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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안진진처럼 선택했을까?”
1998년 초판된 소설 <모순>(양귀자, 쓰다)의 주인공 안진진(25), 결혼 적령기인 그녀는 극과 극인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한다. 한 남자는 추억까지 미리 디자인할 정도로 치밀하다면, 또 다른 남자는 언제라도 훌쩍 떠나는 게 익숙할 정도로 감성적이다. 안진진은 이 둘 사이에서 옳다 또는 그르다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선택을 한다.
출간 20년이 넘은 이 책은 최근 5년간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올해에도 베스트셀러 순위 상위권을 차지하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특별한 마케팅이 없는 <모순>의 판매 행진을 두고 '미스터리'라고 표현한다.
첫 출간 당시 주인공 안진진의 나이는 25세. 만약 현실 인물이라면 올해 52세다. 놀라운 점은 현재 20·30대 여성 독자들이 “안진진에게 완전히 몰입했다”고 입을 모으는 것이다. 고민과 갈등에 빠진 안진진의 모습이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단다.
공감은 책을 덮는다고 끝나지 않는다. 독자들은 '내가 안진진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공유한다. 남성에게 적극적으로 이 책을 권하기도 한다. 사실상 '책 영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직장인 최모씨(30)는 여자 친구 권유로 <모순>을 읽었다. “주변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을 보면 남자 친구에게 <모순>을 읽게 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책 속의 안진진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여성의 삶에 대한 태도나 고민을 잘 짚어 내고 있으니 그걸 보고 이입해 보라는 것이죠. 여성끼리 읽다가 남성도 조금씩 읽는 것 같아요. 제 친형도 형수가 읽으라고 해서 이달 안에 읽는 게 목표래요.”
실제 <모순>의 주요 독자층은 여성이다.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여성 구매자 비율은 78.2%에 달했다. 올해도 비슷한 흐름이다. 여성 독자가 78.8%로 남성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연령대별로 보면 20대 21%, 30대 19.6%, 40대 20.3% 등 20~40대 여성에게 고르게 인기를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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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
<모순> 리뷰에는 유독 ‘몰입’이란 단어가 많다. 학비를 모으기 위해 대학을 휴학한 주인공은 이모부의 도움으로 간신히 중견업체에 취업한다. 그리고 청혼할지도 모를 두 남자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직장인 장모씨(29·여)는 인생의 중요 기점에 선 안진진의 모습에서 자신을 봤다. "안진진의 상황은 현 취업세대와 비슷해요. 살기 퍽퍽하고, 취업도 안 되죠. 취업했더라도 다시 진로 고민에 빠지고, 그러는 사이 결혼을 빨리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까지 밀려와요.”
공감하는 지점은 세대별로 다른 모습이다. 김모씨(38·여)는 "인생 자체가 모순"이라고 말했다. "치밀한 사람이라도 예상치 못한 죽음 등 돌발 상황을 막지 못하잖아요. 우연이 인생의 방향을 가르기도 하고, 정말 힘든데 그게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기도 하고요. 딱 잘라서 '나는 행복해' 혹은 '나는 불행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결혼도 삶도 그래요. 아무리 머리 굴려봤자 살아봐야 안다니까요."
MBTI를 추측하는 건 재미 요소다. 온라인에는 주인공이 양다리 걸친 남자들의 MBTI를 INFP, ESTJ 등으로 추측하는 글들이 많다. 최모씨(30·남)는 <모순> 속 캐릭터를 통해 자신의 연애를 돌아보게 됐다. “소극적인 남성 캐릭터가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여주의 선택도 이해하게 됐고요. 특별한 악인 없이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는, 측은하게 바라보게 해주는 작품인 것 같아요.”
소통
공감은 소통으로 이어졌다. 리뷰나 독서모임(독모)을 통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여성 독자들이 <모순>을 ‘원픽’으로 꼽은 점도 주요 인기 요인이다. 단적인 예로 예스24가 운영하는 독서모임 사락은 출시 후 6개월(2024년 8월~2025년 1월)간 독서모임을 개설하고 참여자를 모집한 ‘모임 개설자’ 중 대부분이 여성(73.7%)이었다.직장인 나모씨(29·여)는 “당근마켓 동네친구 모임 등을 통해 독모를 나간다”며 “독모는 90%가 여자, 10%가 남자”라고 말했다. 이어 “독모에서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여성 소설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나씨는 “한강 작가의 책을 읽었더니 작품이 다 좋더라”며 “이후 여성 작가의 책을 찾아 읽고 있다”고 했다. 실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전후로 <모순> 판매는 113.8%나 늘었다. 정유정 <종의 기원>(180.1%), 김혜순 <날개환상통>(303.0%) 등도 증가세가 두드러졌다.
영국에선 도스토옙스키 '백야'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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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에서 소통, 인기로 이어지는 흐름은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영국에서는 지난해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1821~1881)의 1848년작 소설 <백야>가 번역서 판매 상위 4위를 기록하며 화제를 모았다. 외로움을 다룬 이 작품은 우울한 영국 젊은 세대의 공감을 자아냈고, 펭귄 클래식판 <백야> 표지를 SNS에 올리는 것이 밈이 됐다. 덩달아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1840~1893)와 쇼스타코비치(1906~1975)의 음악도 주목받았다. 펭귄은 이 열풍을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으로 이어갈 생각인 듯하다. 오는 3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등 여섯 작품을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표지로 바꿔 출간한다.
웹진도 인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가 운영하는 온라인 문예지 ‘문장웹진’은 정세랑 작가의 <웨딩드레스44>와 김기태 작가의 <두 사람이 인터내셔널>이 각각 조회 수 7만1308건, 4만593건을 기록했다. 문장웹진 관계자는 “웹진은 링크, 이미지와 함께 감상을 올리면 되기 때문에 힙하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며 “웹진에 대한 관심이 커진 점, 웹진의 문학 퀄리티가 기존 문예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높아진 점 등이 인기 요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 올해 2월까지 ‘문장웹진’에 게재된 작품 중 주요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20편에 이른다. 지난해 1월호에 실린 예소연의 ‘그 개와 혁명’은 제48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비롯해 이효석문학상과 김유정문학상 우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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