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승연의 타임캡슐] 질문하는 인간· 사유하는 문장 ·노래하는 신도 …'개인의 시대' 열리다

  • 마르틴 루터의 위대한 여정 (9)

 
황승연
[황승연 교수]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말고 덴마크 궁정에 머물라.” 셰익스피어(1564~1616)의 유명한 희곡 ‘햄릿’에 나오는 구절이다. 햄릿은 비텐베르크 학생이었다.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려 했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비텐베르크 대학은 당시에 마르틴 루터가 교수로 활동했던 대단히 특별한 곳이었다. 해외 유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북유럽 출신들이 많았는데 햄릿도 이런 유학생 중 한 명이었다. 셰익스피어가 그린 ‘비텐베르크 학생’은 중세 가톨릭적 질서에서 벗어나서 왕과 교회의 권위를 의심하고, 권위보다 양심을 중시하는 지성을 갖고, 행동보다 성찰을 먼저 하는 인간으로 설정했다. 햄릿이 원치 않지만 갇혀 있게 된 정치 공간이 덴마크 궁정이고, 비텐베르크는 그가 속해야 할 정신적인 공간으로 설정했다. 셰익스피어는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비텐베르크라는 지명 하나로 햄릿의 인간형을 관객들에게 즉시 각인시켰다. 옳고 그름을 내면의 판단으로 결정하려는 고민 많은 인간을 뜻한다.
 
루터 이후 모든 판단의 책임은 개인에게 전가되었다. 삶의 의미를 개인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하나님의 존재도 자유의지로 스스로 찾아야 했다. 그래서 얻은 것이 우울이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우울한 인간형을 그렸다. 자유를 얻은 근대적 인간이 치른 대가였다. 햄릿은 묻는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존재와 죽음에 대해 인간이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명령을 받고 행동하는 중세적 인간에서 질문하고 의심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근대적 인간이 되었다. 현실은 여전히 폭력과 권력과 음모로 움직이는데 인간은 그 위에 윤리와 양심과 성찰을 얹기 시작했다.
 
중세 인간은 편안했다. 세계의 의미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신은 절대적이고 선과 악은 교회가 규정했다. 그러나 루터 이후에 상황은 바뀌었다. 구원의 확신은 교회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과 양심의 문제가 되었다. 신은 존재하지만 침묵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드디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된 것이다. 햄릿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하나님 앞에 서서 루터가 외쳤던 “주여, 여기 제가 서 있나이다”라며 죽음을 무릅쓴 루터의 결단은 세상을 바꾸었지만 인간 모두가 루터가 될 수는 없었다. 바뀐 세상에서도 결단할 수 없는 대다수 인간은 불안과 우울에 빠졌다. 근대 지식인의 초상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그린 인간의 모습이다.
 
작곡가 마르틴 루터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찬송가 585장은 루터가 작사·작곡한 유명한 곡이다. 이 곡은 1527년에서 1529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시편 46편을 바탕으로 가사를 썼다. 당시 루터는 가톨릭교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압박과 동료들의 배신 그리고 유럽을 휩쓸던 페스트의 공포 속에 있었다. 이러한 위협 속에서 신앙적 결단과 보호를 간구하며 이 곡을 지었다.
 
이 곡의 선율을 바흐(Johan Sebastian Bach, 1685~1750)가 자신의 칸타타 80번(BWV 80)에서 화려하게 편곡하였다. 장엄한 합창곡이다. 원래 이 곡은 종교개혁 기념 주일인 매년 10월 마지막 주일에 또 교회가 핍박받거나 성도들이 영적으로 위축된 시기에 힘을 얻기 위해 연주되었다. 가사 중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라는 구절처럼 악의 세력에 맞서는 용기를 북돋울 때 사용된다. 특히 독일의 국가적인 행사나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루터 이전,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예배의 모든 순서는 라틴어로 진행되었다. 신도는 라틴어를 알아듣지 못했기에 음악은 사제와 훈련된 성가대만 부를 수 있었다. 루터는 “하나님 말씀은 사람들의 모국어로 들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찬송가에 독일어를 도입했다. 이는 교회로부터 지식과 구원의 독점권을 빼앗아 신도에게 돌려준 큰 사건이었다. 또 당시 찬송가는 고도의 대위법으로 작곡된 곡들로 전문 성가대원이 아니면 부를 수가 없었다. 음악은 신앙의 도구가 아닌 ‘교회의 위엄을 과시하는 장식’이었다. 가톨릭 예배에서 신도는 침묵해야 했다. 찬양은 제단 근처의 성직자와 성가대석에서만 울려 퍼졌다. 음악적 행위 자체가 권위의 과시였다. 루터는 이를 바꾸고자 하였다. 찬양을 예배의 핵심 요소로 격상시켰다. “성가대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노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명확한 리듬으로 많은 신도들이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작곡했다. 이는 모든 신자가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는 ‘만인사제설’을 청각적으로 증명한 것이었다.
 
가톨릭은 민요와 같은 세속 음악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거룩한 음악’의 형식을 교회가 규정하고 예술적 표현을 제한했다. 루터는 ‘마귀가 모든 아름다운 선율을 독점하게 둘 수 없다’며 당시 유행하던 민요나 세속적인 곡조에 거룩한 가사를 붙이는 방식을 적극 활용했다. 종교적 권위를 깨고 신앙을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결단이었다. 루터는 “음악은 신학 다음으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다. 음악은 영혼을 평온하게 하고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였다. 현재 루터가 작곡한 찬송가가 36곡이 전해 내려온다. 그럼에도 루터가 작곡가인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림은 눈으로 읽는 복음이다
 
루터는 그림을 글을 모르는 서민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는 교육적 수단으로 보았다. 성경 이야기를 상기시킬 목적으로 미술을 적극 권장했다. 그림 자체에 신성한 힘이 있다고 믿는 ‘숭배’는 금지했다. 교황권의 부패를 폭로하고 개신교 신학의 정당성을 알리는 ‘팸플릿’과 ‘삽화’를 대량 생산하게 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궁정 화가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를 만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는 화가이자 비텐베르크 시장을 지낸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루터가 이단자로 몰려 처형되지 않도록 그를 ‘경건한 학자’이자 ‘강인한 개혁가’로 각인시키는 초상화 수십 점을 그려 배포하였다. 루터의 변천사가 크라나흐의 붓으로 완성되었다. 이후 루터와 크라나흐의 협업은 종교개혁의 판을 바꾸었다. 두 사람이 공동 기획한 대표적인 작품은 ‘율법과 복음’이다. 화면을 반으로 나누어 왼쪽에는 율법에 얽매여 지옥으로 떨어지는 인간을, 오른쪽에는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인간을 대조적으로 배치했다.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한 장의 그림으로 완벽하게 정리하여 글을 모르는 서민이 루터의 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또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 크라나흐는 수많은 목판화 삽화를 그려 넣었다. 이는 성경을 대중화하는 데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냈다. 미술이 귀족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매체로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크라나흐는 인쇄소와 서점을 운영하면서 루터의 저작을 보급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가장 친밀한 동지이자 가족 같은 친구였다. 루터는 크라나흐의 자녀에게 세례를 베풀고 크라나흐는 루터의 결혼을 주선하고 증인이 되었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목소리였다면 크라나흐는 그 목소리에 형체를 부여한 인물이었다.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루터의 사상은 그렇게 빠르게 전 유럽으로 확산되기 어려웠다.
 
괴테가 본 마르틴 루터
 
루터는 칸트와 헤겔 같은 철학자들도 탄생시켰다. 칸트, 괴테, 헤겔 등은 각기 다른 길을 갔지만 사용한 핵심 어휘의 뿌리는 공통적으로 루터였다. 괴테는 루터를 가리켜 현대 독일어를 만든 인물이고, 독일어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 인물이고, 독일 민족정신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라 하였다. 괴테가 중요하게 본 것은 그의 신학이 아니라 언어였다. 루터는 독일인의 종교에 영향을 끼친 것보다 독일인의 사고방식을 바꾼 사람이라 하였다.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면서 수많은 라틴어 개념을 독일어로 바꾸어 정착시켰기 때문에 그 단어들로 자연을 설명하고, 예술을 논하고, 인간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괴테는 루터를 읽으며 신앙보다는 문장이 어떻게 숨 쉬는지 배웠다고 했다. 루터가 신 앞에 선 개인의 양심과 책임에 대해 말했다면 괴테는 루터가 말한 개인의 내면적 갈등을 그의 ‘파우스트’에서 그렸다. 괴테는 루터를 독일 역사에서 독일다움을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인물로 보았다. 루터는 독일인의 영혼을 깨웠고 괴테는 그 영혼을 문화로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비텐베르크에 가면 맥주 애호가 루터가 단골이었다는 ‘독수리 주막’이 있다. 이 주막과 함께 있는 Brauhaus Hotel(양조장 호텔) 정문 위에 안내판이 하나 걸려 있다. '볼프강 폰 괴테, 1778년 5월 23일에 다녀감.' 괴테는 루터의 흔적을 찾아 비텐베르크를 순례했다. 루터가 떠난 지 232년이 지난 후였다. 괴테에게 루터는 단순히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독일 문화와 정신의 원천이었다.
 
크라나흐의 그림 마르틴 루터가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벽에는 루터 부모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초상화 아래에는 작게 그린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초상화도 보인다 창문 앞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은 그의 부인 카타리나다 크라나흐는 그림에서 루터의 가정을 평안하고 화목하고 안정적이고 모습을 그렸다 루터 머릿속에 담겼을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크라나흐는 종교개혁의 가정 모습을 그림으로 전하려 했다 비텐베르크 루터 박물관에서 필자가 직접 촬영
[크라나흐의 그림. 마르틴 루터가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벽에는 루터 부모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초상화 아래에는 작게 그린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초상화도 보인다. 창문 앞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여인은 그의 부인 카타리나다. 크라나흐는 그림에서 루터의 가정을 평안하고 화목하고 안정적이고 모습을 그렸다. 루터 머릿속에 담겼을 많은 것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크라나흐는 종교개혁의 가정 모습을 그림으로 전하려 했다. (비텐베르크 루터 박물관에서 필자가 직접 촬영].

                          
1
[비텐베르크 루터 박물관에 전시된 루터가 작곡한 찬송가 악보. (필자가 직접 촬영)]
 
 

황승연 필자 주요 이력
 
▷독일 자르브뤼켄 대학교 사회학 박사 ▷전 경희대 ㈜데이콤 공동 정보사회연구소장 ▷전 한반도 정보화추진본부 지역정보화기획단장 ▷경희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굿소사이어티 조사연구소 대표 ▷상속세제 개혁포럼 대표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댓글0
0 / 300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