의 구성(Layout), 서사(Narrative)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설명한다. 또 작품의 배치와 조명, 전시의 맥락을 결정하는데 작가의 의견을 듣는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전시를 기획하는 미술박물관의 목적과 맥락, 관객과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따라 스스로 자신의 출품작품을 미술관의 기획의도에 따라 조정한다.
물론 큐레이터는 작가의 배경, 문화적 맥락, 예술적 진화에 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맥락을 만들어 전시를 풍성하게 한다. 이때 작가는 예술적 무결성을 유지하면서 큐레이터의 지침을 수용해야 한다. 이때 큐레이터의 지침은 전시를 주관하는 미술박물관의 지침을 의미한다. 물론 이때 큐레이터의 비전과 작가의 창의적 자유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작가의 실험을 위한 여지, 신선함은 허용되어야 한다. 큐레이터는 미술박물관과 예술계의 평판에 대해 자신의 작가와 작품을 옹호하는 대신 작가는 자신의 예술과 미학을 사회적, 예술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큐레이터의 전문성을 믿어야 한다.
큐레이터는 카탈로그 에세이, 대담, 언론 보도를 통해 작가를 홍보하는 가운데 전시가 끝나고 나서도 작가와 일정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특정 전시회를 넘어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협업을 통해 작가의 경력을 지켜보고, 타 전시회 참가는 물론 지속적인 학술적 뮤제오 그래픽적 조언을 제공한다. 또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큐레이터로부터 작가는 건설적인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작업을 발전 또는 개선할 수 있다. 본질적으로 작가와 큐레이터의 공생 관계는 사회적 창의성을 키우고 문화 기관을 풍요롭게 하며 예술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장한다.
이런 공생관계에도 불구하고 요즘 간혹 들려오는 작가의 일방적인 항변과 비영리 공공기관이라는 기관의 본래 성격 때문에 해야 할 말도 ‘말로서 말이 많아질 것을 걱정해’ 말을 피해야 하는 미술박물관의 함구는 사회적으로 오해만 더 해가고 있다. 세상은 팍팍해져 살기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무슨 문화예술이냐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서 이런 지엽말단적인 일로 미술동네가 사회적으로 매우 시끄러운 동네라는 인식을 하게 하는 것이 답답하다.
◆갈등? 또는 대립?
세상살이에서 개성이 강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일하다 보면 갈등과 문제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때 이런 갈등과 생각의 차이를 어떻게 잘 조정하고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고 합의점을 찾아 넘어가느냐 하는 것이 진정한 작가와 큐레이터의 실력이다.
이렇게 대립하는 경우는 대개 작가의 예술적 비전과 큐레이터의 전시 방향성이 다를 경우 긴장 관계가 발생한다. 특히 큐레이터는 작가의 전시에 관한 비전과 미술박물관의 전체 전시 콘셉트와 방침과 균형을 맞추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작가의 작품에는 개인적인 의미나 문화적 함의가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큐레이터가 이를 다르게 해석하거나 자신의 작품을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석할 경우 작가는 저항하거나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큐레이터의 이런 해석은 더 넓은 주제 안에서 예술을 맥락화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며 또한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주제의 일관성을 우선하려는 입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예술을 맥락화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간혹 공간의 제약이나 디스플레이를 두고도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작가는 특정 작품이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전시되기를 원한다.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제한된 공간은 타협 외에는 방법이 없다. 따라서 작가와 큐레이터는 협상을 통해 이를 해소해야 한다. 다만 이때 전시 공간에 대한 활용과 이해는 해당 미술박물관에서 일하는 큐레이터가 경험을 통해 훨씬 더 잘 알고 있어서 대부분 작가는 이를 따르지만, 때에 따라서는 고집을 부리는 작가도 있다. 이때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차피 전시는 예정된 날에 개막할 수 없어서 작가와 큐레이터는 합의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작가의 경우 예술적인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려 하지만 동시에 큐레이터는 미술박물관의 평판도 신경을 쓰고 또 미술박물관 내부의 지침과 내규 등 가이드라인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때 큐레이터는 혁신과 규범의 준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결단의 어려운 과정을 겪게 된다. 특히 전시에서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관객의 공감을 얻기를 원하지만, 큐레이터는 예술적 복잡성보다 관객의 접근성을 우선시할 때가 많다. 또 큐레이터는 관객의 이해와 참여를 위해 때때로 작품의 복잡한 개념을 단순화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작품성을 희석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때로는 작가의 자존심은 자신의 작품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큐레이터가 작품을 경시한다고 여기면 좌절하거나 화를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유명해진 소위 원로작가나 인기작가의 경우 자신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좀 더 다른 대접과 예우 또는 전시에서 특별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작가는 전시에서 나타나는 당면한 맥락에 집중하지만 큐레이터는 더 넓은 미술사적 입장에서 전시를 바라본다. 이때 큐레이터는 미술박물관 내에서 나름의 권한과 재량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작가가 위축되지 않도록 섬세하게 작가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늘 그들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배려한다. 그리고 이런 작가와 큐레이터의 열과 성 그리고 배려와 양보가 씨줄과 날줄로 짜여 한 폭의 직물처럼 전시가 탄생한다.
◆미묘한 균형
작가가 큐레이터의 결정에 타협을 거부할 때 큐레이터는 예술적 완성도와 전체 전시의 일관성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 이때 가장 먼저 사용하는 방법은 대화와 이해다. 큐레이터는 작가와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면서 작품에 담긴 작가의 관점, 동기, 의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때 적극적인 경청과 공감은 중요하며 이를 통해 큐레이터는 작가가 작품에 투자하는 정서적 가치를 인정한다.
하지만 때로는 큐레이터는 작가에게 전시회의 주제, 관객, 큐레이터의 비전의 인과 관계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때 큐레이터는 각각의 작품이 전시의 더 큰 전개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하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때로 작가는 예산상의 문제나 운송이나 물류 상의 제약, 공간적 한계 또는 주제의 응집력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큐레이터는 이런 면을 작가에게 소상히 설명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전시는 열린다. 이는 큐레이터와 작가가 서로의 목표에 부합하는 타협점을 찾아 미묘한 합의에 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합의는 큐레이터의 역량이 비례한다. 따라서 큐레이터는 합의를 위해 우선 협상할 수 없는 것과 조정할 수 있는 것을 정한다.
이때 큐레이터는 각각의 결정이 전체 전시에 미칠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창의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큐레이터는 작가의 의도를 구현할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 제시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조명, 작품배치 또는 텍스트의 조정 같은 세세한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또 때로는 파격적으로 기존의 큐레이팅 틀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할 필요도 있다. 물론 이런 경우 종래의 기관의 관행과 내부지침 타 작가와의 형평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예산과 법령의 준수라는 문제를 넘어서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리고 어렵게 합의점을 찾았다면 토론, 합의 및 의견 불일치에 대한 명확한 문서화를 통해 투명성과 책임을 보장해야 한다. 아무튼 본질적으로 큐레이터와 작가의 관계는 협업, 타협,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발전한다. 또한 큐레이터와 작가의 협업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에 남는 전시회가 탄생하는 것이다.
◆큐레이터에 대한 시대착오적 인식
아직도 한국의 박물관 문화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고, 한국미술의 근간이라 할 국립근대미술관조차 없는 현실에서 큐레이터와 미술박물관에 대한 개념이 바로 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그런 것을 바라는 것조차 사치인지도 모른다.
한국에 아방가르드 미술이 등장한 것도 50여 년이 넘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인식이나 대접이 아니라 미술 동네 특히 미술박물관에서도 큐레이터에 대한 인식은 푸대접을 넘어 무대접이다. 일부 원로작가들은 큐레이터를 자신의 어시스턴트나 전시에 따른 행정적인 일을 수행하는 행정 요원으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나이가 어리다고 전문가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하대하거나 이*, 저* 하는 경우까지 있다니 아연실색할 노릇이다. 또 자신의 딸이나 손자뻘 되는 젊은 큐레이터에게 전시를 위한 미팅에서 성적 희롱이나 유사 발언을 하기도 한다.
어떤 원로 작가는 미술박물관이 소속된 부처 장관이나 지방정부의 시장이나 도지사가 자신의 전시를 위해 스튜디오를 방문한다고, 해당 미술박물관의 학예실장이나 큐레이터를 자신의 작업실로 부르기도 한다. 물론 어느 정신 나간 장관, 도백, 시장이 작가의 작업실을 방문하랴만, 그래도 가보지 않을 수 없는 처지라 가 대기했지만 장관이나 도백의 얼굴은 보도 못하고 돌아온 큐레이터도 있다.
이런 유치한 방식으로 큐레이터를 길들이려는 태도는 작가와 큐레이터의 관계를 넘어 제아무리 유명작가라 하더라도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사실 필자는 8개월 전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다소 길지만, 인용하면 ‘미술계의 어른을 자처하는 작가가 미술관의 손자나 자식뻘 되는 큐레이터에게 나이와 권위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설득과 협의를 통해 전시를 진행하기보다는 언론에 알려 이를 기사화하거나, 상급 기관에 이야기해 외부의 힘을 빌려 큐레이터를 압박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서 전시를 앞두고 서로 합의한 후 막상 진행해보니 마음에 안 든다고 이를 번복하고자 차상급기관장을 언급하거나, “야, 주인 나오라고 해”라고 하듯 관장과 이야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는 아방가르드 한 실험적인 예술에 평생을 바쳐온 원로 노 작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작가로서 인간을, 큐레이터를 대하는 어른다운 인품과 성정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아니면 작품이 아방가르드 하다 해서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도 아방가르드 하라는 면허를 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인데 말이다.
미술관 전시는 유명한 소설을 영화로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소설가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할 경우 전적으로 영화의 내용은 각색과 감독의 영역이다.
또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경우 작가의 작품은 1차 저작물에 해당 되고 전시는 디스플레이와 조사연구를 통해 맥락화된 2차 저작물에 해당된다. 따라서 소설가가 과도하게 영화의 내용과 방향에 참여가 아닌 관여는 자신의 역할을 벗어나는 일이다.
또 자신의 예술적 의도를 존중받으려면 2차 저작자인 음악의 경우 지휘자나 편곡자, 영화의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의 의도를 무시하면 안 될 것이다. 이는 미술관 전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사실 작가와 미술박물관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고 다방면에 걸쳐 협력과 긴장을 통해 작동하는 사이다. 사실 작가들은 미술박물관의 인정을 갈망한다. 특히 전 경력을 아우르는 회고전을 미술박물관에서 개최되는 것은 작가에게 최고의 영예 중 하나다.
또한 미술박물관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더 많은 대중에게 선보이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미술사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물론 한편으로 많은 작가들은 미술박물관의 안정성,
상업화, 대중성에 저항하며 일부는 이런 저항을 작품에 반영해 미술박물관 자체를 비판하거나 제도를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작가의 꿈은 미술박물관에서 전시를 갖는 일이다.
물론 그럼에도 현대의 작가들은 비평적으로나 창의적으로 미술박물관과 계속 교류하고 있다. 그래서 미술박물관은 작가의 비전을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작가는 미술박물관 풍경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시큐레이터는 전시를 조직하는 사람으로 큐레이터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전시할 것인지, 전시회의 제목이나 주제를 결정하며 전통적으로 교육자, 공공 프로그램 및 기타 직원과 같은 ‘관객 전문가’와 함께 일하는 ‘대상 전문가’이다.
따라서 큐레이터는 전시회뿐만 아니라 출판물, 웹 사이트, 포럼 및 기타 이벤트를 통해 관객과 교류한다. 그리고 오늘날 큐레이터의 전통적인 역할은 심오한 변화를 겪어 그 어느 때보다 역사 유물과 현대사이의 간극을 메워 주는 없어서는 안 될 네트워크 제공자이자 내레이터(Narrator)로 인식된다.
예술의 실천적 활동이 큐레이터를 통해 확장되면서 큐레이터의 작업은 이를 수용하거나 반영하면서 예술가의 작품 제작의 일부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예술의 비물질화는 개념 예술, 프로세스 아트, 행위 예술을 포함하고자 예술을 재정의하도록 했다.
이후 큐레이터의 모습은 더이상 관료가 아닌 콘서트, 연극, 오페라를 조직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영화나 텔레비전 제작자와 같은 문화적 임프레사리오(Impresario)를 넘어 일종의 작가로 떠올랐다.
큐레이터를 작가로, 혹은 그 반대로 정의하는 것은 예술과 큐레이터의 실천이 영역이 겹치면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큐레이터는 수동적인 조력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 즉 전시를 하나의 이벤트로 연출하는 데 책임이 있는 재구성된 창조적 행위자이다.
이제 큐레이터는 전시 코디네이션을 넘어 창의성을 키우는 것과 그 사회적 역할을 위한 아트 큐레이션에 내재된 책임을 포함한다. 이렇게 변화한 세상에 현대미술의 선봉에 서있다는 일부 원로 또는 유명작가들의 시대착오적인 말과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언제까지 이미 합의했던 일을 번복하려 시도하는 그들의 벼랑 끝 전술에 속수무책이 유일한 대응방법일까.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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