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원 논설위원장]
한국 정치는 언제나 극적이다. 정권이 교체되면 정치 구도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경제 철학도 크게 달라진다. 지금은 진보 정권이 들어서 복지와 분배 중심의 정책을 강화하는 국면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 야당이 어떤 전략으로 국민 지지를 확보하고 경제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을까. 단순한 ‘반대’가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미래 비전을 보여주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특히 한국처럼 기업이 경제성장의 핵심 엔진인 나라에서 보수의 경제 전략은 기업과 국민을 어떻게 연결 짓느냐가 핵심이 된다.
보수 정당은 전통적으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내세워 왔다. 그러나 이를 직접적으로 강조할 경우 재벌 편향이나 대기업 중심 이미지가 강화될 위험이 크다. 진보 진영은 늘 ‘재벌 특혜’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가 내세워야 할 프레임은 이를 뛰어넘어야 한다. 기업의 성장이 곧 국민소득 향상과 양질의 일자리 창출로 이어진다는 점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는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추진한 아베노믹스를 사례로 들었다. 아베 전 총리는 기업 세제 감면을 단순한 기업 혜택이 아니라 ‘임금 인상을 조건부’로 연계했다. 그 덕분에 정책은 기업 지원이 아니라 국민소득 증대로 이어졌고, 보수 집권당이면서도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권 이사는 “한국 보수 야당도 이런 전략적 설계가 필요하다. ‘기업이 잘돼야 국민이 잘산다’는 단순한 등식에서 더 나아가 ‘기업의 성과를 국민에게 환원한다’는 메시지를 강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전통적 논리라면 진보 정권이 분배와 복지에 집중할 때 보수는 미래 성장과 기술 투자를 앞세워야 한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 다시 말해 반도체·AI·그린수소·바이오헬스 등 신산업을 중심으로 한국형 메가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이재명 정부가 야당보다 훨씬 미래지향적이고 망라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어 보수 야당의 입지는 매우 좁아졌다.
따라서 야당은 이런 정책의 핵심이 국가 주도가 아니라 민간 주도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뿐 아니라 스타트업과 중견기업이 중심이 되고, 정부는 규제 완화와 인프라 제공을 통해 뒷받침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보수의 경제 전략은 단순히 기업 편향이 아니라 ‘민간이 이끄는 국가 성장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는 곧 '기업=국가 성장 파트너'라는 명확한 구도로 연결된다.
보수가 규제 완화를 외치면 곧바로 기득권 대기업의 편익으로 귀결될 수 있다. 무분별한 규제 완화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 어렵다. 대안은 명확하다. 규제혁신의 수혜를 스타트업과 지방 중소기업에 우선 배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규제 샌드박스’ 모델을 확산시켜야 한다. 혁신 기업이 새로운 사업을 시도할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규제를 유예하거나 실험적으로 풀어주는 방식이다. 이 모델은 단순히 경제정책 차원을 넘어 지역균형발전과도 연결된다. 지방의 중소기업과 청년 창업자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보수의 규제혁신은 '국민을 위한 혁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보수의 경제전략은 국민과의 소통 방식에서도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정책 자료를 내는 것이 아니라 기업·정부·국민의 3자 동맹을 강조하며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온·오프라인 타운홀 미팅, 유튜브 경제 브리핑, SNS 경제 캠페인 등 국민과 직접 연결되는 플랫폼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현 정권이 야당보다 압도적인 강세를 보인다.
대만 국민당이 진행했던 ‘경제 현장 간담회’는 좋은 벤치마킹 사례다. 기업을 방문한 뒤 근로자, 지역 상인과 함께 공개 토론을 열어 경제 정책을 생활 현장에 맞춰 설명했다. 한국 보수 야당도 기업 방문과 지역 민생 현장을 결합한 ‘국민경제 소통 캠페인’을 통해 경제 리더십을 강화할 수 있다.
결국 보수 야당이 국민에게 각인시켜야 할 메시지는 단순하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곧 국민이 잘사는 나라'라는 공식이다. 단기 분배 정책은 당장의 만족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투자와 성장, 기회의 확대가 필요하다. 보수는 기술혁신과 투자 주도의 일자리 창출을 통해 '성장은 곧 복지'라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진보가 복지를 앞세운다면 보수는 성장을 내세워야 한다. 국민에게는 선택지가 필요하다. 복지냐 성장이냐, 단기냐 장기냐, 재분배냐 투자냐. 이 구도가 분명해질 때 보수의 존재감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렇듯 보수 야당이 국민에게 던질 수 있는 메시지는 예를 들어 '우리는 기업을 살려 국민을 살립니다. 성장은 곧 복지입니다' '기술혁신으로 내일의 일자리를 만들겠습니다' '지방에도, 청년에게도, 중소기업에도 기회가 돌아가는 경제를 만들겠습니다'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이 메시지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전략과 정책으로 뒷받침될 때 국민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진보정권 시대일수록 보수 야당의 경제 리더십은 단순한 견제가 아니라 대안과 혁신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것이 한국 보수가 국민의 선택을 다시 얻는 길이다.
최근 오피니언 리더들이 모이는 한 포럼에서 ‘AI 강국 건설, 보수 야당이 취해야 할 길’이란 주제로 논의가 있었다. 이재명 정권이 내세우고 있는 최중요 경제 전략은 단연 ‘AI 강국 건설’이다. 정부는 인공지능을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규정하며 대규모 재정 투입과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세계 선두를 추격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국민 여론 역시 총론에서는 대체로 동의한다. AI는 시대적 대세이고, 한국 경제가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반드시 매달려야 할 분야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문제는 각론이다.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재정과 제도의 지속 가능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보수 야당의 역할이 중요하다. 단순히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은 국민적 호응을 얻기 어렵다. 그렇다고 무조건 동조한다면 존재감이 사라진다. AI 강국이라는 국가적 비전에는 동의하되 실행 방식과 정책 수단에서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야 한다. 그것이 향후 수권정당으로서 입지를 다지는 길이다.
AI 강국은 특정 정권의 과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의 과제다. 지금 세계는 미국, 중국, 유럽이 치열한 AI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한국이 뒤처지면 경제와 안보 모두 위태로워진다. 따라서 보수 야당이 이 목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국민 눈높이에도 맞지 않고 장래의 전략적 선택지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 야당이 취해야 할 기본 태도는 ‘조건부 동의’다. 즉, AI 강국이라는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길은 맞지만 방법은 더 정교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이 포럼에서는 진보정권 방식의 문제점이 지적됐다. 현 정권의 AI 전략은 크게 세 가지 문제점을 노출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 재정 의존적 성격이다. 대규모 예산을 앞세운 국가 프로젝트는 단기간 효과는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재정 건전성을 훼손한다. 특히 고령화와 복지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AI 분야까지 막대한 지출을 감당하는 것은 미래 세대의 부담을 가중시킬 수 있다.
둘째, 생태계 불균형이다. 정부 주도의 지원은 대기업 위주로 집중될 위험이 크다. 이 경우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의 혁신 역량은 위축되고, 오히려 산업 다이내믹스가 줄어드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셋째, 제도적 불투명성이다. AI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신뢰성이 핵심이다. 그런데 정책 과정에서 특정 기업·집단과 유착되거나 불투명한 지원 구조가 발생하면 사회적 반발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단순한 정치적 반대를 넘어 국민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우려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수 야당은 이를 ‘건설적 비판’의 지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와 함께 보수 야당도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비판만으로는 정치적 존재감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은 ‘보수식 AI 국가 전략’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김시행 저스트 이코노믹스 논설실장은 다음과 같이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민간 주도-정부 촉진자 모델이다. 정부는 인프라 제공, 제도 정비, 규제 완화 등 큰 그림에 집중하고 실제 투자와 혁신은 민간이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는 길을 닦고, 기업은 달린다'는 원칙을 세워야 한다. 둘째, AI와 일자리의 조화를 강조해야 한다. 국민의 가장 큰 불안은 AI가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보수 야당은 'AI로 새로운 고급 일자리를 창출하고, 전 국민 재교육(Reskilling) 체계를 구축한다'는 메시지를 내세움으로써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셋째, 지역 균형 발전형 AI 전략을 내야 한다. 지금처럼 수도권 중심으로만 자원이 집중된다면 지방 소멸은 더 빨라진다. 지방 대학과 기업을 연계한 지역별 AI 허브를 육성함으로써 전국적 파급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넷째, 글로벌 연계 전략이다. 한국의 AI 전략이 미국이나 중국의 기술 종속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유럽·동남아 등 다양한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반도체에서 ‘K-칩 동맹’을 만들었듯이 AI에서도 ‘K-AI 글로벌 네트워크’를 추진하는 것이 보수식 비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무조건 찬성만 해서는 야당의 존재감이 없다. 무조건 반대만 해서는 국민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 따라서 보수 야당은 ‘찬성+감시+대안 제시’라는 삼중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즉 'AI 강국은 우리 모두의 목표다. 그러나 무분별한 재정 낭비와 불투명한 정책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더 효율적이고 지속 가능한 길을 제시하겠다'는 식의 메시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은 국민에게는 책임 있는 대안세력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정치권 내부에서는 향후 수권정당으로서 신뢰를 다지는 데 기여할 것이다.
AI는 시대정신이다. 한국이 AI 강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면 제조업·서비스업 전반에서 국제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비전 자체는 초당적으로 공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길을 어떻게 갈 것인가는 각 정치세력의 철학과 역량이 시험대에 오르는 무대다.
보수 야당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AI 강국이라는 국가적 대의에는 함께하되 집권 여당의 정책 추진 방식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증하고 더 나은 대안을 내놓는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보수 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낡은 이미지를 벗고, 국민이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책임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곽재원 필자 주요 이력
▷전 중앙일보 경제부국장, 도쿄특파원 ▷전 서울대 공과대학 초빙교수 ▷전 한양대 기술경영학 석좌교수 ▷전 경기도 경기과학기술진흥원 원장 ▷현 가천대·호서대 초빙교수 ▷현 아주경제 논설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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