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란의 20년대'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 독감 유행이 잦아들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종료된 후 약 10년 정도 미국이 누렸던 풍요와 번영의 시대를 일컫는다.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을 초토화시켰다. 미국은 유럽에 식량과 군수 물자를 팔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공산품을 대규모로 수출하며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비약적으로 성장한 산업은 대규모의 고용을 창출하고 자동차가 중산층에 대대적으로 보급되며 미국에서는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전쟁과 팬데믹으로 그간 억눌렸던 소비와 쾌락의 욕구가 한꺼번에 분출했다.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9% 이상을 유지하며 중산층과 신흥 부유층이 크게 늘어났다. 자유분방한 재즈 음악과 현란한 춤, 그리고 사치와 향락의 문화가 극에 이른 시대였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했고 도덕적 퇴폐가 만연했던 당시의 시대상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원작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와 이를 바탕으로 재창작된 여려 편의 영화와 뮤지컬에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1920년대 주가 폭등의 이면에는 심각한 구조적 문제들이 널려 있었다. 우선, 투기적 거래의 만연에도 자유방임주의 체체하의 미 정부는 이를 그대로 방치했다. 투자금의 10배까지 대출해주는 은행들의 무분별한 신용 공여로 '마진 거래'(증거금 거래)가 급증했다. 소득 불평등 문제도 심각했다. 상위 5%가 전체 저축의 3분의 1을 보유하는 극심한 부의 편중은 실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가로막았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드디어 거품이 터졌다. 주식시장은 곤두박질쳤고, 10월 29일 '검은 화요일'에는 하루 만에 160억 달러의 시장가치가 증발했다. 이는 당시 미국 연방정부의 1년 예산을 웃도는 규모였다. 월스트리트의 증권맨들은 건물에서 투신했고, 수많은 투자자들이 하루아침에 파산했다. 월가의 대폭락(Wall Street Crash of 1929)을 계기로 광란의 20년대는 막을 내리고 미증유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시작된다. 미국의 대공황은 단일 국가의 위기를 넘어 전 세계 경제를 깊은 수렁 속에 빠지게 했다.
주식시장 폭락은 전면적인 실물경제 위기로 발전했다. 은행 시스템 붕괴 조짐에도 미국 정부는 낙관론에 기대어 머뭇거리다 금융시장 개입의 골든 타임을 놓쳤다.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미국에서 약 9000개 은행이 파산했다. 예금자들의 뱅크런으로 통화량은 급격히 감소하고 미 경제는 심각한 경기 침체로 빠지게 된다. 디플레이션의 악순환 속에서 물가는 계속 하락했고, 이는 다시 기업의 수익성 악화와 대량 해고로 이어졌다. 1933년 실직자는 약 1200만명에 이르러 실업률은 25%까지 치솟았다.
미국은 대공황 초기인 1930년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2만여 개의 수입품목에 대해 평균 4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는 스무트-홀리 관세법안을 제정했다. 발의를 담당한 오리건주의 공화당 하원의원 윌리스 홀리(Willis Hawely)와 유타주의 공화당 상원의원 리드 스무트(Reed Smoot)의 이름을 딴 이 법안은 지금까지도 보호무역주의를 상징하는 수식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발효 즉시 영국 등 미국과 교역하는 다른 나라들이 대규모 보복관세로 대응했다. 그 결과 1933년까지 국제 교역량이 65% 이상 감소했다.
스무트-홀리 관세법과 대공황
그렇다고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대공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대공황의 시발점인 주식 대폭락은 스무트-홀리 관세 제정 이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법은 국제 무역전쟁을 촉발하고 미국 내 수입품 가격 상승과 이로 인한 소비자 구매력 감소로 나타났다. 국제 금융 시스템의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세계 경제의 블록화와 경제적 민족주의를 강화시켰다. 즉, 대공황 초기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장기화된 중요한 요인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발 경제위기는 보호무역주의 확대와 당시 금본위제의 경직성으로 인해 전 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대공황의 긴 터널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신뢰는 뿌리째 흔들렸다.
1933년 취임한 프랭크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새로운 경제정책, 즉 뉴딜(New Deal)을 통한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으로 대공황의 늪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금본위제도 중단을 통해 금의 유출을 막아 통화 안정과 유동성을 확보하고, 금융시장의 널뛰기를 방지하기 위한 제동장치인 증권법도 통과시켰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 등 수많은 국토 개발 사업을 국가가 주도해 소득과 일자리를 창출했다. 하지만 미국을 대공황의 경제위기에서 진정 벗어나게 한 것은 2차 세계대전 발발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방비 지출을 늘리기 위한 대규모 재정 확대가 유효 수요를 창출했고, 파병과 군수 산업 호황으로 실업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새로운 국제 무역질서 구축에 나섰다. 1930년대 각국이 채택했던 보호무역주의와 근린궁핍화 정책은 세계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토대로 전후 국제 경제 질서는 자유무역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1944년 브레튼우즈 협정으로 달러화는 세계 기축통화로 등장했다. 1947 GATT(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가 창설되어 다자간 무역 자유화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미국 주도의 자유무역 체제는 국제 무역량을 급격히 증가시켰다. 개발도상국들의 수출 주도형 경제모델이 등장했고 국제 분업이 심화되며 생산성도 크개 향상되었다. GATT는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로 발전하며 더욱 포괄적인 다자간 무역 체제로 진화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랜 기간 미국이 주도한 자유국제시장질서는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해체되고 있다. 올해 1월 트럼프 2기 출범과 함께 국내 산업 보호와 제조업 부활을 내세우며 관세전쟁을 벌이고 있다. 1930년대처럼 상대 국가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제롬 파월 미국 연준 의장은 지난 16일 시카고 경제클럽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정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미국 경제에 장기적인 경제적 피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경제가 성장 둔화, 실업률 상승, 인플레이션 가속화라는 악순환에 빠져 지난 반세기 동안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준은 고용을 최대로 유지하고 물가를 안정시키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둔화하면 물가도 낮아지고 실업률이 올라가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만, 관세는 물가와 실업률을 둘 다 높일 가능성이 크다는 게 파월 의장의 인식이다.
트럼프는 파월이 자신의 요구대로 기준금리를 인하하기는커녕 관세 정책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우려를 경고하자 112년 연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중도 해임’ 카드까지 꺼내 보이고 있다. 2018년 연준 의장에 취임한 파월의 임기(연임 가능)는 내년 5월 까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을 중도에 해임하면 법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글로벌 금융시장은 수습 불가능의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다는 참모들의 조언도 듣고 있다고 미국 언론은 보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기간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끔찍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 2일 상호 관세 발표 이후 주가가 폭락하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며 금융시장이 '발작'하자 트럼프는 일단 중국을 제외하고 관세 협상을 요청한 국가들과 협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90일간 상호관세를 유예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 세계가 지금 대공황 직전?
경제위기의 주기와 사례를 분석한 '경제병리학'(2024) 저자이자 'IMF 위기를 예측한 경제학자'로 알려진 최용식 21세기경제학연구소 소장은 최근 자신의 유튜브 방송에서 미국의 자충수로 전 세계가 지금 대공황 직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 주식시장이 심각한 거품 상태라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미국에서 주식 투자하는 가구가 60%를 넘는다. 이는 대공황 때 비율보다 높다는 것이다. 둘째는 미국 경제는 전 세계 경제 규모에서 4분의 1밖에 안 되는데 시가총액은 4분의 3으로 경제 규모에 비해 시가총액이 세 배나 더 크다. 이는 일본이 1980년대 말 거품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을 때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셋째는 테슬라나 엔비디아 같은 미국 주식의 주가 수익률이 100배를 넘는 게 많고 심지어 600배를 넘는 등 거품이 지나치게 커졌다는 것이다. 넷째는 미국 소득 상위계층 10%가 주식 총액의 무려 93%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의 소득과 국부가 소득 최상위 계층으로 더욱 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소득과 국부가 최상위 계층으로 집중되면 유효수요가 낮아지고 그렇게 되면 경기 침체가 반드시 찾아오고,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 금융위기가 온다는 것이다.
과거 역사를 보면 글로벌 경제위기는 국제적 협력을 통해서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미 패권의 붕괴를 우려하는 트럼프는 전 세계를 상대로 미치광이 전략으로 대하고 있다. 그의 경제정책은 미래지향적이 아닌 19세기적 산업관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지속된 미국 제조업의 쇠퇴는 단순한 무역 불균형 때문이 아닌 자동화와 글로벌 경쟁 심화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 미국 일자리의 80%는 현재 서비스 산업에 집중되어 있는 현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AI 혁명 시대이다. 세계경제포럼이 지적한 바와 같이 미래 일자리는 AI 등 기술 혁신 분야에서 창출될 전망이다. 게다가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을 지낸 제이슨 퍼먼이 지적했듯이 트럼프 취임 후 지난 3개월간 전통 우방국들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미국을 '세계 어느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파트너'로 만들었다.
이수완 필자 주요 이력
▷코리아타임스 기자 ▷로이터통신 선임특파원 ▷로이터통신 편집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아주경제 글로벌본부장 ▷아주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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