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인간이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제시했다면, 맹자와 순자는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본래 선한 존재인가, 아니면 욕망에 끌리는 존재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이해는 곧 정치에 대한 이해였고, 교육에 대한 이해였으며,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였다. 인간이 본래 선하다면 정치의 역할은 그 선함을 꽃피우도록 돕는 데 있을 것이고, 인간이 본래 욕망에 흔들리는 존재라면 법과 제도로 이를 통제해야 할 것이다. 결국 맹자와 순자의 논쟁은 동아시아 정치철학의 출발점이 되었으며, 오늘날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교육과 경영의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맹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진 사상가였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유명한 성선설이다. 맹자는 어느 날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다면 누구나 놀라고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 마음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이다. 맹자는 바로 이 마음 속에 인간의 본성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마음속에 네 가지 선한 싹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은 인(仁)의 시작이고, 옳지 못한 일을 부끄러워하는 수오지심은 의(義)의 시작이며, 양보하고 배려하는 사양지심은 예(禮)의 시작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비지심은 지(智)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맹자는 이것을 사단(四端)이라 불렀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선한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교육과 수양을 통해 그것을 키워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국민주권, 복지국가, 인간 존엄성의 개념 속에는 맹자의 사상이 적지 않게 녹아 있다. 물론 제도적 민주주의는 서양에서 발전했지만, 백성을 국가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민본사상은 이미 오래전 동양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맹자는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라 인류 정치사상사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순자는 인간을 보다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전국시대 말기의 치열한 현실을 경험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다. 재물을 탐하고 권력을 원하며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이러한 욕망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성악설이다.
그러나 순자의 성악설을 단순히 인간을 부정적으로 본 사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순자가 말한 악은 범죄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적절하게 다스리지 못하면 갈등과 혼란이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과 훈련이며, 사회에는 법과 제도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순자는 특히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간은 태어날 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배우고 수양해야 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그는 "배우지 않으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며 후천적 교육의 힘을 강조했다. 이러한 순자의 현실주의는 훗날 중국의 법가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진나라를 통일국가로 만든 한비자와 이사 역시 순자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들이다. 맹자가 인간의 양심을 믿었다면 순자는 제도의 힘을 믿었다. 맹자가 도덕의 철학자였다면 순자는 질서의 철학자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성공한 국가와 조직들은 대부분 맹자와 순자의 철학을 함께 활용해 왔다는 점이다. 국민을 믿지 않는 국가는 독재로 흐르기 쉽고, 법과 제도가 없는 국가는 무질서에 빠지기 쉽다. 기업 역시 마찬가지다. 구성원을 존중하고 신뢰해야 하지만 동시에 공정한 평가와 명확한 규율도 필요하다. 학교도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기본적인 규범과 책임을 가르쳐야 한다. 결국 건강한 공동체는 맹자의 이상주의와 순자의 현실주의가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또 다른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유교는 단순히 인간의 선함만을 말하지도 않았고 인간의 악함만을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맹자는 인간 안에 있는 희망을 보았고, 순자는 인간 안에 있는 위험을 보았다. 그리고 이 두 시선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를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두 개의 창이었다.
유교의 핵심 경전 가운데 하나인 《중용》은 바로 이러한 균형의 정신을 강조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인간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성선설과 성악설의 오랜 논쟁도 결국은 중용의 철학 속에서 하나의 완성된 그림을 이루게 된다. 인간은 선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욕망을 가진 존재이며, 그래서 교육과 수양이 필요하고 동시에 제도와 법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공지능과 디지털 혁명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인간의 능력을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AI는 계산할 수 있지만 양심을 가질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예측할 수 있지만 도덕적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초지능이 등장하더라도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결국 신뢰와 책임, 양심과 절제라는 오래된 가치들일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맹자와 순자는 오늘날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맹자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라고 말하고, 순자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맹자는 따뜻한 가슴을 강조하고, 순자는 냉철한 제도를 강조한다. 그리고 《중용》은 이 둘을 조화롭게 통합하라고 가르친다. 어쩌면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 역시 기술의 발전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2500년 전 중국 대륙에서 시작된 맹자와 순자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정치 속에 있고, 교육 속에 있으며, 기업 경영 속에 있고, 가정과 공동체 속에도 살아 있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질문은 결국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유교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인간은 끊임없는 수양과 성찰을 통해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공자가 길을 열고, 맹자가 희망을 심고, 순자가 질서를 세웠다면, 그 위에서 꽃핀 동아시아 문명의 정신은 결국 인간의 품격이었다. 나라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품격이고, 기술의 발전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도덕이며, 권력의 강함보다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책임이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을 이 진실을 맹자와 순자는 2500년 전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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