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준의 Indonesia Story] 400만 가사노동자 보호법…인니, 복지국가 향한 출발점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교수
[김형준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네덜란드 식민 지배의 영향을 받은 인도네시아의 법체계는 기본적으로 대륙법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문법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우리와 유사하지만, 법체계 구성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국가법과 함께 이슬람법 및 관습법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각각의 법의 적용 영역이 상당 부분 분리되고, 법 운용 관행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다원적 법체계가 현실에서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물론 상속이나 토지 문제처럼 서로 다른 법리가 동시에 적용될 수 있는 경우나 기존 관행으로 해결하기 힘든 독특한 상황이 나타날 경우에는 법적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별 법률 체계를 가로지르는 절충과 타협을 통해 문제가 해결된다.

다원적 법체계에 추가하여 인도네시아 일반법에는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는 주술적 행위이다. 인도네시아 형법 제252조는 초자연적 능력을 보유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통해 타인에게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준 사람을 처벌하도록 규정한다. 초자연적 능력의 존재 여부나 주술과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입증 대상으로 삼지 않기에 이 조항은 무속인의 행위를 사기죄로 처벌하는 우리의 법적 관행과 유사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형법 조문에 ‘흑주술’과 같은 표현이 삽입되었음은 우리와 차이 나는 법 정서를 보여준다.

최근 국회를 통과한 가사 노동자 보호법 역시 인도네시아 사회의 특수성을 드러낸다. 이 법안에서 말하는 가사 노동자는 시간제 가사도우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입주하는 형식으로 고용되어 집안일 전반을 담당하는 도우미 역시 포함되는데, 과거 우리식 표현을 빌자면 가정부라 할 수 있다. 이전에 비해 그 규모는 감소하고 있지만, 국제노동기구(ILO)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수는 4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가사 노동자가 인도네시아인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가사 노동자의 상황을 하나의 모습으로 정형화할 수는 없지만, 인도네시아 사회에는 이들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가 존재한다. 이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어린 여성으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 지역 출신이다. 이들은 이웃의 소개를 통해 아무 연고가 없는 대도시로 이주하여 중산층 가정에 입주한다. 이곳에서 저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을 통해 온갖 집안일을 전담한다. 자신을 보호할 마땅한 수단을 갖지 못한 채 이들은 고용주의 호의와 선의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대도시 중산층 가정의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외부인이 가사 노동자의 존재를 가장 쉽게 알아챌 수 있는 공간은 쇼핑몰이다. 잘 차려입고 쇼핑몰을 활보하는 여성의 뒤를 유니폼과 비슷한 옷차림새를 하고 아이를 안은 채 따라다니는 젊은 여성이 가사 노동자이다. 고급 음식점에서는 이들이 일하는 가정의 상황을 일부나마 추정할 수 있다. 고용주 가족이 식사하는 동안, 식당 한쪽 구석에 홀로 앉아 대기하는 모습은 이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고용주와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할 수 있을지 질문하게 만든다.
오늘날에는 잘 사용되지 않지만, 과거 가사 노동자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물건은 자물쇠가 달린 냉장고였다. 이들이 임의로 음식을 꺼내 먹지 못하도록 설치된 것이다. 이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는 계속 이어진다. 부엌 한구석에 잠자리 공간을 마련해주었다거나, 여행에 동행한 가사 노동자를 욕조에서 재웠다는 식의 이야기, 먹고 남은 음식을 제공하거나 외출을 제한한다는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스토리는 가사 노동자가 놓인 노동관계가 구조적으로 고용주에게 유리하게 형성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을 보호할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대해 상당수 인도네시아 사회 구성원은 공감을 표한다. 그럼에도, 가사 노동자 관련 담론이 이들의 열악한 현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고용주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이야기 역시 담론의 한 축을 구성하며, 이는 가사 노동자 중심의 서사와 다른 결을 지닌다.

중산층 사용주가 자주 거론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일종의 성공 신화이다.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농촌 출신의 여성이 고용주의 도움을 통해 도시 생활과 사회 질서를 배우며 점차 독립적인 시민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고향에 돌아가 가정을 꾸리거나 사업을 시작했다는 식의 스토리는 가장 이상적인 서사로 제시된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고용주는 선의와 배려를 아낌없이 베푸는 존재로 묘사되며, 양자의 관계 역시 단순한 고용 관계를 넘어선 인간적 유대 관계임이 강조된다.

사용주가 거론하는 또 다른 서사는 가사 노동자가 고용주를 위태로운 상황에 빠뜨릴 수 있다는 두려움과 연결된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소문이다. 고용주에게 불만을 품은 가사 노동자가 이웃이나 지역사회에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려 고용주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배신의 문제 역시 빈번하게 언급된다. 정성을 들여 가르치고 잘 대해주었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다른 집으로 떠나버려 고용주를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존의 관계가 호의, 연민, 감사와 같은 개인적 감정에 의존해 유지되었다면, 새롭게 추진된 가사 노동자 보호법은 이를 공적·제도적 관계로 전환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가사 노동자 지원 시민단체는 2000년대 초반부터 관련 법안 제정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다.

가사 노동자 보호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많은 정치인이 이를 환영했으며, 가사 노동자를 공식 노동 부문의 구성원으로 전환할 계기가 마련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수사와 달리, 법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 실효성을 둘러싼 의문이 제기된다.

가사 노동자 보호를 위한 기본 원칙이 제시된 제2조는 이 법안의 한계를 예시한다. 해당 조항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원칙은 ‘가족적 정서’이며, 법적 명확성은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고용주와 가사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여전히 근대적 노동 계약보다는 개인적·도덕적 관계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시간 규정 역시 논란의 대상이 된다. 법안 논의 과정에서 하루 8시간의 휴식 시간 보장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지만, 최종안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신 법안에는 인간적인 노동시간과 휴식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표현만이 삽입되었다. 달리 말하면, 피고용자가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는 한 24시간 노동 관행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임금 조항에도 유사한 문제가 드러난다. 공식 부문 노동자를 대상으로 지역별 최저임금 제도가 시행되고 있음에도, 가사 노동자의 임금은 사용주와의 합의에 따라 결정하도록 규정되었다. 2023년 인도네시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자카르타 가사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200만 루피아(대략 17만원) 수준으로 지역 최저임금의 약 40%에 해당했다. 반면, 지역 최저임금의 15%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 45만 루피아(대략 3만5000원) 정도만이 지급되는 지역도 상당수 존재했다. 이러한 격차는 가사 노동자의 임금이 사용주의 재량에 의존함을 지적한다. 새로운 법안이 시정했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러한 구조적 문제였지만, 최종안은 기존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가사 노동자의 업무와 의무를 규정하는 조항 역시 권리 보호의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법안은 가사 노동자의 업무 범위를 사실상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로 폭넓게 설정한다. 게다가 노동자가 일을 그만두기 최소 한 달 전 고용주에게 그 의사를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 규정이 추가되었다. 계약 관계에 기반한 노동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일정 부분 합리성을 가진 조항이다. 그러나 이는 가사 노동자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릴 수 있다는 고용주의 불안을 제도적으로 해소하려는 방안으로 이해될 수 있다.

새로운 법안이 단순히 퇴행적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며, 이전에는 고려되지 못한 진일보한 조항 역시 포함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가사 노동자를 국가 의료보험 및 사회보장 체계에 편입시키고, 그 비용을 정부가 전액 부담하도록 한 규정을 들 수 있다. 가사 노동자를 국가가 보호해야 할 공식 노동자로 정의했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전환점이라 평가될 수 있다.

가사 노동자 보호 법안의 제정은 인도네시아 정부가 추진 중인 복지 확대 기조와 맞물려 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학생과 임산부 대상 무상급식, 저가 주택 공급, 협동조합 설립 등을 핵심 어젠다로 설정하여 추진하고 있으며, 빈곤층에 대한 현물 및 현금 지원이 포함된 이전 정부의 복지 정책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복지국가적 전환이 구체적인 사회적 성과로 이어질지, 혹은 단기적 포퓰리즘에 머물지를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정책이 사회적 약자의 삶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주목할 문제는 이러한 정책을 뒷받침할 재정적 부담을 인도네시아 경제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그리고 지속적인 성장이 계속될 수 있는가이다.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인류학과(학사·석사 수료) ▷호주국립대학(박사)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전 강원대 사회과학원 원장 ▷전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인도네시아 팟자드자란 대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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