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 총통은 한발 더 나아가 임기 중 대만을 '인공지능(AI) 섬'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AI 시대 도래에 발맞춰 새판 짜기에 한창인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각오다.
'대만=반도체'라는 자신감의 연원이 궁금하다. 대만 역사에서 1979년은 잊기 힘든 상흔이다. 2차 오일쇼크로 경공업 중심의 대만 경제는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 봉착했다. 이런 가운데 '혈맹' 미국은 그해 1월 1일을 기해 대만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공식 수교했다.
미증유의 위기 속에 대만이 선택한 활로가 정보기술(IT) 위주의 산업 구조 대전환이다. 단교국이 기하급수로 늘면서 기존 수출 주력 품목은 판로가 끊겼다. 자본은 적지만 인재가 풍부한 대만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IT 제조 역량 강화였다.
1931년 중국 저장성 닝보 태생인 모리스 창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등이 잇따라 발발하자 기약 없는 피란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1949년 하버드대에 입학한 뒤 호메로스와 셰익스피어에 심취해 작가를 꿈꾸던 그는 가족 부양이라는 현실적 이유로 매사추세츠공대(MIT)에 다시 입학해 기계공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전력공급장치 제조사인 실바니아 일렉트로룩스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3년 후 반도체 전문기업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로 이직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숙적 IBM을 2위로 밀어낸 공을 인정받아 1978년에는 그룹 전체 부사장에 앉았다. 당시 글로벌 기업에서 근무하던 중국계 인사 중 최고위직이었다.
그의 경험과 혜안의 결정판이 반도체 설계·제조 분리 구상이다. 원천 기술이 부족한 대만은 제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게 모리스 창의 판단이었고 1987년 파운드리(위탁생산) 전문기업 TSMC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모리스 창은 1993년 설립된 한 반도체 스타트업 측에서 제조 주문을 겸한 안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엔비디아 창업자인 젠슨 황(황런쉰·黃仁勳). 대만 타이난성 태생으로 9살 때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하고 프랜차이즈 식당 한쪽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다.
대만계라는 공통점은 차치하고 안정적인 발주처와 공급처가 필요했던 양사 이해 관계가 충족되는 파트너십 구축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나 애플과 퀄컴의 협력사쯤으로 치부되던 TSMC는 파운드리 시장의 최강자로 등극했다. 엔비디아는 PC 게임용 부품 정도로 여겨지던 GPU(그래픽처리장치)를 앞세워 AI 가치사슬의 최상단에 자리 잡았다.
한때 인텔과 함께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양분하던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는 하청 업체로 지위가 격하됐다. 그마저도 발주자 입맛에 맞는 품질 달성이 지연되며 HBM(고대역폭메모리)은 SK하이닉스에 선수를 뺏긴 처지다.
고비마다 둔 패착이 뼈아프다. 팹리스(설계 전문) 경쟁력 제고를 위해 개발한 스마트폰의 두뇌 '엑시노스'는 범용화에 실패했고,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파운드리 사업은 한 자릿수 점유율에 머물고 있다. 삼성전자 부문 간 방화벽이 두꺼워 "우리에게 맡겨도 기술 정보가 새지 않는다"고 강변하지만 애플을 비롯한 거래처의 의심은 여전하다. 생산만 할 뿐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TSMC의 경영 철학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2007년 벽두에 취임 20주년을 맞은 이건희 회장은 기자들을 향해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 우리만 샌드위치가 됐다"며 향후 20년을 걱정스럽게 내다본 바 있다. 주어를 TSMC와 엔비디아로 바꾸든, 주요국의 반도체 육성 전략으로 바꾸든 모두 들어맞는다.
베이징 특파원 시절 만난 TSMC의 한 임원은 '군자는 원수를 갚는 데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君子報仇 十年不晩)'는 사기(史記) 속 구절을 인용하며 삼성전자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긴 시간 준비했다고 귀띔했다.
승기를 빼앗긴 건 인정하자. 이제는 인내하고 실력을 쌓으며 역공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모리스와 젠슨이 보여준 '비전'을 갖추는 게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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