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경환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금년은 베트남 통일 50주년이자 독립 8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고, 이를 계기로 호찌민은 8월 혁명을 성공시켜 1945년 9월 2일 독립을 선언하고 신생 베트남민주공화국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프랑스를 대체하여 5년간 베트남을 점령했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북위 16도 선을 경계로 중국의 장제스 군이 북부에, 남부에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독립선언에도 불구하고 호찌민 주석의 통치력은 전국에 미치지 못하였다. 정국은 혼란하였고, 베트남을 식민지배했던 프랑스는 중국, 영국과 협상하여 1946년에 군을 진주시켰다. 일본군에 의해 축출되었던 프랑스군의 베트남 재진주는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의 원인이 되었고,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대첩으로 프랑스가 베트민군에 무조건 항복하고 그해 10월 12일 하이퐁항을 통해 완전히 철수하였다.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1954년 7월 20일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 선을 경계로 다시 분단되었다. 이에 북부의 호찌민 군은 남부 베트남을 지원하는 미국과 항미전쟁을 치르고 1975년 4월 30일 통일을 달성하였고, 금년 통일 50주년을 맞이하였다. 그리고 베트남 독립과 통일을 이끈 호찌민 주석의 탄생 135주년이 되는 해이다.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순전히 호찌민 주석의 탁월한 영도력에 따른 결과였다.
호찌민은 1890년 5월 19일 응에안성 남단현 샌마을에서 태어나 11살 때 응우옌떳타인(阮必成)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것을 시작으로 1969년 9월 2일 79세로 서거하기까지 모두 175개의 가명과 필명을 사용하였다. 독립운동을 위해 신분을 감추려고 수시로 이름을 바꿔가며 사용했기 때문이다. 호찌민 주석의 철학은 국민과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자는 이른바 '바(3) 꿍(함께, 더불어) 정신'이다. 국민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더불어 사는 호찌민 주석의 철학이 1954년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고 독립을 달성하고 분단된 베트남을 통일시킨 원동력이었다. 통일 이듬해인 1976년 7월 2일 남부 베트남공화국의 수도 사이공은 그의 이름을 따서 호찌민시로 변경되었다.
호찌민 주석은 늘 모든 국민이 단결할 것을 강조하였다. 단결을 자신의 눈동자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하였다. 모든 간부는 도덕성이 높아야 하며 근검염정하고, 지공무사하여야 하며, 깨끗해야 하고, 영도자다워야 하며, 국민에게 충성스러운 공복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국민이 단결하고 지도자가 근검염정하고 지공무사하여야 조국 통일의 원동력이 될 수 있고, 통일이 되어야 진정으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며 온 국민의 단결을 주문하였다.
베트남 국가 발전의 ‘황금 기회’란 ‘안정적인 GDP(국내총생산) 성장’ '강력한 외국인 직접 투자 유입’ ‘수출 급증’ ‘자본주의 국가들이 베트남을 경제협력 파트너로 주목하고 있는 점’이다. 하지만 베트남의 비효율적인 행정 시스템과 만연해 있는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베트남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개혁하지 않으면서 베트남의 성장은 경쟁력을 잃게 될 것이다.
또럼 총비서는 호찌민국립정치학원에서 르엉끄엉 국가주석을 비롯한 정치국원, 당 중앙위원회 위원 등 국가 핵심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베트남의 시대가 오고 있다.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행정 업무를 혁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공직자들이 “관리하지 못하면 금지하려는 사고방식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며 공직자들의 무사안일, 책임 회피적 태도를 지적했다. 1986년 12월 ‘도이머이’ 정책을 도입하기 전 보급경제 체제하에서 쌀이 부족해 수입하던 베트남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면서 3년 만에 쌀 수출국으로 변모한 경험이 있다.
2045년 건국 100주년에 선진국 도약 목표
베트남은 독립과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5년까지 선진국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75년 통일을 1단계, 1986년 도이머이 개혁·개방 정책 도입을 2단계, 건국 100주년인 2045년 선진국 진입을 3단계 도약으로 보고 있다. 3단계 발전에 성공하기 위해 베트남은 2022년 11월 ‘2030년 마스터 플랜’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203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7500달러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매년 세계은행이 각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기준으로 전 세계의 중산층에 해당하는 상위 중소득 국가 그룹을 발표하는데 베트남은 이제 문턱에 다다랐다. 2023년 7월 1일부터 2024년 7월 1일까지 기준으로 상위 중소득 국가의 요건은 1인당 GNI가 4516~1만4005달러인데 2023년 베트남의 GNI는 4110달러였다. 2024년 베트남 GDP가 7% 성장해 GNI도 비슷한 수준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어 2025년에는 상위 중소득 국가에 진입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위 중소득 국가에서 그다음 단계인 고소득 선진국으로 진입하기는 쉽지 않다. 1990년대 세계화 이후 상위 중소득 국가에서 고소득 선진국으로 진입한 국가는 한국과 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도에 불과하다. 또럼 총비서가 베트남 정부 조직 개편이라는 초강수를 둔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베트남이 2045년까지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빠른 속도로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정부 조직의 대대적인 변혁이 있어야만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한국인 못지않게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들이다. 1975년 항미 전쟁이 끝나 통일이 되었지만 1979년까지 캄보디아·중국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1980년대에는 집단 농장체제, 미국과 중국의 경제 제재로 1988년까지만 하더라도 300만명 이상이 기아에 허덕여 쌀을 수입해야 할 정도로 경제가 어려운 나라였다. 1986년 내부 갈등 끝에 어렵게 ‘도이머이’ 개혁·개방 정책이 도입되었지만 관료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개혁은 쉽게 정칙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1989년 개인 농지 소유 확대 및 시장 경제정책이 도입되면서 쌀 생산량이 대폭 늘어나 지금은 세계 2위 쌀 수출국이 되었다. 1990년대부터 한국,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본격적으로 국제사회와 경제협력을 하면서 괄목할 정도로 베트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번 정부 조직 개편 과정으로 공무원사회에 많은 진통은 예상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베트남의 개혁은 성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베트남은 1986년 ‘도이머이’ 정책을 채택한 지 39년이 지나면서 베트남의 경제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다. 1992년 12월 22일 한·베 외교관계가 수립되어 한국의 1만여 개의 기업이 베트남에 투자하고 있다. 베트남은 한국 관광객이 제일 많이 찾는 나라가 되었다. 2024년에 외국인 관광객 1760만명이 베트남을 찾았고 그 가운데 한국인이 457만명으로 27%를 차지하였다. 다음이 중국인 374만명이었다. 2025년에는 관광객 유치 220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약 900년의 교류 역사 위에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관계는 최고 수준인 '포괄적 전략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되었고,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에 이은 한국의 3대 교역국이 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향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은 문화적인 유사성이 매우 높아 두 나라의 우호협력 관계는 빠르게 발전되어 왔다. 앞으로 디지털 시대의 한국과 베트남의 상호 문화교류의 발전을 위하여 서울에 '하노이로', 하노이에 '서울로'를 명명하면 좋겠다. 그리고 두 나라 수도에서 해마다 자국의 전통문화 축제와 음식 축제를 개최하면 양방향 문화 교류가 더욱 촉진될 수 있을 것이다.
베트남 독립 80주년, 통일 50주년과 호찌민 주석 탄생 135주년을 축하한다.
필자 주요 이력
▷응우옌짜이대학교 총장 ▷전 조선대 교수 ▷전 베트남학회 회장 ▷전 KGS국제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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