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 칼럼] AI 시대, 지방대학은 왜 '신 도제식 교육'인가?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학교 영어학과 교수]
 

온 세상이 AI 앞에서 불안해하고 있다. 전문직의 몰락, 로봇의 대체, AI 시대의 교육 방향 등 작금 최대의 화두이다. 지방대학의 위기를 말할 때 가장 자주 등장하는 처방은 전인교육 강화나 융합 인재 양성이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대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책임을 미루는 구호에 가깝다. AI 시대로의 전환은 대학에 더 많은 것을 가르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에서 무엇을 끝까지 책임지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패러다임이 바뀌는 결정적 순간을 기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잘해왔기 때문에 전환기에 둔감하였다. 축적된 성공 방식은 강점이었지만 동시에 다음 시대로 넘어가는 데는 무거운 짐이 되었다. 후발 주자는 ‘불리함’ 대신 ‘가벼움’을 얻는다. 몸이 가벼운 쪽이 먼저 뛴다. 지금 지방과 지방대학이 서 있는 자리도 전환기의 한복판이다. 디지털 시대의 규칙으로는 서울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AI 시대로의 전환은 규칙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제 경쟁력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두 갈래로 나뉜다. ‘1등이 되는 능력’과 ‘탈락하지 않는 능력’이다. 이 둘은 전혀 다른 교육과 사회구조를 요구한다.
 
독일 사례는 중요하다. 독일은 AI 시대의 선두 주자가 아니다. 글로벌 AI 플랫폼도, 빅테크도, 데이터 패권도 독일의 몫은 아니다. 그러나 독일은 AI 시대에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제조업 고용은 급격히 붕괴되지 않았고, 숙련 노동층이 한꺼번에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유는 분명하다. 독일의 도제식 교육은 혁신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전환기의 붕괴를 늦추는 구조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AI는 인간을 전면적으로 대체하기보다 숙련자와 결합한다. 현장의 마이스터는 단순 기능 노동자가 아니다. 공정 전체를 이해하고, 오류의 원인을 판단하며, 결과물의 품질과 안전에 책임을 진다. 그래서 AI가 들어와도 ‘완전 대체’가 아니라 ‘역할 결합’이 일어난다. 독일은 AI 시대에 앞서 나가고 있어서 강한 나라가 아니라 도제식 책임 구조 덕분에 덜 부서지는 나라이다. 여기서 중요한 결론이 나온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가장 빨리 앞서가는 능력보다 가장 늦게 무너지지 않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점은 지금 한국의 지방과 지방대학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목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지방과 지방대학이 붙들어야 할 산업은 이미 지방에 있다. 전국 각 지역에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전통 산업의 기반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 스마트 제조를 중심으로 한 기계, 금속, 화학, 식품, 섬유 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영역에서 AI는 공정을 자동화하고 품질과 안전을 관리하지만, 공정 전체를 이해하고 오류를 판단하며 최종 결과에 책임지는 역할은 인간에게 남는다. 지방대학이 길러야 할 인력은 알고리즘 개발자가 아니라 AI가 개입한 생산 과정의 결과 앞에서 책임을 지는 숙련자들이다. 공장과 현장이 가까운 지방에서만 가능한 도제식 교육이 이 영역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한다.
 
AI 때문에 미국과 한국, 일본이 이미 무너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아니다. 그러나 안심할 수도 없다. AI는 사회를 한번에 무너뜨리지 않는다. 대신 무너질 곳과 버틸 곳을 먼저 갈라놓는다. 그래서 지금 중요한 질문은 ‘무너졌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디가 먼저,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고 있느냐’이다.
 
AI 시대의 최대 수혜국은 분명 미국이다. 빅테크와 플랫폼, 원천 기술과 자본, 데이터까지 모든 중심이 미국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미국 내부에서는 다른 종류의 붕괴가 진행 중이다. 중간 숙련 사무직이 빠르게 줄어들고, 안정적인 중산층 직무가 사라지며 노동시장에 양극화가 가속되고 있다. 상단은 더 강해지고, 중간은 비어간다. 미국은 무너지는 나라가 아니라 AI로 더 빠르게 갈라지는 나라이다. ‘1등이 되는 능력’은 압도적이지만 ‘탈락하지 않는 능력’은 약한 구조이다. 일본은 또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일본의 문제는 AI 이전부터 시작됐다. 디지털 전환은 늦었고, 관료와 기업 구조는 경직돼 있다. 내부 효율은 유지되지만, 외부 경쟁력은 약화되어 왔다. AI는 일본을 무너뜨린 원인이 아니라 이미 약해진 구조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촉매에 가깝다. 일본은 급격히 붕괴하는 나라가 아니라 전환기를 놓친 채 장기적으로 침식되고 있는 나라이다. 한국은 지금 이 두 나라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 아직 무너지지는 않았다. AI 활용 속도는 빠르고 기술 수용성도 높다. 그러나 교육과 노동구조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고, 중간 숙련 일자리는 특히 취약하다. 미국처럼 상단이 폭발적으로 강하지도 않고, 독일처럼 충격을 완화해 줄 두꺼운 완충 구조도 없다. 그래서 한국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지만 어떤 구조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가장 빨리 흔들릴 수도 있는 나라이다.
 
지방은 수도권과 같은 방식으로 ‘1등 경쟁’을 벌일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버티기’만을 목표로 삼을 이유도 없다. 전환기라는 특수한 국면에서 지방은 부분적으로 1등이 되는 영역과 구조적으로 탈락하지 않는 구조를 동시에 설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국의 지방대학이 서울의 화려한 플랫폼 AI를 모방하는 것은 승산 없는 게임이다. 자본, 데이터, 인재 풀도 다른 조건에서 같은 경기를 치를 수는 없다. 그러나 도제식 교육으로 지역 산업과 AI를 결합하는 ‘거점’이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방대학의 역할은 가장 앞선 AI 모델을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AI라는 파도가 덮칠 때 지역 산업이 가장 늦게 무너지도록 지탱하는 숙련된 방파제를 구축하는 데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방대학만이 맡을 수 있는, 그리고 지금 가장 시급한 역할이다.
 
과거에는 여러 분야를 조금씩 알고 한 분야에 깊이를 더한 ‘T자형 인간’이 이상적인 인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AI 시대에 요구되는 인간상은 다르다. 이제 필요한 것은 T자가 아니라 초대형 문자 ‘I’이다. 넓이는 AI가 대신하고, 인간은 한 분야에서 끝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는,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공인회계사가 AI에 의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라지는 것은 공인회계사 사무소에서 반복 업무를 담당하던 종사원들이 될 것이다. 공인회계사는 재무제표와 감사보고서라는 결과물에 책임을 지고 도장을 찍는 사람으로 남는다. 판사는 AI가 작성한 판결문 초안을 검토하고 최종 판단에 법봉을 두드린다. 의사는 AI의 판독 결과에 대해 의사로서 확증을 부여한다. 번역 역시 마찬가지다. AI가 번역을 해낼수록 그 번역물에 책임과 법적 확신을 부여하는 번역행정사의 역할은 오히려 분명해진다. 살아남는 것은 언제나 각 분야 피라미드의 정점, 최종 책임자, 즉 ‘signer’인 것이다.
 
이제 젊은 세대에게 요구되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잘하려는 전천후 능력이 아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봉이 되는 일이다. 그 길은 빠르지 않다. 오히려 과거 유럽 중세의 장인과 도제처럼 반복과 실패를 감당하는 철저한 숙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바로 그 느린 축적만이 AI 시대에 인간을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처지와 적성에 맞는 ‘한 가지’를 끝까지 파고들 수 있다. 하나만 특출하다면 그 분야에서는 AI를 능가하거나 적어도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지방대학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수능 전 과목을 모두 다 잘하는 전천후형 인재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도제식 교육을 통해 단일 분야에서 책임질 수 있는 최고 숙련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AI 시대에는 바로 이런 단일 분야 특출형 인간이 가장 강해진다.
 
필자가 말하는 도제식 대학교육은 기술교육 강화가 아니다. 도제식 교육을 기술 숙련의 문제로만 이해하면 핵심을 놓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이 만들어낸 결과 앞에서 인간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가이다. 도제식 교육은 바로 그 책임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훈련이며, AI 시대에 대학교육이 다시 안아야 하는 본질이다. 지방과 지방대학은 전환기의 논리를 이해하고 도제식 교육을 통해 책임 있는 전문성을 축적한다면 지방은 이 AI 시대에 패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부분적 1등과 구조적 생존, 이것이 지금 지방과 지방대학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이다.
 
현장·산업·대학이 결합된 장기 숙련의 ‘신(新) 도제식 교육’이 필요하다. 인공지능 시대에 교육은 인간이 ‘조자룡이 헌 칼 쓰듯이’ AI를 다루며 산업 현장을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필자는 이러한 ‘신 도제식 교육’에 지방대학의 미래를 기대한다.

필자 주요 이력
부산대 번역학 박사 ▷미국 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졸업 ▷대구가톨릭대 영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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