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지방선거에서 드러난 투표용지 부족 사태는 단순한 현장 실수가 아니었다. 선거 관리 체계 전체의 허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투표용지가 부족해 유권자들이 길게 줄을 서고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중단되거나 마감 시간이 연장됐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선거 준비물조차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사고 이후 드러난 선거 관리 시스템의 총체적 부실이다.
송파구 선관위는 선거 당일 오전 11시 40분께 이미 투표용지 부족 가능성을 인지하고 서울시 선관위에 대응 방안을 문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선관위 내부에서는 오전부터 위험 신호가 감지되고 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정보는 행정안전부 선거상황실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송파구청 역시 선관위에만 상황을 보고했을 뿐 다른 기관과는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행정안전부가 관련 사실을 파악한 시점은 언론 보도가 나온 이후인 오후 5시 20분께였다.
중앙선관위와 시도선관위,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모두 상황실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정보는 기관 사이를 넘나들지 못했다. 위기 징후는 있었고 보고 체계도 있었지만 아무도 전체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선거 관리 기관들이 각각 자기 영역 안에서만 움직이다가 결국 사고를 키운 것이다. 전형적인 칸막이 행정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 대상이 일반 행정 업무가 아니라 국민의 참정권이었다는 점이다.
선관위는 그동안 헌법기관이라는 독립성을 강조해 왔다. 선거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돼야 한다는 원칙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다. 문제는 독립성이 책임 회피의 명분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기관이라고 해서 실패에 대한 책임까지 면제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막강한 권한을 가진 만큼 더 높은 수준의 책임과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번 사태에서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투표용지가 부족해졌고 선거 관리에 혼란이 발생했는데도 명확한 책임자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권에서 강도 높은 비판이 나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선관위에 대해 "해체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특검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부산 북갑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한동훈 의원은 중앙선관위에 대한 감사원 직무감찰을 허용하는 감사원법 개정안을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선관위가 사실상 외부 감시를 받지 않는 성역으로 운영되면서 무능과 오만이 누적됐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이번 사태는 투표용지 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준비 부족, 위기 대응 실패, 기관 간 소통 부재, 책임 회피 문화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다. 투표용지 한 장의 문제가 아니라 선거 관리 시스템 전체의 문제인 셈이다.
이제는 미봉책으로 넘어갈 단계가 아니다. 투표용지 인쇄 기준과 공급 체계는 물론이고 선거 당일 위기 대응 매뉴얼, 기관 간 정보 공유 시스템, 선관위 내부 의사결정 구조까지 전면 재점검해야 한다. 비상임·겸임 체제로 운영되는 선관위원장 제도 역시 재검토 대상이다. 독립성은 유지하되 책임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의 제도 개혁도 필요하다.
선관위는 지금 조직의 체면을 지킬 때가 아니다.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고 책임질 사람은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헌법기관이 국민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자세다.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간다면 선관위를 향한 개혁 요구는 더 거세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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