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대통령이 23일 취임 후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시게루 총리와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합의했다. 일본 현지에선 이 대통령이 미국 보다 먼저 일본을 찾은 ‘서프라이즈 방문’을 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미국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향후 한·일 관계는 한국이 아닌 일본 변수, 즉 이시바 정권의 운명이 향방을 좌우할 것이라는 관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일본이 이번 회담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한국 대통령이 취임 후 미국 보다 먼저 일본을 방문한 것이 양국 수교 이후 처음이라는 점이다. 이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가 올해 6월 캐나다에서 열린 주요 7개국 정상회의(G7)에서 회동한 지 불과 두 달여 밖에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났음에도 이번 회담이 강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다.
아사히신문은 이와 관련해 “한국의 ‘일본 중시’ 배경에는 미국 트럼프 정권 대응에 있어 일본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쌓아두기 위한 필요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관세 등 경제 분야뿐 아니라 안보 면에서도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트럼프 정권에 대응해야 하기 위해선 같은 처지의 일본과 긴밀한 소통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 역시 안보 면에 있어 한국과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가져가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010년대 초반만 해도 핵 개발을 추진하는 북한이 고립된 상태였으나, 지금은 북한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고리로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고 중국도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며 이전과는 달라진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지목했다. 다음 달 8일에는 나카타니 겐 방위상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방위상으로서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외무성 관계자는 “이렇게까지 한·일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는 경우도 드물다”고 짚었다.
상황이 이러한 가운데 이시바 정권은 지난해 10월부터 일관되게 한·일 관계 진전에 힘을 쏟아 왔다. 특히 올해 6월 도쿄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한·일수교 60주년 기념행사에는 이시바 총리가 직접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서울의 일본대사관에서 열린 같은 행사에서는 이 대통령이 영상을 통해 축사를 보낸 바 있다. 아사히신문은 “이시바 총리는 한국 정상과의 개인적인 신뢰관계 구축에 적극적”이라면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매우 좋은 인상을 갖고 존경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이시바 총리가 한국과의 관계에 애착을 갖는 데는 이시바 개인의 역사관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그는 2017년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패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나타내 한국 여론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또한 지난 15일 ‘종전 80주년 전몰자 추도식’에서는 일본 총리로서 13년 만에 처음으로 ‘반성’을 입에 올렸다.
이시바 총리는 이번 회담에서 “1998년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고 표명했다. 해당 공동선언에서 오부치 게이조 당시 총리는 한국 식민지 지배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담은 바 있다.
다만 문제는 이시바 정권의 존속 여부다. 중의원(하원)에 이어 참의원(상원) 선거에서도 크게 패하면서 자민당 내 ‘이시바 끌어내리기’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 이시바’로 불리는 다카이치 사나에 전 경제안보담당상과 고이즈미 신지로 농림수산상 모두 종전 기념일인 지난 8월 15일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아사히는 “이시바 정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권 발족할 경우 역사 문제가 다시 재연되면서 양호한 한·일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짚었다. 일본의 한 한·일 관계 전문가는 아주경제에 “지금까지는 한국이 정권 교체 때마다 대일 정책이 바뀌면서 한·일 관계의 변수가 되었지만 이제는 일본의 정국 상황이 주요 변수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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