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시작하는 K-전력반도체"...부산 중심 새 산업지도 열릴까

  • 국회 정책 세미나서 "교체기 놓치면 공항, 중국산 장비로 채워진다" 경고

  • 2700대 공항 조업장비 전동화, 국산 전력반도체 첫 무대 제시

그래픽박연진 기자
[그래픽=박연진 기자]


국내 전력반도체 산업이 수요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법으로, 공항 지상조업장비 전동화를 ‘실증 테스트베드’로 삼자는 제안이 국회에서 공식화됐다.

전기차·데이터센터 등으로 수요가 폭증하는 전력반도체를 국가 전략산업으로 재정비하고, 부산·대구 두 특화단지를 잇는 실증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데 산학연·정부가 한목소리를 냈다.

지난 3일 국회에서는 ‘전력반도체 생태계 구축 정책 세미나’가 열렸다. 김희정 국회의원이 주최하고 한국전력소자산업협회와 글로벌미디어연합이 공동으로 마련한 이번 세미나는 국내 전력반도체 산업의 현황을 점검하고 실증 기반 구축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이날 세미나에서 한국전력소자산업협회 최윤화 회장은 우리 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첫 과제로 짚었다. 그는 “세계 전력반도체 시장은 이미 기술집약·고효율 경쟁으로 재편되고 있는데, 한국은 개발 역량이 있음에도 실제 운용 사례와 실증 기회가 부족해 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 동남아와 중국 지역에 기술을 이전하던 시기와 달리, 지금은 한국이 뒤에서 추격하는 입장이 됐다는 현실 진단이다.

현대자동차 금영범 상무는 실증 부재를 산업 발전의 가장 큰 병목으로 지적했다. 그는 “대기업조차 신기술을 실제 환경에서 장기간 검증할 공간을 찾기 어렵다”며 “중소기업의 경우 기술을 개발하고도 시험할 곳이 없어 아예 시장 진입조차 못 하는 사례가 많다”고 말했다.

금 상무는 2025~2035년 공항 조업장비 교체 시기가 본격화되는 점을 강조하며 “지금 실증 전략을 마련하지 못하면 공항은 물론 주변 항만·물류 장비 시장까지 외산이 선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내 공항에는 약 2700대의 지상조업장비가 운용 중이다. 이 가운데 전기 기반 친환경 장비 비중은 10% 미만, 70%는 외산으로 채워져 있다. 짐을 끄는 터그카와 전원공급차량 등이 대부분 디젤 엔진에 의존하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공항 환경을 ‘이상적인 실증 조건’으로 강조했다. 공항 지상조업차량은 제한된 공간에서 반복 운행되고, 모터·배터리·전력변환장치를 동시에 검증할 수 있어 전력반도체 성능 평가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

한국자동차연구원 손연욱 원장은 부산과 대구의 산업 기반을 묶은 ‘연합 실증 모델’을 제안했다. 그는 “부산은 전력반도체 소부장 특화단지, 대구는 전기차 구동계 특화단지로 지정돼 있다”며 “부산에서 전력반도체를 개발하고 대구에서 모터·인버터 등 구동계를 설계해 공항 장비에 적용하면 100% 국산 체계의 조업장비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손 원장은 공항 실증이 갖는 확장성을 강조했다. “국내 공항에서 5년 이상 안정적으로 운행한 실증 이력은 해외 공항·항만·송전 분야로 이어지는 가장 강력한 레퍼런스가 된다”며 “탄소중립과 산업 생태계 육성을 함께 달성할 수 있는 실질적 해법”이라고 말했다.

공항 지상조업장비(EGSE) 시장은 승용차와 달리 대량 양산이 아닌 ‘틈새시장’이다.

금영범 상무는 “대기업이 완제품을 모두 가져가는 구조보다, 대기업은 플랫폼과 핵심 설계를 제공하고 중소기업이 시스템 통합과 현장 대응을 맡는 조인트벤처 모델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중소기업 간 협업은 활발하지만 이를 전체 시스템 관점에서 조율하는 기능은 약하다”며 “브랜드·지적재산권(IP)까지 하나로 묶은 ‘K-GSE(국산 조업장비) 플랫폼’을 설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은 영남권 센터에 구축된 표면·계면 분석, 나노 구조 평가, 스트레스 시험 장비 등을 산업계에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소재–소자–모듈까지 신뢰성 평가를 한 번에 지원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중소기업이 바우처 방식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은 전기차 인버터·충전장치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국산 전력반도체 기반 공항용 구동계를 중소기업과 공동 개발하는 방안을 내놨다. 연구원 측은 “실증–규제–조달이 동시에 설계되지 않으면 공항·항만 전동화 시장은 외산 중심으로 굳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부도 원칙적 동의를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예산안에 전력반도체 공정 인프라·기판 분석 인프라 사업(40억원)이 반영됐다고 소개하며, 연내 ‘차세대 전력반도체 추진단’을 출범시켜 부산·대구를 연계한 실증·상용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토교통부도 공항 지상조업장비 전동화를 6차 공항개발종합계획의 주요 과제로 삼고, “안전성을 확보한 국산 장비에 대해 혁신제품 지정, 시범구매, 노후차량 폐차 지원 등 제도적 지원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공항 충전 인프라는 대부분 중국 규격(Gb/T)을 채택하고 있다. 한국공항공사와 인천국제공항공사는 충전기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기존 설비와의 규격 충돌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양 기관은 “유럽·미국 콤보 타입과의 정합성을 갖춘 한국형 공용 표준을 국제 표준화해야 한다”며 “중국 규격은 ‘호환’ 수준에 머물도록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세미나 참석자들은 공항 지상조업장비 실증이 전력반도체 국산화의 사실상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완성차 핵심 부품은 최소 5년 전부터 선정되는 만큼, 지금 실증을 시작하지 않으면 2025~2035년 교체 시장을 통째로 놓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세미나를 주재한 김희정 의원은 전력반도체 산업 전략을 둘러싼 논의의 방향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력반도체·모터·충전 인프라를 각각 따로 다뤄선 안 된다”며 “‘부산 전력반도체 특화단지–대구 구동계 특화단지–공항 테스트베드’로 이어지는 단일 패키지 전략을 범부처 차원에서 설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김 의원은 특히 “정책이 실제로 움직이려면 기술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세계 시장 규모, 국내 기업의 매출 가능성, 고용 창출 효과처럼 정확한 수치를 제시해 정책의 필요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어 “충전 규격 논의 역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선택”이라고 덧붙였다.

공항 터그카에서 시작된 전력반도체 실증 전략이 부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산업생태계로 확장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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