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성어로 세상 읽기](50)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기회로 삼아 공을 이루다

  • 전화위복 인패위공(轉禍為福, 因敗為功)

유재혁 칼럼니스트
[유재혁 칼럼니스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열풍이 지구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가히 신드롬 수준이다. 케데헌은 가상의 케이팝 걸그룹 ‘헌트릭스’가 퇴마사가 되어 노래와 팬덤의 힘으로 보이그룹이자 악령인 '사자 보이즈'를 물리치고 세상을 지킨다는 액션 판타지 장르의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다. 이 만화 같은 이야기에 전세계가 열광할 줄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6월 20일 처음 공개된 이후 단숨에 넷플릭스 영화 1위에 오른 케데헌은 8월 27일 누적 시청 횟수에서도 역대 1위로 등극했다. 대표 주제곡 ‘골든(Golden)’은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 이어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핫100’에서도 1위에 올랐다. 케이팝 최초로 세계 양대 차트를 동시에 석권한 것이다. 차트 진입 7주 만의 쾌거다. 스트리밍 서비스 위주로 운영하는 넷플릭스지만 쇄도하는 요청을 외면할 수 없어 공개 이후 두 달 만에 대형 체인을 제외한 일부 극장에만 제한적으로 상영했음에도 개봉 이틀 만에 북미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넷플릭스 역사상 이 또한 초유의 일이다.

제목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듯 케데헌은 케이팝이 스토리를 이끌어간다. 민화 작호도(鵲虎圖) 속 까치와 호랑이가 서씨(Sussie)와 더피(Derpy) 캐릭터로 구현되는가 하면 '냅킨 깔고 수저 놓기'라든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기' 등 케데헌의 세계관에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의 디테일이 촘촘히, 그리고 사실적으로 박혀 있다. 무당 컨셉트의 걸그룹이 악령을 퇴치한다는 설정도 지극히 한국적이다. 감독을 비롯하여 제작진 다수가 한국계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랑하면 알고 싶어지는 법 아니던가. '케데헌'앓이에 빠진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문화가 궁금해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서울 명소마다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마치 성지를 순례하듯 낙산공원 성곽길, 북촌한옥마을, 남산 서울타워, 명동 등을 찾는다. 영화의 주인공 루미와 진우가 걷고 춤추거나 거리 공연이 펼쳐지는 곳들이다. 침체한 주변 상권도 덩달아 북적대는 등 케더헌이 불황을 이겨내는 단비 역할을 하고 있다. 까치호랑이 뱃지와 갓 모양 컵 등 케데헌 굿즈를 사려는 관람객들로 국립중앙박물관도 연일 문전성시다. 한의원, 찜질방, 댄스학원, 심지어 김밥과 컵라면 시식까지 영화 속 일상을 체험하려는 관광객들로 인해 관광 코스에도 변화가 생겼다. 급기야 '팬코노미(팬덤+이코노미)'란 신조어도 등장했다. 케더헌 효과에 고무된 오세훈 서울시장은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언론을 통해 익히 알려진 케데헌의 성과를 새삼 소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서론이 길어졌다. 케데헌이 세계적으로 흥행하면서 주요 제작진에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이들의 입을 통해 케데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감동적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 중에서도 주제곡 '골든'을 작곡하고 부른 이재(EJAE)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특별한 인상을 남겼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걸그룹 가수로서의 데뷔가 무산된 후 힘든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냐는 질문에 이재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믿음으로 좌절을 이겨냈다. 지금 돌아보면 내 인생은 그 믿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어진 모든 기회에 최선을 다했고, 후회 없이 마음을 다해 임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다." 

이재의 본명은 김은재로, SM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출신이다. 2003년부터 10년 넘게 가수의 꿈을 키웠지만 몇 차례 데뷔가 무산되며 결국 꿈을 접어야 했다. 그러나 이재는 포기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작곡을 공부하며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다. 자신만의 음악을 갈고 닦으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카데미상 수상이 기대된다는 말이 나올 만큼 인기몰이 중인 '골든'은 그 인고의 세월이 빚어낸 빛나는 결실이다.

'골든'의 가사와 멜로디 라인은 영화의 주제와 스토리를 대변한다. 남과 다른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온 주인공 루미가 과거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빛나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폭발적인 고음에 실어 전하는 '골든'의 노랫말에서 이재가 걸어온 삶이 오버랩된다. 시련에도 이유가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된 이재의 고난 극복 서사는 케데헌의 주인공 루미의 성장 서사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꿈이 스러지는 좌절을 딛고 일어선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진심을 담아 노래를 만들고 불렀기에 케이팝에 문외한이던 사람들조차 '골든'이 전하는 메시지에 공감하고 케데헌의 매력에 푹 빠지는 것이리라.

​중국 고전 《사기(史記)》의 '소진열전'은 전국시대의 뛰어난 전략가이자 유세가였던 소진(蘇秦)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소진의 시작은 초라했다. 처음 학문을 배우고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며 유세했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곤궁한 처지로 고향에 돌아오자 가족들마저 그를 무시하고 조롱했다.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소진은 칩거에 들어가 독하게 학문을 갈고 닦았다. '머리카락을 대들보에 묶고 송곳으로 허벅지를 찔러 잠을 쫓으며 공부한다'는 성어 '현두자고(懸頭刺股)'의 '자고'는 이 시절 소진의 고사에서 비롯됐다. 각고의 노력 끝에 소진은 마침내 뜻을 편다. 당대의 초강대국 진(秦)나라에 맞서기 위해 다른 여섯 나라(한, 위, 제, 초, 연, 조)가 힘을 합치는 '합종책'(合從策)'을 성사시키고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소진의 합종책으로 인해 15년 동안 진나라는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전국시대 전략가들의 책략을 모은 《전국책(戰國策)》에 "일을 잘 처리하는 자는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기회로 삼아 공을 이룬다(善制事者, 轉禍為福, 因敗為功)"는 구절이 있다. 이는 훗날 합종의 맹약을 깨고 연나라를 공격한 제나라 왕을 설득하기 위해 소진이 한 말이다. 소진의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명언이자 그의 인생을 관통하는 핵심 교훈이기도 하다. 소진이 유세에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가족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소진은 이 치욕을 좌절의 이유가 아닌 성공의 동력으로 삼았다.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였고 깊은 학문적 성취를 통해 세상에 나설 힘을 얻게 되었다. 마침내 시대를 움직이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화를 복으로 바꾸고, 실패를 밑거름 삼아 성공을 거둔 것이다.

성어 '전화위복 인패위공(轉禍為福 因敗為功)'은 과거의 절망, 소외, 무명의 시간들이 훗날 더 큰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결과론적 통찰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믿음으로 좌절을 딛고 일어서서 시련을 성장의 기회로 삼은 이재의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골든'에는 한글 가사가 여러 군데 삽입되어 있다. 글로벌 매력자산이 된 우리문화에 대한 자신감으로 비쳐진다. 한글을 배우려는 열풍이 한층 더 뜨거워질 것 같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 김구가 80년 전 '나의 소원'이란 글에서 한 말이다. 김구의 말은 이렇게 이어진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가 케데헌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있다. 그걸 지켜보는 우리도 행복함은 물론이다. 

유재혁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제일기획 근무(1985~2008) △'한국산문' 등단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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