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사설 | 기본·원칙·상식] 글로벌 사슬 재창조, 이제는 한국이 설계하는 국가가 돼야 한다

글로벌 밸류 질서는 더 이상 ‘재편’의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다. 보호무역과 자국 우선주의가 일시적 대응을 넘어 구조로 굳어지면서, 세계 공급망은 지금 재창조의 국면에 들어섰다. 관세와 보조금, 수출통제와 안보 동맹이 시장의 효율과 비용 논리를 대체하고 있다. 글로벌 가치사슬은 이제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안보가 결합된 질서의 문제다.

미국은 산업정책과 동맹 전략을 결합해 새로운 규칙을 설계하고 있고, 중국은 원자재·기술 자립을 국가 전략의 핵심 축으로 삼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세계는 하나의 시장이 아니라, 여러 개의 규칙과 진영으로 나뉜 구조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한국 경제에 단순한 외부 변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무역 의존도가 높고 해외 충격에 민감한 한국 경제에서 통상 질서의 변화는 곧바로 실물과 금융에 반영된다. 외국인 자금이 유입되는 상황에서도 원화 약세가 이어지는 현상은, 환율이 더 이상 수출입과 자본 흐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글로벌 정책 리스크와 지정학적 변수에 한국 경제가 직접 노출돼 있다는 경고다.

문제는 이 리스크를 기업의 대응만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효율보다 안보가, 시장보다 정치가 앞서는 환경에서 반도체와 배터리 같은 전략 산업은 개별 기업의 판단을 넘어선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관세와 보조금, 수출 규제가 정치적 결정에 따라 바뀌는 상황에서 기업에게만 비용과 책임을 떠넘기는 방식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이제는 국가 차원의 설계가 필요한 국면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 동아시아 반도체 협업 구조다. 지난 수십 년간 동아시아는 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이었다. 한국의 메모리, 대만의 파운드리, 일본의 소재·부품·장비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으며 하나의 가치사슬을 형성해왔다. 경쟁은 치열했지만 성장은 집단적으로 축적됐다. 이른바 ‘재코타(JaKoTa)’로 불린 이 구조는 단순한 분업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협력이었다.

AI 반도체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 특성은 더욱 분명해졌다. 고성능 AI 칩은 한국의 HBM 없이는 완성될 수 없고, 대만의 초미세 공정 없이는 구현될 수 없다. 일본의 장비와 소재가 결합돼야 생산이 가능하다. 어느 한 국가가 독주할 수 없는 구조이며, 동시에 어느 한 축이 흔들리면 전체가 멈추는 구조다. 반도체는 이미 협업형 산업이 됐다.

그럼에도 미·중 갈등의 격화는 이 협업 구조를 약화시키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은 미국 주도의 규칙에 편입되거나, 중국의 대응 전략을 의식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공통의 성장 엔진을 공유해온 지역에서 협력이 사라지고 경쟁만 남는다면, 결과는 분절과 종속일 수밖에 없다.

물론 반론도 있다. 국가 간 협업은 자칫 외교적 부담을 키우고, 특정 진영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우려다. 기술 주권을 강조하는 시대에 협력은 자립을 훼손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고립된 자립은 현실적 대안이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 “분업의 범위는 시장의 크기에 의해 제한된다.” 오늘의 시장은 국가가 아니라 공급망이며, 협력 없는 자립은 비용만 키울 뿐이다.

필요한 것은 경쟁을 전제로 한 협력, 다시 말해 국가 차원의 전략적 연대다. 기술과 기업은 경쟁하되, 공급망 안정, 원자재 확보, 표준 설정, 인력과 연구 기반에서는 협력의 틀을 갖춰야 한다. 이는 특정 국가를 배제하기 위한 동맹이 아니라, 동아시아 스스로의 산업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다.

한국은 이 과정에서 주변국이 아니라 설계자가 돼야 한다. 반도체 협업의 교차점에 서 있는 한국은 단순한 생산기지가 아니라, 흐름을 조정하고 규칙을 제안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첨단 산업에 대한 세제·금융 지원, 연구·개발 투자, 핵심 원자재와 부품에 대한 전략적 비축과 리스크 관리 역시 개별 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동아시아 반도체 공동체를 염두에 둔 구조적 설계여야 한다.

글로벌 밸류 질서가 재창조되는 시대에, 한국은 더 이상 미·중 사이에서 선택을 미루는 국가로 남을 수 없다. 따라가는 국가에서 설계하는 국가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반도체 협업을 출발점으로 상호의존적 협력 구조를 전략적 요충으로 만들 때, 한국은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산업망과 새로운 성장 질서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재창조의 시대에 한국이 선택해야 할 국가 전략은 분명하다.
 
사진Notebook LM 인포그래픽
[사진=Notebook LM 인포그래픽]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