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서 리차드 파커가 등장하자, 관객 모두가 숨 죽였다. 리차드 파커는 커다란 몸으로 무대를 어슬렁거리거나, 근육질 몸매를 유연하게 움직이며 무대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 한국 초연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그림이 튀어나오는 팝업 동화책 같다. 옛날 옛적부터 전해져 온 듯한 형형색색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주인공 파이 역의 박정민, 박강현 등 배우들의 열연도 인상적이지만, 이 작품의 상상력을 완성하는 핵심은 퍼펫티어들이 조종하는 동물 인형들이다. 호랑이, 얼룩말, 기린, 하이에나, 거북이, 염소, 영롱한 물고기떼 등 퍼펫들의 정교한 움직임에 그림 같은 시각효과가 겹치며, 관객들은 인도의 동물원에서 새파란 망망대해가 끝없이 이어지는 다음 장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린다.
특히 17세 소년 파이와 구명보트에서 227일간의 여정을 함께하는 벵골 호랑이 리차드 파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하이에나의 목을 물어뜯는 야생적 면모를 비롯해 뱃머리에서 졸거나, 호루라기 소리에 겁먹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면모까지 다채로운 얼굴을 선보인다. 특히 극의 막바지, 리차드 파커의 뒷모습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인공지능(AI)이나 컴퓨터그래픽스(CG)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영상을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매력은 중국의 그림자극이나 일본의 분라쿠 등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 있다. 상상력을 발휘할 조금의 여지도 안 주는, 빈틈없는 영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연극만이 주는 여백의 미가 있다고 할까. 그 여백을 각자의 상상력으로 채워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표정하던 리차드 파커가 찡그리고, 웃고, 말을 건넨다.
리차드 파커는 잔인한 '적'이자, 겁에 질린 '아이'이며, 17세 소년 파이와 인생의 파고를 함께 헤쳐나간 용맹한 '동반자'다. 극 초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리차드 파커는 떠나보내기 싫은 어린 시절의 친구로, 또 순수한 눈과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했던 어린 시절의 나로 변모한다. 그렇기에 주인공 파이의 "사랑해 리차드 파커. 너를 온전히 사랑해"란 대사는 성장통으로 눈물 짓던 과거의 나에게 건네는 위로로 다가온다.
스토리텔링도 매력적인 요소다. 어느 등장인물의 "이 동물원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은 인간"이란 말은 씁쓸한 공감을 자아낸다. 그러면서도 시련이 닥칠 때마다 신앙에 의지하며 견뎌내는 파이의 모습을 통해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흔들리고 표류하면서도 끝내는 살아내고야 마는 인간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2024년 공쿠르상을 수상한 소설 <후리>의 작가 카멜 다우드가 최근 방한해서 남긴 말이 떠올랐다.
"제 인생은 저만의 인생이고, 저만의 정답을 찾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하려는 것, 그 세상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거 아닐까요."
GS아트센터에서 공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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