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본시장에서 '행동주의 펀드'가 요즘처럼 활발했던 적은 없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행동주의는 기업 경영을 위협하는 기업 사냥꾼이거나 주가를 잠시 흔들다 사라지는 찻잔 속 태풍 정도로 인식됐다. 그러나 최근 들어 행동주의는 제도와 자본, 명분을 모두 갖춘 채 한국 기업 지배구조의 한 축으로 자리잡고 있다.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행동주의 펀드는 2022년 이후 토종 자본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었다. 최근에는 단순한 주주 제안에 그치지 않고 이사회 진입과 경영 참여를 전제로 한 개입이 일반화되는 추세다.
이 같은 변화의 출발점은 2006년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설립한 한국기업지배구조펀드(KCGF), 이른바 '장하성 펀드'다.
장하성 펀드는 태광산업, 한솔제지, 대한화섬, 크라운제과 등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거나 자산 가치 대비 저평가됐다고 판단한 기업들을 타깃으로 삼았다. 이사 선임과 이사회 독립성 강화, 내부거래 개선 등을 요구하며 재벌 중심 지배구조에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초기 반응은 뜨거웠다. 한국형 주주자본주의의 출발점이라는 평가와 함께 일부 개인 투자자들의 호응도 이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녹록지 않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주가 급락과 함께 투자자 이탈이 이어졌고 장하성 펀드는 2008년 한 해에만 40% 이상의 손실을 기록했다. 이후 2009년과 2010년 수익률을 회복했지만 2011년 다시 -19.4%의 수익률을 기록하며 부진이 이어졌다. 결국 2012년 보유 주식을 모두 유동화하고 청산 수순을 밟았다. 행동주의가 국내 자본시장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인식이 굳어진 배경이다.
끊긴 듯했던 행동주의의 명맥은 2018년 KCGI(강성부 펀드)의 등장으로 다시 이어졌다. KCGI는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 지분을 확보하며 본격적인 행동주의에 나섰다. 지배구조 개선과 부채비율 축소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갈등은 곧 조원태 회장과의 경영권 분쟁으로 확대됐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산업은행의 개입 등 복합적인 국면 속에서 KCGI는 최종적인 경영권 확보에는 실패했다. 그럼에도 이 사례는 한국식 재벌 경영 구조 역시 주주 행동주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평가를 남겼다.
국내 행동주의가 본격적인 확산 국면에 접어든 것은 2022년 이후다. 상법 개정 논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연기금의 의결권 행사 강화 등 제도적 환경 변화가 맞물리며 행동주의가 설 자리가 넓어졌다.
현재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행동주의 전략을 표방한 자산운용사는 10곳 안팎으로, 2010년대 후반과 비교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안다자산운용, 얼라인파트너스, 라이프자산운용, 트러스톤자산운용, VIP자산운용, 차파트너스, 플래쉬라이트 캐피탈 파트너스(FCP)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과거 외국계 헤지펀드와 달리 국내 기업과 산업 구조에 대한 이해를 강점으로 내세운다. 행동 방식 역시 한층 정교해졌다. 공개서한과 주주총회 압박에 그치지 않고 이사회 진입을 통한 경영 참여를 적극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행동주의의 위상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지난 2022년 얼라인파트너스의 SM엔터테인먼트 개입이다. 얼라인파트너스는 SM엔터테인먼트의 '라이크기획'과의 계약 구조가 사실상 일감 몰아주기에 해당한다고 지적하며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했다. 결과는 계약 종료였다. 행동주의가 단순한 압박 수단을 넘어 구조적 문제를 바로잡는 도구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된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이 BYC의 내부거래 문제를 제기하고 태광산업의 흥국생명 유상증자 참여를 중단시킨 사례 역시 행동주의가 단순히 목소리를 높이는 수준을 넘어 기업의 불합리한 자본 배분을 실질적으로 저지하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대주주의 사익 편취나 계열사 지원 등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경영 판단에 대해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행동주의는 대기업을 넘어 중소·중견기업으로도 타깃을 넓히고 있다. 주가 부양 여력이 크고 지배구조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기업들이 주요 대상이다. 이사회 의석 확보를 통해 경영 전략과 투자 계획에 직접 관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11월 얼라인파트너스자산운용이 코스피 상장사 에이플러스에셋어드바이저를 상대로 단행한 '행동주의 목적의 공개매수'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약 360억원을 투입해 지분 19.91%를 추가 확보해 단숨에 2대 주주(24.9%)에 오르는 승부수를 던졌다. 단순히 경영진을 압박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적인 지분 확보를 통해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와 자본 효율성 제고를 강제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얼라인파트너스 뿐만 아니라 행동주의 진영 전반이 이 같은 핀셋 공세에 가세하고 있다. 얼라인파트너스는 최근 스틱인베스트먼트에 자기주식 소각을 요구하는 한편 솔루엠, 가비아, 덴티움 등의 주식 보유 목적을 '경영권 영향'으로 변경하며 전방위적인 압박에 나섰다. 이는 과거 행동주의가 지주사나 대형 금융사에 집중됐던 것과 달리 이제는 독보적인 기술력이나 현금 창출력을 가졌음에도 지배구조 리스크로 저평가된 중견 강소기업들이 행동주의의 주요 전장이 됐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들도 다시 한국 시장을 주목하고 있다. 영국계 팰리서캐피탈은 지난 2024년 SK스퀘어 지분을 확보하며 자사주 매입·소각과 순자산가치(NAV) 할인 해소를 요구해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다만 이후 지분을 축소하며 주주 제안에 나서지 않으면서, 글로벌 행동주의 역시 단기 차익과 전략적 철수를 병행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최근 행동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대중화'다. 과거 행동주의가 전문 자산운용사들만의 전유물이었다면 이제는 '액트(ACT)' 등 주주행동 플랫폼을 통해 결집한 소액주주들이 직접 세력을 형성해 주주 제안에 나서는 양상이다.
물류 전문 기업 세방의 소액주주연대는 최근 사측에 1주당 800원의 현금배당과 감사위원 분리선출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발송하며 전면전에 나섰다. 특히 주주연대는 세방이 과거 하이비젼시스템과 진행한 자사주 맞교환을 '경영권 방어를 위한 편법'으로 규정하고 금융감독원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전문 펀드 못지않은 날카로운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러한 소액주주들의 힘은 이미 실질적인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LS그룹이 자회사 에식스솔루션즈의 상장 계획을 전격 철회한 것이 대표적이다. 액트를 중심으로 뭉친 주주들이 중복 상장으로 인한 모회사 가치 훼손을 주장하며 거래소 상장 불승인 요구와 5000억원 규모의 대체 투자 유치 선언 등 강력한 압박을 가하자 그룹 차원에서 백기를 든 것이다.
이는 행동주의가 단순히 '배당 더 달라'는 요구를 넘어 기업의 상장(IPO)이나 지배구조 개편 등 핵심 경영 의사결정까지 멈춰 세울 수 있는 '실질적 비토권'을 갖게 됐음을 의미한다. 현재 이들의 시선은 HD현대로보틱스 상장을 추진 중인 HD현대그룹으로까지 향하고 있어, 재계 전반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다만 행동주의의 확산이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에 긍정적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남아 있다. 단기적으로는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투자와 고용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분명한 것은 행동주의가 더 이상 한국 자본시장의 주변부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장하성 펀드의 실패에서 시작된 실험은 20년 만에 제도와 자본, 명분을 갖춘 흐름으로 성장했다. 이제 한국 자본시장은 행동주의와 공존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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