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국 VIP자산운용 대표는 국내 자본시장에서 '한국형 가치투자'의 개척자로 통한다. 20대 서울대 주식투자동아리(SMIC) 시절부터 가치투자를 고민해온 그는 2003년 최준철 대표와 함께 VIP투자자문(현 VIP자산운용)을 설립하며 국내 증시에 가치투자라는 단어를 각인시켰다.
그가 생각하는 가치투자는 '기다림의 미학'이다. 20여년간 가치투자를 실천해온 그의 보폭은 최근 '행동주의'로 확장되고 있다. 저평가된 기업에 과감한 주주권 행사로 맞붙으며 기업 가치를 깨우는 촉매 역할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최근 3차 상법 개정 시행을 앞두고 만난 김 대표는 "이제 기다림만으로는 부족하다"며 "행동주의는 투쟁이나 압박이 아니라 대주주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설득의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국내 증시의 밸류업 성패를 가르는 것은 개별 기업의 전략보다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환경"이라고 진단했다.
"가장 큰 호재가 대주주 사망? 이 비극적인 구조 깨야"
김 대표는 국내 증시에 드러난 가장 씁쓸한 현실로 '대주주 위독설'을 꼽았다. 그는 "주식 토론방에 가면 대주주보고 죽으라는 저주가 가득하다"며 "실제로 대주주가 사망하면 주가가 급등한다. 상속세를 아끼기 위해 주가를 억지로 누르던 불확실성이 해소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기업 가치보다 지배구조 리스크가 주가를 좌우하는 왜곡된 구조가 고착화됐다는 지적이다.제도 변화가 오히려 시장 왜곡을 키우고 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최근 상법 개정과 자사주 소각 의무화 논의가 급물살을 타자, 규제가 강화되기 전 지배력을 굳히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상법 개정의 역설'이다.
대표적 사례로 세보엠이씨를 들었다. 세보엠이씨는 최근 회사가 보유한 자사주를 우호적인 제3의 법인에 넘기고 대신 그 법인의 주식을 받아오는 '자사주 스와프'를 단행했다. 의결권이 없어 경영권 방어에 쓸 수 없던 자사주가 제3자에게 넘어가면서 의결권 있는 주식으로 부활해 사실상 대주주의 백기사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김 대표는 "이런 행태는 법의 테두리를 이용한 교묘한 우회"라며 "일본은 상호 보유주를 없애는 추세인데 한국은 오히려 주주 가치를 영구적으로 훼손하는 비가역적 결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사가 주주 충실 의무를 다하도록 법이 바뀌어도 무엇이 위반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이사회는 여전히 '전략적 제휴'라는 명분 뒤에 숨은 거수기 역할에 머물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권장, 소통은 처벌?"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를 둘러싼 규제 체계에 대해서는 정책적 정교함이 더해져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정부는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을 통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독려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기관투자자 간의 건전한 의견 교류조차 '5% 룰(대량보유 보고의무)'의 족쇄에 묶여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 자본시장법상 5% 이상의 지분을 가진 기관들이 배당 확대 등을 논의하기 위해 서로 소통할 경우 당국에 의해 ‘공동 보유자’로 묶일 위험이 있다. 공동 보유자로 지정되면 지분 변동 시마다 까다로운 보고 의무가 생길 뿐 아니라 자칫 경영권에 개입하려 한다는 오해를 사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어 기관들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꺼려진다는 지적이다.
김 대표는 경영권 탈취 목적이 아닌 배당 확대나 지배구조 개선 같은 일반적 주주 환원 안건에 대해서는 주주 간 교류를 허용하는 예외 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 기조에 맞춰 주주권을 행사하려 해도 소통 창구가 불명확하면 실질적인 기업 체질 개선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며 "정부의 밸류업 정책이 탄력을 받으려면 기관투자자들이 법적 불확실성 없이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60페이지의 '러브레터'…행동주의는 설득의 기술
그렇다면 VIP자산운용은 실제로 기업을 어떻게 변화시키려 할까. 김 대표는 이를 '설득의 기술'이라고 설명한다. VIP자산운용이 기업에 보내는 주주 제안서는 30~60페이지에 달한다. 내부 밸류업 팀이 작성하는 이 보고서를 그는 '러브레터'라고 부른다.김 대표는 "단순히 배당 늘리라는 요구가 아니다. 승계 구조, M&A 전략, 공장 입지까지 담긴 컨설팅 보고서"라며 "대주주 입장에서도 '이걸 안 받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게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10년 넘게 투자하는 장기 주주로서 기업의 나이테인 재무제표를 분석하고 CEO를 수년간 관찰하며 신뢰를 쌓는다"며 "우리의 판단이 맞았고 시장이 이를 인정해 주가가 레벨업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액티브 펀드의 미래는 참여에 있다"
패시브 자금이 시장을 지배하는 시대에도 그는 액티브 펀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봤다. 그는 "상장지수펀드(ETF)는 기업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액티브 매니저는 기업의 내재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직접 참여한다"며 "이것이 자본시장의 본질적인 정화 작용"이라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그는 주주들에게도 책임 있는 참여를 주문했다. 김 대표는 "주주가 주장하지 않으면 회사는 알아서 변하지 않는다"며 "밸류업 프로그램이 인계점을 넘으려면 소액주주부터 기관까지 모두가 목소리를 내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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