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원재 논설고문]

중국심서(中國心書) 2025 ④
한국 석유화학 산업의 메카로 불렸던 전남 여수 산업단지에 불황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대략 3년 전부터다. 중국의 산업굴기(産業崛起)가 본격화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한국 석유화학 제품의 최대 수입국이던 중국이 대규모 에틸렌 생산시설을 구축하며 자급률 100%를 달성했다. 중국 수출시장이 막히고 세계적인 공급과잉 사태가 벌어지자 여수 산업단지의 공장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이 지난해 일부 생산라인을 중단한 데 이어 올 8월엔 여천NCC의 유동성 위기로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다.
중국의 산업굴기로 한국의 대표 기업들이 생존을 걱정하는 현상은 석유화학 외에 철강 디스플레이 조선 자동차부품 등 거의 모든 기간산업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 반도체 스마트폰 등 기술력에서 한발 앞선다고 자부하는 분야도 중국의 빠른 추격에 안심할 수 없는 상태다. 중국의 산업굴기와 한국 제조업의 위기가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초반만 해도 중국은 중저가 범용 제품을 대량으로 공급하는 ‘세계의 굴뚝’이자 선진국 제품을 베끼는 재주로 악명 높은 ‘짝퉁의 나라’였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는 떨어지는 품질을 저렴한 가격으로 상쇄하는 가성비 제품과 동의어였다.
중국 정부가 2015년 야심차게 수립한 ‘중국 제조(Made in China) 2025’ 계획은 10년 만에 중국 산업의 환골탈태(換骨奪胎)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뤄냈다. 톱다운 방식의 국가주도 정책을 통해 노동집약적 제조업에 머물렀던 중국 산업의 위상을 글로벌 시장을 주도하는 첨단 기술의 선도자로 바꿔놓았다.
‘중국 제조 2025’가 설정한 10대 전략분야 중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5G통신, 고속철도, 전력설비, 신소재에서 세계 1위 기업이 탄생했다. 우주항공 분야에서는 무인 우주정거장 독자운영과 달 뒷면 세계 최초 착륙이라는 성과를 냈다.
전기차 업체 BYD는 지난해 테슬라보다 두배 이상 많은 차량을 팔았고 매출도 처음으로 앞섰다. 중국 전기차는 세계 시장의 59%를 장악했다. 태양광 패널은 세계 시장에서 70%가 넘는 점유율을 차지했고 산업용 로봇은 중국이 전 세계 설치량의 50%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드론 제조업체 DJI는 세계 드론 생산량의 94%를 만들고 있다.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는 미국의 집요한 표적제재에도 5G 기술 구현을 위한 표준필수 특허(SEP)를 1만건 가까이 확보해 전통적 강자 퀄컴을 누르고 선두 기업이 됐다. 이제 한국을 포함해 세계의 5G 관련 업체들은 화웨이에 로열티를 내야 기기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중국 산업굴기의 최대 피해자는 중국 수출비중이 가장 크고 수입 의존도가 가장 높으며 주력 업종이 겹치는 인접국 한국이다. 한국 기업들이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 밀려나고 기술도 따라잡히면서 세계 무대에서 잃은 점유율을 동종업계의 후발 중국 업체들이 고스란히 챙겨가는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
한때 한국의 미래먹거리로 주목받았던 디스플레이 산업의 경우 BOE를 필두로 한 중국 업체들이 저가 LCD 시장을 먼저 장악한 뒤 한국이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OLED 시장까지 잠식하고 있다.
배터리 산업에서는 중국의 CATL이 세계 1위에 오르며 한국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를 압박하고 있다. 세계 1위 전기차 업체를 보유한 중국 내부의 시너지 효과가 위력을 발휘하면 한국 배터리 업체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철강은 중국이 이미 전 세계 생산량의 55% 이상(10억톤)을 차지하며 압도적 공급자 지위에 올라있다. 포스코가 보유한 세계 최고 기술력의 원천인 파이넥스 공법을 후발 중국 업체들이 유사 기술로 따라잡았다. 이로 인해 포스코와 현대제철의 영업이익이 50% 이상 감소하는 등 철강업계 전체가 수익성 악화로 고전하는 실정이다.
한국이 세계 선두권으로 자부하는 반도체와 조선 분야에서도 중국의 추격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CXMT의 D램 점유율이 빠르게 상승하는 가운데 3D 낸드플래시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위협하는 수준이 됐다. 조선업은 컨테이너선을 중심으로 한국을 추월했고, 한국의 독보적 영역으로 여겨졌던 LNG 운반선에도 중국이 속속 진출하고 있다.
자동차부품은 2015년 한국의 4번째 대중(對中) 수출품목이었지만 작년에는 한국의 10번째 수입품목이 되는 기막힌 역전현상이 발생했다. 한국이 몇몇 고부가가치 제품에서 지키고 있는 기술력의 우위가 언제 뒤집힐지 낙관하지 못하는 처지다.
중국의 약진으로 세계의 산업지형과 분업구조는 과거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변화를 겪고 있다. 선진국이 부가가치가 높은 연구개발(R&D)과 제품 설계를 담당하고 개발도상국이 값싼 노동력으로 중저가 제조업을 책임지는 수직적 분업구조는 ‘모든 업종의 제품을 첨단 공법으로 가장 많이, 가장 좋은 품질로 만드는’ 중국의 등장으로 엄청난 균열이 발생했다.
중국은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정보기술(IT) 드론 선박 소재부품 에너지 전력과 희토류를 비롯한 천연자원 등 산업활동에 필수적인 공급망을 모두 갖춘 사실상 유일한 나라다. 세계 최고 수준의 IT 기술력을 보유한 화웨이 샤오미와 기존 자동차 업체, 배터리 기업들이 결합해 전기차 생태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소재 산업의 경쟁력과 자체 완결적인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의 허브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혁신’에서 앞섰다면 중국은 ‘상용화’에 강점을 보인다. 중국 제조업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생산현장에 접목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제재로 엔비디아의 고사양 반도체를 쓸 수 없게 되자 저사양 제품을 사용해 개발에 1년이 걸린 챗GPT보다 훨씬 짧은 2개월 만에 비슷한 성능의 생성형 AI 모델 딥시크를 만들어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삼각무역 구조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중간재를 중국에 수출하면 중국이 이를 가공해 미국과 유럽에 완제품을 수출하는 패턴이 형성됐지만 중국의 기술력이 한국과 일본을 넘으면서 이런 역할 분담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최근 들어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두 나라의 경제협력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은 중국발(發) 산업 쓰나미에 대한 위기의식이 그만큼 심각하기 때문이다. 대한상의 회장을 맡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은 유럽연합(EU)처럼 한·일 양국간 경제공동체 방식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일본에서도 경제안보 차원에서 한국과 손잡고 함께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국은 ‘중국 제조 2025’에서 세운 1단계 목표인 핵심 소재부품 70% 자급자족을 초과 달성했다는 자체 평가 속에 AI 양자기술 바이오 등의 분야에서 기술굴기로 단계를 높여가고 있다. 중국의 산업굴기와 기술굴기의 종착점이 세계 패권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상호제재와 보복, 충돌과 소강을 오가면서도 합의점을 도출해 내기 힘들 것이다.
미·중 통상 갈등으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이 된 한국으로선 줄서기 강요의 강도가 세지고 선택지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자력 생존의 길을 찾기 위한 험난한 여정을 해야 한다. 첨단 기술과 핵심 기업, 이들의 총합인 산업경쟁력은 한국이 미국의 관세폭탄, 중국의 산업 쓰나미 공세에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최후의 보루다.
중국의 산업굴기는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이 합리적 목표 설정을 토대로 선택과 집중의 효과를 극대화할 경우 자국의 산업경쟁력을 얼마나 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하지만 중국의 국가주도 모델이 전혀 다른 정치체제와 사회 문화적 배경, 산업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한국에도 유효한 방식이 된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 산업의 혁신은 정부와 민간이 ‘팀 코리아’의 구조와 역할을 새롭게 정립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부는 기업 환경개선과 산업 인프라 구축을 책임지고 기업은 자율과 창의를 무기로 4차 산업혁명의 글로벌 경쟁에서 독자적인 경제영토를 확보해야 한다.
정부가 민간의 서포터 역할만 충실히 해도 한국 산업의 활로는 찾을 수 있다. 전봇대 규제, 대못 규제, 손톱 밑 규제, 거미줄 규제로도 모자라 주 52시간 근무제의 예외없는 적용과 노란봉투법 같은 기업 규제를 잔뜩 안기고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중국 기업과의 경쟁에서 이기라는 것은 과도하고 가혹한 요구다.
기업이 국부(國富)의 원천이자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중국의 산업굴기가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원재 필자 주요 이력
▷핀란드 알토대 경영학석사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논설위원, 경제부장 ▷동아닷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 ▷경성대 교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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