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월 10일은 북한 조선로동당 창건 8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류 최초로 공산주의정권을 수립한 소련이 1991년 해체되고, 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함으로써 조선로동당이 공산당으로서는 최장기 집권하고 있다. 중국, 베트남, 쿠바 등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나라들은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자본주의 세계경제에 편입하였다. ‘생산력 발전’을 내세우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용한 중국은 G2 국가로 미국과 패권경쟁을 할 정도로 국력이 커졌다.
북한은 자본주의 편입을 거부하고 ‘자력갱생’을 고집하고 있다. 경제적 의존이 정치적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하는 북한은 ‘자력자강’을 내세우고 폐쇄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자주권과 생존권, 발전권’을 누리기 위해 미국, 한국, 일본 등을 ‘제국주의 연합세력’,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자본주의 세계와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유일하게 3대 세습으로 체제를 유지하고, 4대 세습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은 핵개발의 공정과 과정을 외부 세계에 공개하고 2017년 11월 29일 ‘국가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으며, 지금도 핵무력 고도화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정권이 붕괴하면 핵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하면서 핵문제 해결에 집중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de facto nuclear power)’으로 방치하고 말았다.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 ‘북한붕괴론’이 주기적으로 나왔지만 북한은 붕괴하지 않았다. 2022년 11월 18일 화성-17형 발사현장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딸 김주애와 함께 나타나 4대 세습을 가시화하기에 이르렀다.
북한이 ‘사상과 영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고, ‘군사강국’, ‘전략국가’의 반열에 올랐는지는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먹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빈곤상태에 머물고 있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이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지도체제(유일체제)’를 근근이 유지해왔지만 경제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근원은 세습으로 이어지는 ‘수령체제’의 ‘태생적 한계’에서 찾을 수 있다. 체제개혁을 추진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지도자의 교체기 때 전임 지도자와 당 역사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에 기초해서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등 노선 수정을 추진했다.
중국의 경우, 마오쩌둥(毛澤東) 사후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지도부가 등장하여 사상해방(思想解放),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걸고 개혁·개방을 본격화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거쳐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갔다. 덩샤오핑 지도부는 마오쩌둥의 공적을 공7, 과3으로 평가하고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따라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중국의 개혁지도부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많이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貓白貓論)’을 펴며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중국의 개혁지도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상호배타적인 생산양식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상해방’에 따라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다. 선전 등 해안지역을 개방하여 먼저 발전시킨 다음 그 성과를 내륙으로 확산시킨다는 구상이 이른바 ‘선부론(先富論)’이다. 개혁·개방을 가장 먼저 시작한 중국은 지금도 중국공산당이 집권당으로 통치하고 있다. 당이 개혁·개방에 필요한 사상이론적 조정을 하고, 정책을 주도해왔기에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영향력을 키워나가고 있다.
소련의 경우, 1985년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신사고’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재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본격화했다. 고르바초프 초기 개혁의 핵심은 ‘스탈린적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건설 목표를 조급하게 달성하려는 권위적 열망에서 인간을 목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수단화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주의 독소를 제거하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사회를 창조하려고 했다. 하지만 공산당의 특권계급(노멘클라투라, 아파라치키)이 개혁에 저항하자 고르바초프는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포기하고 다당제를 허용했다. 고르바초프가 70여 년간 지속해온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종식하면서 소련은 붕괴·해체의 길로 들어섰다. 중국은 공산당이 개혁의 주체세력이었지만, 소련은 공산당이 해체됨으로써 개혁의 주체세력이 사라지고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북한은 소련과 동구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당을 강화하지 못하고 영도의 계승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해서 붕괴한 것으로 본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붕괴하게 된 것은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이끌 수 있는 정보혁명, 3차 산업혁명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데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유지하는 현존 사회주의 국가들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노동분업 구조에 편입하여 활발히 생산과 소비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유일한 예외가 북한이다.
김정은 총비서는 당창건 80주년 경축대회 연설(10월 9일)에서 “당이 장장 80성상에 단 한 번의 노선 상 착오나 오류도 없었던 것은 바로 인민의 의사와 요구를 집대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당창건 80주년을 맞은 북한은 ‘사상과 영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인민대중제일주의’를 구현한 조선로동당의 영도에 오류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류가 없으니 노선의 변화도 없다고 단언했다. 북한에게 있어 소련의 경험은 ‘부정적 교훈’이겠지만, 중국의 경험은 ‘긍정적 교훈’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북한은 중국의 경험을 따라가지 않고 ‘북한식(우리식)’을 고집하고 있다.
북한이 개혁을 추진하기 어려운 이유는 세습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백두혈통’의 후계 수령이 선대 수령을 비판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4대 세습을 준비하고 있으니 정책전환은 더욱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세습체제를 유지하면서 정책을 전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북·미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이에 근거하여 사상이론적 조정을 하는 것이다.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북한이 정책전환의 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필자 주요 이력
▷전 통일연구원장 ▷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전 청와대 안보실 정책자문위원장 ▷현 국회 한반도 평화외교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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