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의 중동워치] 요르단 강은 알고 있다…1900년 '공존의 역사'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이희수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은 3년을 끌고서야 겨우 휴전에 돌입했다. 유엔과 국제사법재판소가 대량학살로 규정할 정도로 끔찍한 민간인 피해를 내고서도 아직 평화의 길은 멀기만 하다. 지난 100년간 이어진 갈등이 치유되기에는 상처가 너무 깊어졌고 무엇보다 빵과 물, 병원과 학교라는 최소한의 생존 조건이 주어지지 않은 일시적 평화는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존과 평화의 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달 초 안동에서 개최된 세계인문학포럼의 주제도 ‘AI 시대 공존의 탐색’이었고, 중동 지역의 공존 해법이 단연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중동은 이슬람 이전 시기부터 인류가 최초의 문명을 일궈낸 땅이고, 다양한 이념이 함께하는 경험을 오랜 역사를 통해 축적한 공존의 현장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미국의 중동 인류학자 칼턴 쿤은 중동 사회를 ‘모자이크’ 사회로 표현하면서 직업의 분화, 다양한 복장과 언어, 종교에 대한 관용 등으로 갈등과 반목보다는 이질적인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 ‘불편한 동거’에 익숙한 사회라고 정의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통적인 무슬림 사회학자들은 ‘용광로’ 이론을 주창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요소가 이슬람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용해되어 피아 구분 없는 종합적인 문화 토양으로서 중동-아랍 사회를 규정한다.
 
오랜 협력과 조화의 보이지 않는 약속은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서구 강대국의 경제적 야욕과 종교·문명의 이름으로 남의 가치를 무참히 짓밟는 비종교적-반문명적 야만에 의해 산산이 깨져 버렸다. 종교, 민족, 종파 그리고 국가 간에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 테러와 전쟁이 중동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와 접촉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착취와 부도덕뿐이었다는 무슬림의 과거 역사에 대한 뼈저린 경험은 다른 저항 수단을 잃어버린 이슬람 급진 세력의 무장 투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통해 중동에서 종교 간-종족 간 관계는 대립보다는 협력적이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중동 근대사를 면밀히 검토해 보더라도 갈릴리 호수와 요르단강이라는 생태계를 공유하면서 토착 유대인과 아랍인이 1900년 가까이 분쟁과 큰 갈등 없이 공존해 온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지구상에 서로 이질적인 두 종족 집단이 그토록 오랫동안 서로 양보하고 제한된 자원을 나누면서 평화롭게 공존한 역사를 쉽게 찾을 수 없을 정도다. 따라서 상호 교육과 종교 간 소통을 통해 ‘평화의 문화’를 심는 작업은 충분히 가능하고 나아가 의미 있는 시작이 될 것이다.
 
중동에서 공존의 역사적 경험과 실천적 사례 (딤미-밀레트)

우선 중동 지역의 공존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오랜 중동-이슬람 역사 속에서 실험되고 정착되었다. 초기 이슬람 정권은 이미 9세기경에 소수집단 보호 제도인 딤미(Dhimmi) 제도를 운영하고 이슬람 율법체계에 이를 반영했다. 딤미는 이슬람국가의 허용된 보호받는 비무슬림 시민들을 일컫는 법률 용어였다. 그것은 쿠란의 공존 정신에 근거하고 있었다.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 진리는 분명 오류와 구분되나니.(쿠란 2:256)
“그대는 그들의 뜻에 반하여 강제로 믿음을 강요하려 하느냐?(쿠란 10:9)
 
역사적 과정에서 이념을 폭력으로 휘두르고 약자에 대한 억압 행위가 수없이 반복되었지만 중동의 이슬람 정권들은 이러한 공존의 기본정신을 사회통합의 우선순위에 두고자 했던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딤미 제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지즈야’야 불리는 주민세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자신들의 종교공동체 내에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물론 딤미는 무슬림들보다 열등한 지위에서 다양한 차별과 제한을 받았지만 자신들의 종교적 율법이나 관습법을 지키고, 랍비나 총대주교의 통제를 받았다. 세액의 차별은 있었지만 거래와 무역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았다. 무슬림들의 무역세는 2.5%였음에 비해 딤미들은 5%를 납부해야 했다. 무슬림들의 두 배에 해당되지만 무슬림들은 별도로 2.5%에 해당되는 ‘자카트’라는 종교세 의무가 있었다. 딤미에 소속되지 않은 사람들은 10%를 납부해야 했다.

딤미제도는 15세기 새롭게 이슬람 세계를 통합한 오스만 제국 시대에서도 밀레트(Millet) 제도로 거듭났다. 밀레트는 비무슬림 종파 공동체인 유대교, 아르메니아인, 그리스 정교 등과 같은 종교공동체가 자신의 율법이나 종교적 관행에 따라 자치를 허용받은 독립적인 사법-문화적 제도를 의미한다. 각 밀레트의 대표인 최고 종교지도자는 술탄에게만 책임지는 막강한 권력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통제-관리했다. 오스만 제국의 시민들은 종교나 출신에 크게 제한받지 않고 공직에 진출할 수 있었고, 여러 명의 유대인 출신 관리들이 술탄 다음의 자리인 재상 직위에 올랐다.
 
물론 중세 때는 십자군 전쟁이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격돌을 부추기기도 했지만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의 300여 년 동안에도 팔레스타인에서는 다수의 아랍인과 소수의 기독교인과 유대인들이 큰 마찰 없이 대체로 평화롭게 공존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과 유대인, 기독교인들 사이의 공존과 상생의 기본정신은 19세기부터 조금씩 훼손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팽배한 ‘반유대주의’의 심화로 유대 민족 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가 힘을 얻음과 동시에 대이주(Aliyah)가 일어나면서부터였다.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박해를 피한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아랍인들의 토지를 매입하고 농업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토착 아랍인들과 경제적·사회적 긴장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모든 갈등과 분쟁은 오늘날까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일찍이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 작가 타밈 안사리가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에서 지적했듯이 어떤 시대적 상황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둔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신기술과 초첨단 네트워크 시대에 그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다. 특히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 갈등이 역사적 뿌리가 깊고 가장 폭력적이며 위험할 것이라고 경고했던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외관상 그럴듯하게 보였지만 그 본질이 종교나 문명권과는 거리가 먼 각국의 이해관계 충돌이라는 점에서 비판 또한 적지 않았다. 독일의 하랄트 뮐러, 미국의 에드워드 사이드, 노엄 촘스키, 영국의 아마르티아 센, 타리크 알리 등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은 문명충돌의 원인을 다른 요인에서 찾으며 오히려 문명 공존의 가능성을 설파했다. 1996년 하랄트 뮐러가 분석한 내용에 따르면 전쟁과 유혈폭력사태의 3분의 2 이상이 인종문제와 관련되어 일어나고 있다. 대규모 인구유입을 통한 인구구성비의 인위적 조작, 식수 부족이나 농지 잠식 등 자연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생태학적 스트레스가 소수집단의 정체성을 위협하게 될 때 필연적으로 지배집단과 갈등이 심화된다고 보았다. 이때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소속 집단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시멘트’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다른 측면에서 문명충돌론은 오리엔탈리즘의 입장과도 맥이 통한다. 문명충돌론이 미국과 서구를 문명화된 강대국으로 설정한 것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이 재생산해 왔던 편견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충돌론도 얼핏 보면 상이한 문명 간 충돌이 본질적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그 바탕에는 문명화된 서구가 우월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서구의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전략적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럼 어떻게 문명 간 충돌이 아닌 문명 간 대화를 이끌어내고 새로운 담론을 제시할 수 있을까. 현재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빅히스토리’ 프로젝트가 그나마 인상적인 대안으로 평가된다. 인류의 다양한 삶과 역사를 빅뱅에서 현재까지 138억년이라는 하나의 지구사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기존의 서양 중심 역사에서 인류사 전체로 새롭게 조망해 보자는 취지다. 그래서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등지의 역사도 비중 있게 다룬 인류의 공동 교과서를 집필해 함께 배우자는 것이다. 획일화된 문화를 강요하는 독선과 이로 인한 갈등과 전쟁보다는 기나긴 우주 역사 속에서 인류의 존재가치를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 교수가 제시한 ‘문화적 자유’ ‘다원적 정체성’ 개념을 통해 새로운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네 편과 내 편, 하나의 종교, 하나의 이념만이 아니라 인류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다원적 정체성을 인정하고 교육하자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이면서도 절에도 가보고 이슬람 친구들을 사귀어 보는 일이 자연스러운 문화를 말한다. 센 교수는 문화적 자유와 정체성의 이성적 선택권을 강조함으로써 이주민들이 주류사회에 동화되는 것을 택하건 자신의 과거 정체성을 유지하건 그것을 개인적 판단에 맡기자는 입장을 취한다.
 
결국 역사적 화해와 상생을 위한 최상의 길은 체계적인 학교 교육이다. 아랍과 이스라엘 모두의 공통의 커리큘럼 개발과 ‘평화교사’ 양성을 통해 국제문화 이해, 문화 다원주의, 문화상대주의 등 교육을 강화하고 아래에서부터 두터운 인식의 하부 구조를 마련해 가는 노력이 절실하다. 나아가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지식인 그룹, 사회공동체, 시민단체 등 종교와 종족이 다른 동일 구성원끼리 교류와 이해를 일상화하는 풀뿌리 논의를 확산해 나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종교학자 캐런 암스트롱의 메시지에 다시 귀 기울인다. “우리는 서로의 종교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그 종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다른 사람의 고귀한 신앙에 불신과 편견, 무지를 심지 않기 위해서다.”

필자 주요 이력

▷한국외대 ▷터키 이스탄불대학 역사학 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한국튀르키예친선협회 사무총장 ▷중앙아시아연구원(UNESCO-IICAS) 학술위원(한국대표) ▷성공회대 석좌교수 ▷국내외 저서 90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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