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확산과 충전기 생태계 확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것이어서 함께 보조를 맞추며 성장하도록 장려해야 합니다."
유병우 SK시그넷 연구개발본부장(CTO)은 1일 아주경제와 인터뷰하면서 "충전 사업을 글로벌 시장 잠재력이 큰 분야로 인식하고, 사용자를 중심으로 제조사와 사업자 등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은 속도 조절은 있을지언정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도로 위 전기차(EV)는 약 4500만대였으며, 2030년에는 2억4000만대에 달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충전 인프라는 2030년까지 10배 이상 확대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정부 차원에서 2030년까지 충전기 약 120만기 보급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현재 24만기 대비 5배에 해당한다.
업계 전문가들은 충전기 시장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우수한 제조사 육성에 주력하는 한편 해당 기업들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한다.
다음은 유 본부장과 일문일답한 내용.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에도 불구하고 충전기 시장은 오히려 기회를 맞았다는데.
"미국에선 올해 초부터 자국 에너지 산업(석유·가스)을 보호하기 위한 연방정부와 이에 반발한 14개 주정부 간 법정 다툼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주정부가 승소해 연방고속도로청(FHWA)은 '국가 전기차 인프라(NEVI) 포뮬러 프로그램'의 중간 최종 지침을 발표하며 약 50억 달러(약 7조원) 규모의 연방 지원을 재개했다. 미국 비중이 80%인 당사는 호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진출이 순탄치는 않았을 텐데.
"그렇다.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조건을 충족해야 관세 등 추가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게 되므로 선제적으로 텍사스 현지에 공장을 짓고 초기 투자를 단행했다. 총 부품 원가의 55% 이상이 미국산 부품이어야 하고 최종 조립도 미국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만약 미국의 공급망 재편을 미리 예상하지 못하고 텍사스 공장을 짓지 않았다면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 'NEVI' 프로그램 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다. 기술적 차별화 포인트는.
"SK시그넷은 기술적 차별화와 신뢰 확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우선 400㎾급 초급속 충전기 개발을 위해 '고효율 콤팩트 전력변환 모듈'과 '다중 출력형 충전기술'을 개발해 기존 제품 대비 뛰어난 안정성과 효율성을 확보했다. 또 다년간 충전 환경을 모사한 자체 시험 평가 장치를 구축해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품의 신뢰성을 크게 향상시켰고, 국내 최초로 실차 부하를 적용한 에너지관리솔루션(EMS) 시험 평가를 통해 객관적으로 제품 신뢰성을 검증했다. 아울러 고용량 전류를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국산 커넥터와 케이블을 개발해 가격 경쟁력을 갖췄고, 열 관리에 뛰어난 고효율 냉각 시스템 기술도 확보해 급속 충전 발열 제어에 성공했다."
-미국 시장에 집중하는 이유는.
"미국은 지난해 기준 7조2000억원 규모의 세계 3대 충전기 시장이며, SK시그넷의 매출 80%가 발생하는 핵심 권역이다. 미국 내 초고속 충전기 시장 과반을 점유해 1위를 달리고 있으며, 미국 텍사스에 생산 공장을 마련하는 등 '바이 아메리카' 요건을 만족시키는 유일한 400㎾ 초고속 충전기 생산사로 성장했다. 참고로 SK시그넷의 400㎾ 초고속 충전기는 전기차 배터리 잔량이 20%에서 80%에 도달하기까지 단 8분만 소요된다. 땅이 넓어 수시로 급속 충전이 필요한 미국은 회사의 기술 추구 방향과 잘 맞는 곳이다."
-미국을 넘어 다른 권역으로 진출할 계획은 없나.
"미국과 함께 전통적 전기차 강국인 유럽은 물론 멕시코 등 주요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는 유럽의 알피트로닉(Alpitronic), ABB, 켐파워(Kempower), 미국의 BTC 파워와 테슬라, 대만의 델타(Delta)와 제로바(Zerova), 중국 오텔(Autel) 등 다양한 강점을 가진 선두 기업들이 있다. 경쟁에서 승산이 있으려면 SK시그넷만의 고출력 제품에서 요구되는 내구성과 안전성, 품질에 대한 신뢰성을 주 무기로 갖춰야 한다. 중국은 전기차 시장 규모가 매우 크고 성장 잠재력이 높지만 현지 규제, 가격 경쟁력 등 여러 측면에서 진입 장벽이 높다. 또 중국 내수 시장에서 현지 기업들과 경쟁이 매우 치열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국내 시장에서 개선돼야 할 점이 있다면.
"가장 큰 문제는 현재 급속 충전 요금이 획일적으로 정해져 있어 저희 고객사인 충전사업자(Charging Point Operator·CPO) 들이 만성적으로 적자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추가 충전기 인프라 구축 계획을 축소하거나 취소할 수밖에 없다. CPO 사업자가 충전소 특성에 따라 가격을 가변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시장가격 체제를 마련된다면 인프라 확대 투자로 이어지고, 이는 충전기 제조사에도 낙수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된다."
-보조금 문제는 없나.
"현재 정부 보조금이 대부분 CPO 지원책으로 쓰이고 있다. 충전기 제조사에도 일부 보조금이 지급된다면 충전기 고장률 개선과 서비스 품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소비자들이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는 대표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충전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개선하려면 근본적으로 고성능 충전기 개발이 촉진돼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돼야 한다. 보조금이 보다 광범위하게 쓰인다면 인프라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초급속 충전기 보급을 위한 기술적 정책 지원에 대해 제언한다면.
"기술 리스크가 높은 초기 단계 과제에서 정부의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와 지원이 민간 기업에는 큰 힘이 된다. 다만 보완할 점도 있다. 첫째, 과제 종료 후 후속 지원이 부족해 우수 기술이 상용화 단계에서 자금·인증·실증 등 장벽에 부딪히는 사례가 있다. 양산화와 글로벌 진출까지 연결되는 체계적 지원이 마련된다면 기술 실효성과 사업화 성공률이 높아질 것이다. 둘째, 산업 현장 중심의 평가 체계가 강화된다면 기술 상용성과 시장 적합성을 보다 실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 수요자 중심 기술개발을 촉진할 수 있다. 이러한 보완이 이루어진다면 국내 제조사는 기술 경쟁력과 사업화 성공 사례를 동시에 창출하며 산업 혁신을 선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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