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AI 병원경영 시대의 서막

 
권순용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교수
[권순용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교수]


의료 산업은 그 어떤 분야보다도 고유한 특수성과 다차원적 복잡성을 내포하고 있다. 단순한 기술적 혹은 운영적 차원을 초월하여,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사회적 형평성, 그리고 정치(精緻)한 전문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최근 인공지능(AI)의 기하급수적 발전과 함께 의료계에서도 AI 도입에 관한 담론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으나, 병원이라는 특수한 생태계에서 AI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의료 산업만의 고유한 본질을 심층적으로 파악하고 이에 부합하는 정교한 접근이 필수적이다. 실로 "구상이부(口上而腹)", 즉 입으로는 말하기 쉬우나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생명을 다루는 가치와 불확실성의 공존
의료 서비스의 근본적인 본질은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직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는 모든 경영적 의사결정에서 의료 품질과 환자 안전이 최우선적 가치로 정립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일반 기업에서는 효율성이나 수익성이 주요 지향점이 될 수 있으나, 병원에서는 이러한 가치들이 생명과 건강이라는 절대적 가치에 종속되어야 한다.
또한 의료 현장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내재한다. 동일한 진단명을 가진 환자라도 연령, 기저질환, 생활습관 등에 따라 상이한 경과를 나타낼 수 있으며, 이는 표준화된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함을 함의한다. 의료진은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축적된 지식과 임상 경험, 때로는 직관적 통찰에 의존하여 최적의 치료 결정을 도출한다.
이러한 특수한 환경에서 AI를 도입할 때는 무엇보다 의료 품질과 환자 안전을 최우선시하는 설계가 필수적이다. AI의 판단이 오류를 범할 경우 생명과 직결될 수 있기에, 극도로 낮은 오류율과 높은 신뢰성이 요구된다. 또한 AI는 의료진의 임상적 판단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보조하고 강화하는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무해함을 우선하라(First, do no harm)"는 원칙이 AI 도입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목할 점은 AI 모델의 '설명 가능성(Explainability)'이다. 의료진이 AI가 특정 결정을 도출한 논리적 근거를 명확히 이해할 수 있어야 신뢰하고 활용할 수 있으며, 환자에게도 적절한 설명이 가능해진다. 또한 AI 시스템은 의료 행위의 본질적인 불확실성을 인지하고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 단일 예측값보다는 가능한 결과의 스펙트럼이나 확률론적 분포를 제시하여 불확실성에 대응하도록 지원하는 방향이 정석이라 할 수 있다.
전문성의 보완, 인적 자원의 승화
의료 산업은 고도의 전문성을 구비한 인적 자원에 의해 운영된다. 의사, 간호사, 약사, 의료기사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지식과 기술이 의료 서비스의 핵심 요소이며, 이들 간의 유기적 협업이 환자 치료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들은 장기간의 교육과 엄격한 수련 과정을 통해 양성되며, 각자의 전문 영역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보유한다.
AI 도입 과정에서는 이러한 전문 인력의 참여가 필수불가결하다. AI는 이들의 전문성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승화시키는 도구이므로, 현장의 미세한 요구와 복잡한 업무 흐름을 정밀하게 반영해야 한다. AI 솔루션은 의료진의 업무 효율성을 제고하고 불필요한 행정적 부담을 경감하여, 환자 진료와 중요한 의학적 판단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또한 의료 전문직의 자율성과 전문적 판단을 존중하는 것이 AI 시스템 설계의 기본 철학이 되어야 한다. AI 기술과 활용 방법에 대한 맞춤형 교육도 중요한 요소이다. 의료진이 AI의 잠재력과 한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AI 도입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최소화하고 수용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AI 기반 인력 관리 시스템은 의료진의 전문성 개발을 지원하고, 업무량 예측 및 스케줄링 최적화를 통해 번아웃을 예방하며 직원 만족도를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환자 케어의 질적 향상으로 귀결될 것이다.
규제와 정책 환경에 대한 심층적 통찰
의료 산업은 정부의 엄격한 규제와 복잡한 정책 환경의 영향 하에 있다. 건강보험 시스템, 의료법, 약사법, 의료기기법 등 다양한 법규가 의료 서비스 제공 방식, 수가 결정, 병원 운영, 개인정보 보호 등 거의 모든 측면에 개입한다. 이러한 규제는 의료의 공공성과 형평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나, 병원 운영자에게는 복잡한 준수 의무로 작용한다.
AI 시스템을 도입할 때는 관련 법규와 규제를 철저히 준수하도록 설계하고 운영해야 한다. 특히 환자 데이터 활용과 관련된 프라이버시 및 보안 규정 준수가 지대한 중요성을 지닌다. AI 솔루션이 의료기기에 해당할 경우,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관련 규제 기관의 허가 및 인증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또한 AI 기반 재정 및 운영 관리 시스템은 건강보험 청구 및 심사 기준, 수가 체계 등 복잡한 정책 환경을 정교하게 반영하여 재정적 효율성을 증진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AI 도입 전반에 걸쳐 법률 전문가의 자문을 구하고, 정책 변화 동향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이해관계자의 균형 있는 포용
병원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복잡한 역학 관계 속에서 운영된다.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과 직원, 정부와 보험사, 제약회사와 의료기기 업체, 그리고 지역 사회에 이르기까지, 각기 상이한 요구와 기대를 가진 이해관계자들이 공존한다. 이들의 상충하거나 때로는 갈등하는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은 중대한 도전이다.
AI 도입 전략은 이러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요구와 기대를 총체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정 그룹의 목표만을 추구하는 AI 도입은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불만과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AI 도입 과정에서 핵심 이해관계자들을 참여시켜 의견을 수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AI 시스템을 통해 제공되는 정보는 환자 및 보호자의 요구와 편의성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사용자 친화적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AI 기반 운영 최적화는 의료진 및 직원의 업무 환경 개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AI 도입으로 인한 변화에 대해 정부, 보험사, 지역 사회 등 외부 이해관계자들에게 투명하게 소통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이다.
재정적 지속가능성과 운영 효율성의 고도화
의료 기관은 공공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하는 이중적 도전에 직면한다. 건강보험 수가는 원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며, 고가 장비 도입, 전문 인력 확보 비용 등 지출 요소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비효율적인 자원 활용, 과다한 재고, 미수금 발생 등은 재정 상태를 악화시키는 주요 요인이다.
AI 도입은 병원의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제고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AI 기반 재정 관리 시스템은 실시간 수익 및 비용 분석, 미수금 예측, 수가 최적화 등을 통해 재정 상태에 대한 가시성을 향상시키고 수익 증대 및 비용 절감 기회를 발굴할 수 있다. AI를 활용한 전략적 자원 배분은 제한된 예산을 수익성이 높거나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분야에 집중시켜 투자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운영 측면에서도 AI는 현저한 기여를 할 수 있다. 병원의 복잡한 운영 프로세스에서 발생하는 비효율성(장기간 대기, 낮은 자원 가동률, 과다 재고 등)은 환자 불만족과 비용 증가로 이어진다. AI는 이러한 운영 데이터를 통합하고 심층 분석하여 병목 현상과 비효율성 요인을 식별하고, 예측 분석 및 최적화 알고리즘을 통해 대기 시간 단축, 자원 가동률 극대화, 적정 재고 유지 등을 가능하게 한다.
데이터 기반 혁신의 승상(昇象)
전통적인 병원 경영은 경영진의 경험과 직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데이터가 존재하더라도 부서별로 분산되어 통합적인 분석이 곤란하고, 필요한 정보를 얻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AI 도입을 위해서는 먼저 데이터 사일로를 해소하고 데이터를 통합 및 표준화하는 작업이 선결과제이다.
AI의 예측 분석 역량은 환자 수요, 인력 이탈, 장비 고장, 감염 확산 등 미래 이벤트를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이에 기반한 선도적인 경영 전략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AI는 객관적인 데이터 기반의 통찰과 분석 결과를 제공함으로써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불확실성을 감소시키며, 전략적 선택의 성공 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다.
의료 산업에서 AI 도입은 단순한 기술 적용 이상의 심원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의료의 근본 가치를 더욱 승화시키고, 전문가들의 역량을 증진하며, 환자 중심의 의료 서비스를 구현하기 위한 혁신적 패러다임이다. 성공적인 AI 도입을 위해서는 의료 산업의 특수성에 대한 심층적 이해와 함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균형 있는 참여,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의 안전과 건강이라는 궁극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지향이 필수적이다.
AI는 의료 현장의 불확실성과 복잡성을 해소하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기술은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 중 하나"라고 언급했듯이, AI는 의료인의 판단을 보완하고, 환자 케어를 향상시키며, 의료 시스템의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할 때, AI는 의료의 미래를 밝히는 귀중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대한디지털헬스학회 명예회장 △대한노년근골격의학회 회장 △가톨릭의대 서울성모병원 정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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