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프더레코드] AI 대전 뒤편의 계산기…중소형 증권사 인프라가 멈춘 이유

  • "수천억 들여서 제 임기에 적자 보라고요?"…증권사 'AI 혁신'의 씁쓸한 뒷면

생성형 AI 이미지
생성형 AI 이미지.
 

"자체 원장 시스템으로 바꾸려면 수백억에서 수천억원이 듭니다. 2~3년 임기인 대표가 취임해서 그 돈을 쓰면 임기 내내 적자를 봐야 하는데, 어떤 대표가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겠습니까."


최근 한 중소형 증권사 관계자의 토로입니다. 새해 초부터 증권가가 '인공지능(AI) 대전'이라며 화려한 마케팅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투자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기초 인프라가 멈춰 선 진짜 이유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업계 20위권대인 IBK투자증권이 대표적입니다. 지난 8일 생성형 AI 기반의 금융·부동산 통합 분석 자산 진단 서비스를 내놓으면서 디지털 혁신에 합류했다고 홍보했지만 실상은 타사 앱에서 내 돈을 가져오는 '오픈뱅킹(하나의 앱에서 모든 금융 계좌를 조회·이체하는 서비스)'조차 안 돼 투자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오픈뱅킹은 청약 증거금을 다른 은행에서 즉시 끌어올 때 요긴한 기능인데, 왜 이런 기초적인 서비스조차 막혀 있는 걸까요?
 

원인은 '셋방살이' 중인 전산 시스템과 경영진의 '계산기'에 있습니다. IBK투자증권은 자체 원장(고객 계좌 정보를 관리하는 장부) 시스템을 갖춘 대형사와 달리 코스콤의 공용 시스템인 '파워베이스'를 빌려 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오픈뱅킹 기능을 완벽히 지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내부적으로는 대표가 바뀔 때마다 자체 원장 구축 검토를 수년째 해왔지만 결론은 늘 보류였습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설적이게도 대표님의 '임기'였습니다. 막대한 투자비를 쏟아부어 실적이 적자로 돌아서면 경영 성적표를 망치게 된다는 계산입니다.

중소 증권사 관계자는 "오너 경영 체제가 아닌 이상 곧 물러나야 하는 전문 경영인에게 그런 자기희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내가 심은 나무의 열매를 다음 사장님이 따 먹는 구조라면 차라리 현재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영리한 선택이 되는 셈"이라고 귀띔했습니다.

 

이런 경영진의 계산기가 두드려지는 사이 인프라의 한계는 투자자들의 자금 유출입 리스크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달 10일 IBK투자증권에서 진행된 'IBKS제25호스팩' 청약 과정에서 일부 자금 처리 지연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청약 시기에 이체 수요가 몰리면 자체 서버가 아닌 코스콤 망을 거쳐 자금을 처리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병목 현상을 해결할 근본적인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증권사들이 앞다퉈 '디지털 퍼스트'를 외치며 화려한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뽐내지만 그 뒤에는 어쩌면 '내 임기 내 적자는 안 돼'라는 경영진의 씁쓸한 계산기가 놓여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영진의 성적표가 고객의 편리함보다 우선시되는 한, 중견 증권사의 인프라 소외는 당분간 계속될 숙제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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