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초록, 파랑, 빨강 등 형형색색 네모난 셀로판지로 세상을 비춰 보는 놀이가 무척 재미있었다. 셀로판지 한 장, 혹은 여러 장을 포개어 보면 색깔만 달라졌을 뿐인데도, 갑자기 다른 세상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셀로판지 한 겹의 필터링이 그 순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고 할까.
요즘 ‘지브리 스타일 밈’을 보면서 당시 기억이 떠올랐다. 오픈AI의 챗GPT는 “지브리풍으로 바꿔줘” 같은 간단한 프롬프트만으로도 사진을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바꿔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지브리풍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 공유하는 게 유행이 됐고, 덕분에 오픈AI는 단 60분 만에 이용자를 100만명이나 늘릴 수 있었다.
알려졌듯 챗GPT는 지브리 말고도 심슨, 디즈니, 도라에몽 등 다양한 스타일로 사진을 바꿀 수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지브리풍’에 유독 열광한 데는 지브리 애니메이션 특유의 ‘힐링 감성’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마치 자신이나 가족, 연인이 ‘이웃집 토토로’ 속 등장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가족사진을 지브리풍으로 바꿨다는 한 40대 남성은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처럼 가족애가 충만했던 시절의 느낌이더라”라고 말했다. 험난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챗GPT를 통해 재미와 함께 휴머니즘과 힐링을 찾았다고나 할까.
책 <귀여워서 삽니다>(한스미디어, 강승혜 지음)에 따르면 귀엽고 포근한 곰 인형 테디베어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성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2차 세계대전 등 전쟁과 불황을 겪으면서 위안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란다. 지브리풍 인기는 어쩌면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그만큼 살기 각박해졌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지브리풍은 새로운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는 데서 테디베어나 셀로판지와는 다르겠다. 미국 백악관과 이스라엘군이 불법 이민자 체포 순간과 이스라엘 군부 모습을 지브리풍으로 생성한 사진을 각각 X 계정을 통해 공개했을 때 대다수 이용자가 저작권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강한 반감을 표한 데는 ‘지브리풍’ 특유의 감성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이 자리하지 않았나 싶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을 거치지 않은 ‘지브리풍’은 전쟁마저 따뜻하게 미화하는 데 악용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계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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