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 26대 서울대 총장]
국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마지막으로 호소할 수 있는 곳이 법원이다. 법원은 권위주의 시대에 권력에 편승한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민주화 이후 비교적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권한을 행사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현직 검찰총장이 정부와의 갈등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집권한 후 검찰국가 현상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법원 또한 패배한 대통령후보자에 대한 재판과정에서 정치화되었다는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마침내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 새 대통령 집권 이후 내란·김건희·해병 3개 특검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검찰뿐만 아니라 법원도 개혁의 대상으로 부딪친다. 국회 청문회나 국정감사 과정에서 관례적으로 대법원장은 출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상 처음으로 조희대 대법원장이 국감 증인 출석을 강요당한다.
사법부는 국민으로부터 직접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대통령이나 국회와 달리 간접 정당성을 가질 뿐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의회주권에 입각하여왔다. 하지만 의회주권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위헌법률심사제도의 본격 도입과 더불어 종언을 고하였다. 이제 의회의 사법부 우위 논리는 정당성의 기반을 상실한다.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헌법 제104조). 일단 사법부 최고 수뇌부가 구성되면 법원이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지위와 권한을 가진다. 이에 헌법의 근거도 없이 재판부 구성에 국회의 개입은 위헌 논의를 촉발할 수밖에 없다. 78년 헌정사상 평상시에 특별재판부를 구성한 적이 없다. 세 차례에 걸친 특수한 상황에서도 그 근거를 헌법에 명시하였다.
1948년 제헌헌법도 마찬가지다: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제10장 제101조). 이 규정에 근거하여 반민족행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었다. 1960년 제4차 개정헌법은 부칙을 마련하여 제2공화국 성립 이전에 자행된 부정선거와 부정축재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하여(제16조),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설치하도록 한다(제17조).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헌법을 대체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이 시행된 상황에서 특별재판소를 설치하였다. 이에 대한 헌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아 오죽했으면 1962년 헌법에 국가재건비상조치법 등에 따른 재판의 효력이 지속된다는 소급적 근거를 마련하였다(부칙 제5조). 상처투성이인 한국헌정사에서도 사법 독립에 위배되는 특별재판소 설치에 관한 한 위헌논쟁을 차단하기 위하여 헌법에 소급입법의 근거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모든 국민은 헌법과 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하여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27조). 우리 헌법상 법관이 아닌 사람에 의한 재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법원이 군사법원이다. 그 군사법원도 최근 전면 개정을 통하여 법관의 자격을 가진 사람이 재판을 진행한다. 사법권의 독립은 의회와 정부로부터의 독립과 더불어 법원의 인적 독립과 물적 독립이 그 핵심이다. 법관의 인사는 사법부 독립의 핵심요소로서 법원의 고유한 권한이다. 그런데 내란전담재판부의 구성은 법원이 아니라 국회에서 좌우하게 되므로 사법권 독립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
정권 교체와 더불어 정부여당의 비판에 대한 법원의 안일한 대응도 도마에 오른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제103조). 그런데 일부 판결에서 법관이 법관으로서의 양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편협한 생각을 드러내 심각한 우려가 제기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취소 결정 때 시간계산법은 판례와 관행에 어긋난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1·2·3심의 양극단적인 판결도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현직 대통령에 대한 재판 연기 등 정치화된 사법 현안은 일단 법원의 재판연기로 숨을 돌린다. 차제에 이와 관련된 모든 정쟁을 중지하고 대통령 임기 중 재판 자체를 중단하는 규정을 추후 개헌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성낙인, 헌법학 제25판, 571면). 우리 헌법규정과 유사하던 프랑스헌법에서도 개헌으로 재임 중 재판 중단을 헌법에 명시한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파리 시장 시절 자금유용 문제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재임 중 재판이 중단되었다가 퇴임 후 재개된 재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은 리비아 카다피로부터 불법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최근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아 구속되었다.
법규범의 보수적 성격 때문에 사법부도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국민의 자유와 권리 보장에 있어서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진보적인 판결도 필요하다. 법원은 기존의 관행에 얽매여 있지는 않은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인간이 누리는 기본권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기본권이 신체의 자유이다. 영어의 몸이 된 상태에서 다른 자유는 사치에 불과하다. 구속영장 발부 여부는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그런데 법원의 영장 발부 또는 기각 사유를 보면 국민들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도주 또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 또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라는 짧은 문구로 구속 여부가 결정된다. 국민들에게 널리 설명의무가 필요한 장면이다. 구속 여부는 본안 재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러므로 구속영장실질심사 과정에서 1인 단독판사가 결정할 것이 아니라 3인 합의부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이진숙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체포영장발부도 남발된다. 경찰의 수사를 거쳐서 검찰의 신청에 의하여 법원이 영장을 발부한다(헌법 제12조). 이 사건에서 검찰이 신청한 체포영장이 두 차례 기각되었다가 세 번째 영장이 발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법관이 체포영장을 발부하였는데 다른 법관이 체포적부심에서 석방하였다. 일반 국민의 시선에서는 비록 재판부가 다르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법원에서 영장을 기각하였다가 발부하고 또 석방결정을 하는 게 이상할 수밖에 없다. “의심스러운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에 따라 법관들의 균형있는 판단과 가급적 더불어 불구속 수사 원칙을 따라야 한다. 우리 법원은 매년 3만건 이상 접수되는 체포영장의 97~98%를 발부한다. 체포·구속되는 미결 수용자가 인구 10만명 당 38명이다. 이는 아시아 평균 30명, 유럽평균 27명보다 많다. 특히 일본 5명, 대만 11명, 독일 16명보다 압도적으로 높다(2020년 월드 프리즌 브리프(WPB) 보고서; 조선일보 2025.10.4.).
압수수색영장도 너무 쉽게 발부된다. 고도정보사회에서 국민의 일상은 휴대폰과 함께한다. 휴대폰만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행동반경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법원은 휴대폰 압수수색을 통한 통신자료조회를 너무 쉽게 인용한다. 이에 국민들은 수시로 휴대전화를 교체함으로써 혹시 모를 압수수색에 대비한다. 전화기 교체를 범죄은닉 목적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통신자료조회 영장에서도 조회가능한 범위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헌법이 보장하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제17조)는 유명무실해진다. 임시적인 법적 조치인 가압류·가처분도 마찬가지다. 미리 조치를 하지 않으면 향후 본안 판결의 효과를 거두기 어려운 때에만 발동하여야 한다. 그런데 ‘임시적인 조치’에 의탁하여 가압류·가처분 요구를 너무 쉽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재산권 등 권리 행사에 치명적인 제한을 받게 된다.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가압류·가처분 결정에도 좀 더 진중해야 한다.
한국 라면의 효시인 삼양라면은 1989년 검찰의 공업용우지 혐의의 기소로 1심에서 유죄판결을 내렸으나 2심 무죄판결을 받고 9년 만인 1998년에 최종적으로 대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렸다. 그사이 삼양라면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다가 36년 만에 불닭면으로 극적으로 부활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와 법원의 지연된 재판으로 한 기업이 존망의 어려움을 겪은 것이다. 법원의 재판은 공정도 중요하지만 신속해야 한다.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헌법 제27조 제3항). 그런데 법원의 재판이 너무 지체되어 국민의 권리구제가 미흡하다는 비난에 직면한 지 오래다. 그 해결책도 백가쟁명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상고법원을 도입하려다 참담한 실패를 겪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대법원장·대법관 및 고위법관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었다. 이재명 정부는 검수완박에 이어 대법관을 현재 14명에서 26명으로 대폭 증원하려 한다. 이제 법원도 정치권에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 현재의 4인 재판부 3개 부로는 사건 적체 해소가 불가능하다. 하급심과 마찬가지로 3인 재판부로 하면서 대법관도 순차적으로 늘려나갈 수밖에 없다. 실체적 진실에 부합하는 정의로운 재판도 좋지만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하급심 강화로 상고를 제한하려는 방안도 한계가 있다. 국민들은 오래도록 삼세판 즉 3심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하여 판결은 공개되어야 한다. “법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헌법 제109조). 그런데 하급심 판결은 아직도 제대로 공개되지 아니한다. 정보공개법의 취지에도 어긋난다. 판결도 공개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하급심 강화는 공염불이다.
이제 법원은 정부여당의 압박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사법개혁의 중심축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37%에 이르는 지나친 상고를 제한하기 위해서는 현행 상고심리불속행제도로는 한계가 있다. 차라리 위헌논의를 불식시키면서 실질적인 상고허가제 도입도 필요하다. 동시에 하급심 강화를 위해 법관의 대폭적인 증원이 불가피하다. 고도산업사회에서 사건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백명이 넘는 특검 파견으로 일선의 젊은 검사들이 휴일 없이 출근한다. 대법원 재판연구관뿐만 아니라 하급심 법관들도 늦은 밤까지 근무가 일상화되어 있다. 논쟁적인 법원의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은 충분한 공론의 장을 거친 후에 논의하여도 늦지 않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영장실질심사를 강화해야 한다. 대통령·국회와 같이 국민적 정당성을 직접 확보하지 않은 사법부는 국민적 신뢰를 상실하는 순간 그 독립도 지켜지기 어렵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필자 주요 이력
▷파리2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한국공법학회 회장(2005~2007년) ▷한국법학교수회 회장(2009년 1월~2012년 12월)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2010~2013년) ▷동아시아연구중심대학협의회 의장 ▷제26대 서울대 총장(2014년 7월~2018년 7월) ▷서울대 명예교수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르포] 중력 6배에 짓눌려 기절 직전…전투기 조종사 비행환경 적응훈련(영상)](https://image.ajunews.com/content/image/2024/02/29/20240229181518601151_258_16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