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변화는 통계보다 현장에서 먼저 느껴진다. 해외에서 사업을 해온 기업인들에게 신냉전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이미 수년 전부터 계약이 정치의 영향을 받고, 거래 조건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장면을 겪어왔다. 그래서 이들은 남들보다 먼저 질문을 바꿨다. 기술이 좋은가, 자본이 충분한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어디에 서야 하는가, 누구와 거래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관계를 얼마나 오래 지킬 수 있는가를 묻기 시작했다.
이 질문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니다. 실패하고, 손해 보고, 버티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질문이다. 세계한인경제무역협회(World-OKTA)라는 조직의 시간은 바로 이런 질문들이 축적돼 온 시간이다.
· 송도에서 드러난 ‘서두르지 않는 판단’
인상적이었던 점은, ‘빨리 키우는 방법’보다 ‘살아남는 방법’을 공유하는 대화가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월드옥타 회원들 대부분은 낯선 나라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언어도, 제도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단기간에 판을 키우기보다 거래처 하나를 오래 지키는 선택을 해 왔다. 송도대회에서도 ‘확대’보다 ‘지속’이라는 말이 더 자주 들렸다.
이 선택은 겉으로 보기엔 느리고 조용하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 어렵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이런 선택이 오히려 힘을 갖는다. 한쪽에 쏠리지 않고, 관계를 끊지 않으며, 다음 길을 남겨두는 판단이 기업을 살린다.
· 박종범, 앞서기보다 중심을 지키는 리더십
박종범 회장의 행보도 이 흐름 위에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제조·무역·물류 현장을 오래 거쳐 온 재외동포 기업인이다. 빠른 성과를 좇기보다 실패 가능성을 줄이는 선택을 반복해 왔다. 앞서 나가기보다, 오래 버틸 수 있는 길을 택해 온 셈이다.
박 회장이 공개 석상에서 여러 차례 강조해 온 말은 단순하다. “한상 네트워크의 힘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에 있다.” 이 말은 구호라기보다, 그가 살아온 방식에 가깝다. 월드옥타 회장으로서 그의 역할도 화려한 비전을 내세우는 데 있지 않다. 어느 한 나라나 이해관계에 치우치지 않도록 중심을 잡고, 회원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오래 버틸 수 있도록 연결을 유지하는 일이다.
송도대회가 성과 발표보다 상담과 경험 공유에 무게를 둔 것도 이런 판단의 연장선이다. 이는 개인의 영웅적 결단이라기보다, 집단이 오래 작동할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하려는 선택에 가깝다.
· ‘판단형 기업가정신’이라는 프리즘
이 지점에서 기존의 기업가정신 논의는 한계를 드러낸다. 혁신, 속도, 확장을 중심으로 한 기업가정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선택들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를 ‘판단형 기업가정신’이라 부르고자 한다.
판단형 기업가정신은 기술보다 위치를 먼저 본다. 빠른 성공보다 실패 가능성을 줄이는 선택을 중시한다. 한 번의 결단보다, 같은 판단을 오래 지켜내는 힘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는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이미 현장에서 검증된 태도다. 월드옥타 회원들과 박종범 회장의 경험은 이런 기업가정신이 말이 아니라 생활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 한국경제가 던져야 할 질문
여기서 시선을 개인과 조직을 넘어 한국경제로 옮길 필요가 있다. 이런 판단과 경험이 축적된 민간 네트워크를 우리는 과연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신냉전 환경에서 정부의 외교와 대기업의 전략만으로 모든 길을 열 수는 없다. 국가가 닿지 못하는 시장의 틈, 대기업이 비용 대비 효율을 따지며 외면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월드옥타와 같은 조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해 왔다. 정부 조직도 아니고, 특정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도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은 기업인들이 축적한 판단과 관계가 느슨하게 이어진 민간 네트워크다. 지금 한국경제에 필요한 것은 이런 경험을 단발성 행사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연결하고 활용하는 방식이다.
박종범 회장과 월드옥타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은 빠른 성과를 만들어내는 조직이 아니다. 대신 실패 확률을 낮추는 구조를 제공한다. 지금 한국경제에 더 필요한 것은 화려한 성공 사례보다, 덜 실패하게 만드는 판단의 축적이다.
· 심천이라는 시험대
월드옥타는 내년 10월 중국 심천에서 한상대회를 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심천은 제조와 기술, 시장과 플랫폼이 빠르게 결합된 도시다. 동시에 미·중 기술 경쟁의 한복판에 놓인 곳이기도 하다. 만약 이 대회가 열리게 된다면, 그것은 성과를 과시하는 자리가 아닐 것이다. 판단형 기업가정신이 신냉전의 최전선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점검하는 자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업가정신은 직함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회장이라는 자리도, 회원이라는 이름도 그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결국 기업가정신은 매번의 선택에서 드러난다. 서두르지 않을 용기, 한쪽에 쏠리지 않을 판단, 관계의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다.
신냉전 시대의 기업가정신은 다시 사람의 판단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그 판단은 회의실이 아니라, 이미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경제가 박종범 회장과 월드옥타, 그리고 흩어져 버텨온 이들의 경험과 더 긴밀히 연결돼야 하는 이유다. 그것은 특정 조직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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