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공모가 지난 7월 1일 시작되었다. 하지만 관장이 누가 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제도가 문제라는 사실은 이미 여러 곳에서 확인되고 지적해 왔다. 이런 제도의 문제는 하나가 아니라 서로 얽히고설켜 최소 열 갈래 이상으로 엮여 있지만 사안의 경중과 난이도는 모두 다르다. 그래서 쉬운 것이 아닌, 법인화 같은 근본 처방만 외치면 논의는 공허해지고, 반대로 근본을 회피하고 손쉬운 관장 교체 같은 무늬 교체만의 처방을 반복하면 문제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 이것이 최소 3년마다 관장이 바뀌었지만, 모두 허수아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립문화예술기관이 지닌 모든 문제점을 모두 지닌 기관이다. 서울관 개관 이후 허우대는 제법 멀쩡해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총체적으로 곪아 있다.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의 현재를 가감 없이 드러내 우선 쉬운 단계의 치료 즉 내규 개정만으로 개선이 가능한 사안을 시작으로 두 번째 조직 설계와 평가 체계 자체를 재설계해야 할 사안 그리고 세 번째 정부조직법과 시행령 개정을 통해 개선이 가능한 문제 그리고 최종적으로 입법 또는 법률 개정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으로 구분해서 살펴봄으로써 관장직에 도전장을 내민 이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1단계: 내규 개정만으로 즉각 개선이 가능한 것들-공모제
우선 가장 쉽게 문제를 고칠 수 있는 것은 법 개정 없이 운영 방침만 바꾸면 되는 것들이다. 우리가 김영삼 정부부터 지금까지 줄곧 ‘개혁’을 외쳤건만 국립현대미술관의 고착화된 적폐는 여전하다. 비교적 쉬운 내규 개정을 통한 개혁은 비용 부담도, 정치적 저항도 거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개선되지 않은 이유는 무관심 또는 관성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우선 문제는 관장 공모의 ‘밀실성’이다. 지금까지 공모에 응한 이가 누군지 알려진 적이 없다. 카더라 통신이 전하는 추측이 전부였다. 누가 공모에 응했는지 비밀이지만, 심사위원도 비공개다. 관장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이를 가려야 할 심사위원도 관장을 선발할 지식과 역량을 갖추어야 할 터인데,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이렇듯 누군지도 모르는 심사위원들이 책임없이 권한만 행사한다.
특히 공모제는 실력 있는 인재일수록 나서는 것을 꺼려, 이것이 진입장벽이 되어 자리가 열려도 필요한 사람이 오지 않는다. 따라서 후보 공개와 공개 직무수행계획서 발표 등을 한다면 오히려 전문가들이 소신껏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 크게 흠결이 없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소신껏 관장의 책무를 다할 사람을 선발하는 것이 공모제의 목적일 터인데 실제로는 그 정반대로 가고 있다.
후보 공개와 비전 발표를 도입하는 것은 입법이 필요 없다. 대통령령과 문화부령을 고치면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책임운영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장을 뽑을 때마다 극심한 진통과 잡음, 그리고 임명권자와 임명된 사람만 수긍하는 것은, 관장 선임 과정에서 드러난 제도적 한계와 밀실 행정 때문이다.
선발 과정이 이렇다 보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정 성향의 인사가 이미 낙점되었다는 ‘내정설’과 ‘코드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엄정해야 할 공모제가 실은 권력층에서 정해놓은 인물을 합법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언제나 있었다. 이래서 미술계에서 오랫동안 일로 실력을 입증한 경력있는 이들이 관료 중심의 심사대에 스스로 오르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된다. 그래서 공모제는 이런 방법으로 유능한 인재를 제거(?)하고 자기 사람을 쉽게 앉히기 위한 제도라는 비난을 받는다. '자리는 열렸으되 인재는 오지 않는' 모순 속에 ‘적격자 없음’이라는 파행과 수개월간의 수장 공백 사태가 반복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다.
모든 파행의 중심에는 현장의 소리를 철저히 외면한 관료 주도의 하향식 의사결정 구조 때문이다. 내부 구성원인 학예연구직이나 현장 미술인들의 여론이 반영될 통로는 원천 차단되어있다. 하지만 이제는 관료주의의 고집을 꺾고 변해야 한다. 정부는 무늬만 공모제인 현행 제도를 과감히 폐기하고, 미술계 전문가들로 독립적인 ‘추천위원회’를 구성해 추천과 임명을 혼합하는 제도를 적극 도입할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물론 이런 제도 도입 시 현재의 공모제 시스템을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채용 트랙을 만드는 것이라 상위 법령인 책임운영기관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이나 국가공무원법 시행령의 개정이 필요하다. 아무튼 현장과 격리된 미술관에 미래는 없다.
인사권도 작품수집심의권도 없는 관장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이 인사권이 없다면 누가 믿을까. 그런데 실제로 미술관장은 인사권이 없는 대표적인 ‘바지사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인사위원회 위원장은 ‘관장’이 아닌 문화부 관료로 전보인사 즉 순환보직의 형태로 오고 가는 ‘기획운영단장’이다. 직급은 고위공무원단 나급(일반직 2~3급 상당의 이사관·부이사관급)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고위공무원단 공모 직위다. 문화부 공무원뿐만 아니라 타 부처의 공무원 중 고위공무원단에 속하면 누구나 공개경쟁을 통해 지원하고 임명되는 자리이다. 관장의 인사권은 이미 20년 전인 2006년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면서 사라졌다. 미술관은 문화부 소속기관이라 소속 학예연구사와 직원은 국가공무원법과 공무원임용령 체계 안에서 채용하는, 관장이 필요한 사람을 그때그때 뽑아 쓸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채용시험 공고와 심사를 미술관 자체 인사위원회에서 심의·의결하는 형식적 자율성은 있지만, 인사위원장이 관장이 아니라 문화부에서 나온 기획운영단장이고, 위원 또한 기획운영단장이 지명하도록 하고 있어 실질적인 인사의 실권은 단장이 행사한다.
게다가 2013년 서울관이 개관하면서 3급 부이사관 사무국장을 2급(이사관)으로 격상시켜, 명칭도 ‘기획운영단장’으로 변경해 고위공무원단에 편입시킴으로써 기획운영단장이 관장과 같은 직급인 고위공무원단 나급(2급 상당)이 되어 기형적인 ‘2인 관장제’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이런 부조리한 직제는 미술계의 계속되는 지적으로 2020년 관장직이 고위공무원단 가급(1급 상당)으로 변경될 때까지 약 7년간 관장은 실질적으로 두 명이었다. 당시 사무국장의 직급을 상향했던 이유는 서울관이 새로 생겨 관리해야 할 업무·인력·예산이 커져, 이를 관장할 행정조직도 확대·격상할 필요가 있다는 논리를 펼쳤지만, 문화부에서 나온 공무원들 숫자보다 학예연구직이 약 50여명 이상 늘었는데도 불구하고, 학예연구실장의 직급과 직위는 그대로 두었다.
사실 학에연구실과 실장의 직급과 직위는 1986년 학예연구실이 신설되면서 실장 직급은 학예연구관 또는 별정 4급으로 출발한 이후 2004년 11월 직제개정을 통해 전시과가 폐지되고 전시·작품수집·기증 권한이 학예연구실로 이관되었지만, 업무만 이관되고 지위는 승격되지 않았다. 따라서 2026년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학예연구실장의 직급과 직위는 그대로이다. 이는 약 40년 동안 문화부 장관을 비롯한 문화부 인사라인 그리고 미술관의 사무국장과 기획운영단장들이 ‘놀았다’고 하지 않고서는 설명이 안 되는 일이다.
국립현대미술관장의 인사권은 규정상 이중으로 제한돼 있다. 첫째, 고위직 인사 즉 학예연구실장이나 각 과장에 대해서는 애초에 임용권 자체가 관장에게 없다. 둘째, 관장이 임용권을 갖는 4급 이하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도 인사위원회를 거쳐야 하는데 그 위원장은 관장이 아닌 기획운영단장이다. 또 정원 조정이나 조직 개편 같은 사안은 문화부 장관의 승인을 받아야해 관장은 미술관의 대표자이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결국 관장 개인 또는 기관이 필요한 하위직 인력조차 재량껏 선발하고 배치할 권한이 제도적으로 거의 없는 구조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바지’이다.
이런 부조리는 어제오늘이 아닌 2015년 6월 1일 ‘국립현대미술관 기본운영규정’을 전격 개정되면서 시작되어, 기형적인 관료주의 독점 구조는 9년이 지난 2024년 12월 폐지는커녕 되려 강화되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모두 앞으로 나갈 때 미술관만 뒷걸음친 것이다. 권한도 많은 문화부 관료들이 관장을 제치고 미술관 인사권까지 장악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규정은 ‘내규’로 문화부가, 즉 장관이 의지만 있다면 즉시 개정이 가능하다. 따라서 미루지 말고 오늘이라도 알았다면 빨리 바로 잡아야 한다.
미술관장은 2015년 인사권뿐만 아니라 미술관의 핵심인 미술품 ‘구입’과 ‘기증’을 최종 결정 하는 ‘작품수집심의위원회’ 위원장직도 박탈당했다. 이는 수년 전 어느 관장이 작품 수집에 전횡을 행사하면서 이를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도입했다. 이후 작품수집심의의 최종 권한은 외부인사에게 넘어갔다. 내부의 관장은 믿지 못하지만, 책임없는 외부인사는 믿을 수 있어 위원장을 맡기는 일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이후 관장은 위원장은커녕 심의위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박물관학, 미술사학계의 말도 안 되는 일이란 지적에 문화부와 미술관은 작품 구입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려는 조치로, 관장의 번거로운 행정 부담을 덜어주고 창의적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관장을 돕기 위한 조치라고 항변했다.
일련의 관장을 허수아비를 만드는 규정 개정은 당시 관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직위 해제를 당해 관장이 공석일 때 문화부에서 나온 기획운영단장이 관장직무대리를 맡아 전격 추진되었다. 이때 미술관장의 옥쇄와 같은 핵심 권한인 ‘인사권’과 ‘작품 수집권’을 동시에 박탈당했고, 예산과 인사권은 행정직인 단장에게 귀속되어 관장은 결재만 하는 ‘결재맨’으로 전락했다. 이후 관장의 조직 장악력과 정책 추진력은 크게 약화했고, 미술관 조직은 전문성을 기반으로 한 ‘학예연구실’과 행정 및 기획, 인사 예산을 쥐고 있는 문화부 공무원 중심의 ‘기획운영단’으로 이원화되어, 행정이나 경영의 경험이 없는 미술분야만 아는 이가 관장으로 임명되어 행정 관료 조직을 통제하기 어려운 구조적 모순에 빠져 들어갔다.
관장은 바지, 학예연구실장은 식물
비극은 관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미술관의 핵심인 학예연구실 역시 기형적 직제로 인해 신음하고 있다. 현재 학예연구실장 직급은 4급 상당의 전문임기제(계약직)인데, 그 수하의 과장들 역시 4급 정규직 학예연구관이다. 이런 불합리한 직제를 직급 상향과 임기 장기화를 통해 바로 잡아 달라는 청을 40여 년 전부터 박물관학계와 미술계는 줄기차게 해 왔지만, 세상이 모두 바뀐 지금까지 어떤 변화도 없다. 현재 학예연구실의 조직 규모나 업무를 보면 연구실장의 직급 상향의 근거는 차고 넘친다. 우선 학예연구실에는 연구기획과·전시과·소장품자료과·미술관교육과·근대미술팀 등 5개 과에 과천관·청주관까지 실질적으로 7개 과가 있다. 또 단장직 조건 유지를 위해 기획운영단에 배속된 학예직 중심의 작품보존·미술은행과를 합하면 9개의 학예관련 조직이다. 그리고 여기에 미술관의 전문경력직을 포함하면 약 70~75명에 달한다.
정부조직법과 행정학에 의하면 조직의 기본 원칙은 3~4개의 과가 모여 1개국을 구성하는 것이 조직 설계의 표준이다. 따라서 이에 의하면 학예연구실은 2개국을 편성하고도 남는다. 따라서 학예연구실을 기준에 맞게 개편하면 학예연구실장의 직급 상향도 가능하며 조건도 차고 넘친다.
반면에 문화부에서 나온 국립현대미술관의 일반행정직은 관장을 포함해도 50여명 수준으로 학예연구실보다 20여 명이 작다. 하지만 지금처럼 학예연구직까지 단장 밑에 배속시켜 5개 과를 유지하면서 기획운영단장을 '일반직 고위공무원단 나등급(구 일반직 2급·국장급 상당)'이, 학예연구실장은 ‘전문임기제 가급’ 즉 4급 서기관, 과장급에 보임하는 것은 불공정 그 자체이며 미술관의 힘의 균형을 파괴해 기획운영단장 아래에 두려는 속셈이다.
여기에 학예연구실 소속 과장들은 실장과 같은 직급인 ‘4급 동격’의 모순 속에서 조직 체계가 제대로 작동될 리 없다. 임기 3년의 떠돌이 시한부 계약직 실장이 평생 정년이 보장된 같은 직급의 학예연구직 과장을 통솔하는 ‘직급의 모순’을 넘어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게다가 실질적인 인사권과 예산마저 기획운영단장에게 쏠려 있으니, 학예실 내부 조직원들이 실장의 지휘에 따르기보다 행정 라인에 줄을 서는 조직의 기형화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무적으로 업무량과 조직, 인원을 보면 학예연구실장의 고위공무원단 나급 편제는 충분히 근거가 있는 요구이자 주장이다. 그러나 직급 상향 등 조직 개편이 수십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데는 몇 가지 견고한 구조적 벽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벽은 고위공무원단 정원의 절대 부족이다.
문화체육관광부 내 연구직 고위공무원단 정원은 모두 총 12명 안팎에 불과하다. 이 귀한 자리는 이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 교육문화교류단장(복수직)을 비롯해 국립경주박물관장, 국립광주박물관장, 국립전주박물관장, 국립대구박물관장, 국립민속박물관장, 국립국악원장, 국악원 국악연수실장, 국립국어원장과 국어연구원의 기획연수부장 등 핵심 기관의 수장급 보직에 빠짐없이 배분되어 있다.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고위공무원단에 편입시키려면 문화부의 고위공무원단 정원을 하나 줄여 미술관에 양보하거나, 타 기관의 정원을 가져오는 방법, 그다음 행정안전부를 설득해 고위공무원단 직위 자체를 새로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는 행정안전부의 까다로운 조직진단과 기획재정부의 철저한 예산 협의를 동시에 거쳐야 한다.
결국 미술관 학예실의 직급 격상은 문체부라는 한 부처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행정부 전체의 거대한 직제 장벽에 막혀 있다. 그렇지만 더 문제인 것은 지금까지 미술관의 기획운영단장도 문화부도 이를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견리망의(堅利妄意) 그 자체다.
게다가 학예연구실장직 자체가 애당초 정규 고위공무원단 트랙과 다른 길로 설계됐다는 점 또한 발목을 잡는다. 규정상 학예연구실장은 ‘전문임기제 가급’으로 보하도록 하고 있어, 급여 수준은 고위직에 준하지만, 신분적으로는 계약직에 가까운 별도의 채용 경로를 택하고 있다.
박물관학계와 미술계에서는 총정원이 150여명 규모로 커진 국립현대미술관의 조직이 수십 년 전 설계 그대로 고정된 것을 문제 삼으며, 학예연구실장을 일반학예직 2급이나 고위공무원단 나급으로 복수직화해서 내부 승진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런 트랙 전환은 단순한 직급 표기 변경이 아니라 채용 방식과 신분 자체를 고치는 일이라 문화부 내부에서도 쉽게 손대기 어려운 사안이다. 하지만 이 일이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닌 문화부 자체 직제와 관련된 일이었다면 그들은 결코 지금처럼 방치해 두진 않았을 것이다.
더 근본적인 역설은 조직개편안을 실질적으로 입안하는 권한 자체가 다름 아닌 기획운영단장에게 있다는 점이다. 인사와 예산을 총괄하는 부서가 기획운영단이기 때문에 학예연구실장을 자신과 동급인 고위공무원단 나급으로 격상시키는 안 역시 기획운영단장이 마음의 결정을 해야 문화부에 상정될 수 있다. 자신과 대등한 자리를 만드는 개편, 경우에 따라 문화부의 공무원 조직에 손을 대야 가능한 일을 스스로 설계해야 하는 구조적 이해 상충이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돌리고 돌려 말했지만, 실은 학예연구실이 확대되어 기획운영단과 동격이 되는 것 자체를 문화부의 행정직 공무원들은 꺼린다. 미술관의 조직이 강화될수록 자신들이 부리고 다루는 일이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개편을, 혁신을 가로막는 실제 원인이다. 걸림돌은 또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총액인건비제로 운영되는 책임운영기관이라, 고위직 정원을 새로 만들려면 다른 자리의 정원을 줄이거나 별도로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승급된 학예연구실장의 인건비를 포함한 예산 총액을 증액해야 한다. 따라서 정권마다 예산 우선순위가 바뀌는 상황에서 학예실장의 승급 문제는 늘 후 순위로 밀렸고, 문화부도 자기 일이 아닌 까닭에 신경을 쓰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미술관은 개관 이후 지금까지, 기형적인 조직의 늪에 빠져 있다. 그러나 행정안전부의 경직된 조직 관리를 구실삼아, 문화부가 손을 놓고 있는 이 모순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다.
2단계: 제도적 설계가 필요한 혁신-사라진 승진 사다리
두 번째 단계는 내규를 넘어 조직 설계와 평가 체계 자체를 재설계해야 하는 과제가 있다. 법 개정까지는 아니어도 해당기관간 상당한 협의와 시행령 등의 정비가 필요하다.
우선 중요한 것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내부 승진의 사다리를 마련하는 일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학예연구사에서 학예연구관, 실장, 관장으로 이어지는 내부 승진 경로가 작동해 관장과 학예연구실장의 통솔력이 작동한다. 반면 미술관은 관장과 실장은 모두 외부 임기제로 공모를 통해 부임하며 3년짜리 ‘임시직’인지라 승진 사다리가 없다. 만약 내부에서 학예연구실장직에 도전하려면 사표를 내고 나와야 가능하다.
따라서 오를 정점이 없는 정규직은 오직 신분 유지에만 최적화되고, 인사나 승진에 관여할 수 있는 관문 권력이 없는 실장은 같은 직급의 과장들은 물론 수하 학예사와 일하는 수단은 ‘설득’ 외에 방법이 없다. 따라서 승진 사다리를 되살리고, 심사에 관장 및 학예연구실장의 평가는 물론 외부 인사와 동료들이 평가하는, 다면평가 체제를 통해 특정 학연이나 전공자들이 돌아가며 자리를 맡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래야 사다리 복원이 또 다른 형태의 폐쇄적 인맥 구조로 전락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의 뉴 뮤지엄의 경우 2006년 학예연구사로 입사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Massimiliano Gioni, 1973~)가 2014년 우리의 학예연구실장과 같은 예술 감독을, 그리고 2026년 7월에 차기 관장으로 임명되어 2026년 8월부터 취임할 예정이란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장 임기 확장
관장 임기도 최소한 5년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전시 하나를 하려면 통상 2년 전부터 준비하는데, 3년 임기로는 전임자가 기획한 전시만 마무리하다 임기를 마치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다음 관장도 마찬가지로 ‘남의 자식’만 키우다 갈 수밖에 없다.미술관의 정체성 즉 특징은 장기적인 소장품 수집 정책과 중장기 연구를 통해 구축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 주요 국내외 미술관과의 공동 기획전시나 대형전시 또는 작품대여를 논의하는 국제적인 네트워킹도 약화 될 수밖에 없다.
국립미술관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관장 임기 연장과 함께 필수적으로 국가재정법상 1년 단위의 회계연도를 ‘다년도 예산 편성권’으로 보완해야 한다. 단년도 예산 원칙은 장기적인 프로젝트 추진이 불가능하기해, 이런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금화, 계속비 제도 도입 및 독립 법인화 전환이 시급하다.
무책임한 책임운영기관
살펴본 것처럼 국립현대미술관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책임운영기관제’이다. 우선 책임운영기관으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의 평가 체계를 중장기 성과 중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입장료 등 자체 수입이 국고로 들어가는 구조에서는 수익을 내도 미술관이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성과 평가는 되려 관람객 수 같은 정량 지표에 의존하는 역설은 시정되어야 한다. 많이 벌어도 쓰지 못하는데, 평가는 얼마나 벌었는지로 받는 격이다. 따라서 평가위원회는 외부 전문가와 시민으로 구성해 부처의 평가 자체를 검증받게 해야 이런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다. 과제들은 1단계보다 이해관계자가 많고 조율이 필요하지만, 여전히 법률 개정 없이 시행령과 내부 규정 정비로 가능한 영역에 속한다.정부는 책임운영기관제를 통해 미술관에 행정과 재정의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말하지만, 실상 ‘자율’은 이름뿐이고 예산과 인력 그리고 인사권은 여전히 정부 즉 문화부가 틀어쥐고 있다. 그 결과 미술관은 기업식 수익성 평가에 내몰려 서서히 상업화되고 황폐해지면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지지 않는, 책임운영기관이 되고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줬다 뺏는' 예산 구조다. 책임운영기관은 입장료나 아트숍 수익 같은 자체 수입을 늘리면 이를 다시 미술관 예산으로 투입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되려 미술관이 수입을 많이 올리면 기획재정부는 그만큼 내년 정부 지원금 즉 예산을 삭감한다. 또 예산 절감을 위해 입장료 수입이 많은 대중적인 전시를 기획할 것을 주문한다. 따라서 이런 제도를 결국 미술관이 아무리 애써 돈을 벌어도 총예산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는 허탈한 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자율성을 준다면서 성과의 과실은 다시 정부가 거둬들이는 이 구조야말로 제도의 모순이다.
또 다른 문제는 미술관을 놀이공원처럼 만드는 평가 기준이다. 행정안전부가 매년 실시하는 책임운영기관 평가는 고객만족도, 관람객 수, 자체 수입 확보율 등 철저히 계량화된 지표에 치중되어 있다. 이런 잣대 아래에서는 십 년, 이십 년이 걸리는 소장품 연구나 새로운 미술가 발굴, 미술사의 재정립 같은 학술적 본연의 업무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대신 당장 관람객을 끌어모을 수 있는 연예인 동원 협업 전시나 대중적인 블록버스터 전시를 통해 학문적이며 학술적인 상업화를 부추긴다.
여기에 관문 권력 즉 인사권을 박탈당한 임기제 관장과 학예연구실장의 존재다. 책임운영기관장이 되어도 공무원 총정원제와 총액인건비제에 묶여, 관장은 원하는 우수한 큐레이터나 전문가를 마음대로 채용, 증원할 수 없는 처지와 삼 년이란 짧은 임기중에 오직 행안부의 책임 운영 평가 점수를 잘 받기 위해 뛰어다니고 몰아붙이는 행정 관리자로 전락해 때로는 직장 내 갑질 문제로까지 비화하고 있다.
모든 문제의 결과는 비영리 공공성이라는 미술관·박물관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술관은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대중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공공재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책임운영기관으로 묶어 알아서 벌어 운영하라며 시장 논리를 들이대는 순간, 국공립 미술관으로서의 정체성과 공익성은 뿌리째 흔들린다. 결국 책임운영기관 제도는 자율이 없는 말뿐인 자율성을 명분으로 미술관에 시장의 논리만을 강요하고, 정작 자율을 실현할 예산과 인사의 실질적 권한은 주지 않는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미술관이 단기 실적의 노예가 아니라 문화유산의 수호자로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 제도가 낳은 모순을 근본적으로 재검토가 필요하다.
3단계: 정부조직법·시행령 개정이 필요한 것들-학예연구실장의 고위공무원단
본질적인 개혁은 원래 미술관을 제대로 개혁할 생각도 위정자는 물론 어떤 정부도 없었지만, 지금부터 다룰 내용은 문화부 하나의 의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다. 다른 기관과의 형평성, 총액인건비 통제, 예산 당국과의 협의가 얽혀 있어 상당한 정치적 추진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학예연구실장을 고위공무원단으로 격상하는 일이 시급하다. 지금 구조에서는 실장과 소속 과장들의 직급이 같은 것은 그 관계가 형식적 상하관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동급의 직원 중 선임자에 불과한 셈이다.
이를 행정라인의 운영지원단장과 같은 고위공무원단으로 격상해야 예산·인사 협의 테이블에서 학예 라인의 발언권이 확보될 것은 뻔한 일이다. 다만 고위공무원단 정원 배정은 총액인건비·정원 통제와 맞물려 있어 행정안전부·기획재정부 협의가 필요하고, 다른 책임운영기관들의 형평성 요구를 자극할 수 있다는 현실적 장벽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부담이 미술관의 개혁을 미룰 이유는 못 된다. 형평성 우려 때문에 구조적 문제를 방치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그리고 문화부 조직원들도 산하기관을 자신들의 인사적체를 해소하는 순환근무를 위한 수단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국가의 문화예술을 위한 기관이라는 점에서 조직 이기주의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인건비가 통제하는 정원
정원과 인건비 총액이 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 통제 아래 있으면, 새로운 장르나 미디어를 바탕으로 하는 특정 예술분야의 전문 인력을 새로 뽑고 싶어도 기존 정원 안에서 돌려막기를 할 수밖에 없다. 해외 유수 미술관처럼 사안별로 계약직 전문가를 유연하게 초빙하는 구조를 만들려면 이런 정원과 인건비 총액 통제부터 완화해야 한다.또한 공공 조달 규정에서 예술품 거래를 분리할 필요도 있다. 작품 구입이나 해외 작가·갤러리와의 거래는 본질적으로 대체 불가능한 개별 협상인데, 공공 조달 규정은 가격 경쟁과 절차적 공정성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다. 이런 제도의 부조화 때문에, 건건이 특정인의 기술이 필요하거나 해당 물품의 생산자가 1인뿐인 경우라는 사실을 소명해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시급하거나 희소한 작품을 놓치는 일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분리가 필요하다.
4단계: 국회 입법이 필요한 것들-2차 소속기관과 분관
마지막으로 관장 개인의 의지나 문화부의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하고, 행정안전부나 기획재정부 그리고 국회를 거쳐야 하는 법률적 뒷받침이 필요한 사안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미술관이 정상적인 기관으로 작동하기 위한 지금까지 지적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소할 방법은 이것은 다름 아닌 책임운영기관제의 폐지와 함께 이를 대체할 프랑스의 EPML 또는 영국의 NDPB같은 제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국립현대미술관이 2차 소속기관을 둘 수 있도록 법령을 개정해야 한다. 지방의 분관 설치 요청이 빗발치고, 정부나 미술관도 국민문화향수권 확대와 미래문화유산의 수집과 보존 그리고 전승이란 차원에서 미술관 지방 분관을 추진하려 해도 1차 소속기관인 미술관이 2차 소속기관을 둘 근거가 없어 조직 설계 논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관장이 제아무리 훌륭한 지역 확장, 분관에 관한 비전을 갖고 와도, 법 개정 없이는 위탁 운영이나 지금의 청주관이나 과천관처럼 분원 형태의 편법적인 운영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립현대미술관 지방 분관 설치는 현재로서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시급하고 요구가 넘치는 일을 문화부는 손을 놓고 있다. 국립미술관 분관 유치를 외치는 국회의원들도 국립현대미술관이 책임운영기관으로 2차 소속기관을 둘 수 없어 분관설치가 불가한 것을 알면서도 이를 시정할 법률제정이나 개정은 하지 않은 채 이를 계속 미루어 온 것은 실제로는 미술관 유치를 원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부가 아마 서울관 개관과 함께 기획운영단장의 직급을 번개처럼 신속하게 올렸던 것처럼 자기들의 순환보직과 인사 적체를 해소하는 방안이었다면 이미 이뤄지고도 남음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자신들의 이해가 걸린 일에는 빛과 같이 움직이면서 국민과 미술관을 위하는 구조적 개혁은 미루는 이 패턴이야말로 행정조직의 전형적인 관성의 표본이다.
민간 기금·후원 구조 마련
민간 기금·후원 구조를 위한 별도 규정도 필수적이다. 외국의 미술관들은 이사회·재단을 통해 민간 기부금을 독자적으로 운용하며 장기 컬렉션 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책임운영기관은 세입·세출이 정부 회계 체계 안에 묶여 있고 기부금품 모집 관련 규정의 적용을 받아, 민간 자원을 유연하게 결합하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따라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국기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의 청렴성이라는 법의 취지에 따라 금지되어야 할 민간 민간 기업의 협찬금이나 후원금을 (사)국립중앙박물관회나 국립박물관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은 (사)현대미술관회나 국립현대미술관문화재단이란 ‘민간 비영리 법인 또는 재단’을 두어 협찬이나 후원금을 ‘재단 계좌’로 받은 뒤, 재단이 미술관의 활동을 ‘지원’하는 ‘꼼수’를 취하고 있다. 이 단계부터는 문화부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할 일이다. 따라서 관장 후보들에게 요구할 것은 최소한 학예연구실장의 고위공무원단 격상과 2차 소속기관 근거 법령을 임기 내 로드맵으로 제시하라는 것이다.
5단계; 근본 처방, 책임운영기관 폐지와 법인화-‘재단법인(또는 특수법인) 형태의 공공기관’과 사전승인에서 사후 책임으로
마지막 단계는 지금까지의 살펴본 모든 문제가 수렴하는 정리하는 것이다. 인사 구조의 임기 비대칭과 승진 사다리 단절, 조직 설계의 직급 문제, 예산 구조의 단년도 통제와 수익 환수, 법령 미비로 인한 분관 설치등 확장 불가능성, 이 모든 문제는 결국 문화부 산하 책임운영기관이라는 단 하나의 법적 지위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근본 처방은 이 지위 자체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전환하는 데 있다.
법인화라고 하면 모두 미술관을 사지로 모는, 정부의 지원 없이 독자생존 하라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틀린 말이다. 필자가 요구하는 법인화는 특별법을 통해 일정 수준의 국고지원을 정부가 보장하는 제도적 안전장치를 갖춘 '재단법인(또는 특수법인) 형태의 공공기관'이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에서 운영되는 제도에 근거한다. 법인화에 대한 공포를 가진 이들은 서울대학교의 법인화 이전과 이후를 비교해 보면 법인화에 대해 걱정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국고에서 지원되던 예산은 법인화가 되어도 계속 지원하는 것을 법제화하는 법인화이기 때문이다.
법인화가 ‘방치’가 아니라 진짜 ‘자율’이 되려면, 법인화는 통제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통제 방식을 사전 승인에서 사후 이사회 책임으로 바꾸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자율을 감당할 역량과 견제 문화가 무른 상태에서 기관을 법인화하면 자율이 아니라 방치가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특별법에 의한 법인 설립이 현실적이다. 관장과 학예연구실장을 당연직으로, 문화부 추천 인사를 소수로 제한하고, 미술사·큐레이팅 전문가와 노동이사를 다수 포함하는 11인 이내 이사회를 구성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사업계획·정원·인사위원회 주재·작품 구입·자체 수입 사용·다년도 계약·지방분관 설치라는 일곱 개 핵심 권한을 문화부의 사전 승인에서 이사회 의결로 넘기되, 감사위원회의 외부 인사 전원 구성, 국회 이중 보고, 정보공개 의무, 5년 후 국회 재평가라는 일몰 조항을 함께 두어 이사회 자체가 새로운 밀실 권력이 되는 것을 막는 것도 필요하다. 결국 법인화는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법인화를 의미하며 그 시작은 '탈문화부·탈정치'가 최종 목표이다.
미술관의 성공한 자주독립 사례
독일 바이에른주는 2025년 발표한 백서를 통해 미술관을 '관청 지위로부터의 탈피(Abkehr vom Behördenstatus)'를 선언했다.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를 비롯한 18개 개별 미술관을 2029년까지 최대 4개 관씩 묶어 10개의 ‘바이에른 국립미술관’으로 재편하고, 그 산하 연합체의 법적 형태로는 국가 행정조직 바깥에 위치하는 행정 주체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독립된 공법인의 성격을 지니는 ‘공법상 영조물’을 채택하기로 했다.
새로운 공무원의 채용이나 증원없이, 이사회가 경영을 맡고 국가가 우위를 점하는 감독이사회가 이를 감시하는 구조다. 관건은 개별 관장이 미시적 행정에 매이지 않고 전략과 정체성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직 전체의 큰 방향만 국가가 쥐고 나머지는 연합체에 넘기겠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이미 오래전에 같은 길을 갔다. 1992년 법령에 의해 설립된 루브르박물관 공공시설법인(EPML)은 문화부 산하의 행정적 성격의 공공시설법인으로서, 독자적인 법인격을 가지고 자체 예산과 계약 체결권을 행사한다. 최근 프랑스 감사원이 루브르 재정구조를 감사한 것도, 법인이 국가 재정과 분리된 자체 회계·기부금 관리 체계 즉 기부금관리기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테이트나 내셔널갤러리 역시 문화부(DCMS) 산하의 독립집행기구 인 비부처공공기관(NDPB)으로 정부와 일정 거리를 두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도1995년대 자율화 정책에 따라 건물과 국가유산인 핵심소장품은 국가가 소유하고 새로 설립된 민법상 재단인 ‘국립미술관 재단’이 국가로부터 위탁받아 운영 및 관리하는 권한을 행사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하나 정부가 매년 약 35%의 예산을 지원한다.
형태는 저마다 다르지만, 영조물이던, 공공시설법인이든, 독립집행기구, 재단이든 공통된 원리는 하나다. 미술관을 정부 부처의 일개 부서가 아니라 독자적 법인격을 지닌 주체로 세워, 정부는 소유와 감독에 머물고 운영의 자율은 기관 스스로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전환이 소득 수준이나 국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독일과 프랑스, 영국과 네덜란드는 정치체제도, 미술관 예산 규모도, 심지어 대륙법과 관습법이란 법 전통도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이 전환이 경제력의 함수가 아니라 정치적 결단의 함수임을 보여준다.
결국 관건은 하나로 모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기획재정부가 쥐고 있는 통제 권한을 스스로 내려놓도록 정치적으로 유인 요인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가 문제이다. 이는 장관급의 의지, 국회의 초당적 지지,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여론의 형성이라는 세 축이 동시에 갖춰져야 가능한 일이다. 바이에른의 과학예술부 장관 마르쿠스 블룸(1975~)이 주 의회에서 직접 백서를 발표하고 나선 것처럼, 제도 전환은 관료의 실무 개선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의 영역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한국의 미술관 정책도 직시해야 할 때다.
글에서 나오면서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임기제 계약직으로 문화부가 준 과제를 집행하고, 인사권은 행정 라인에 내주고, 밖으로는 예산 당국에 결박된 자리다. 훌륭한 인물이 와도 소용없다는 말은 냉소가 아니라 정직한 결론이다. 따라서 환골탈퇴라는 개혁을 위해서는 이 다섯 단계를 순서대로 밟아 나갈 필요가 있다. 마지막 단계인 법인화만 외친다면 논의는 정치적 구호에 그치고 만다. 반대로 1·2단계의 쉬운 개혁에만 머물면 문제의 뿌리는 그대로 남게 된다. 따라서 바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과 권한의 배치다. 하마평을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1단계부터 5단계까지의 로드맵을 후보들에게 공약으로 요구해야 한다. 특히 4단계의 법령 정비와 5단계의 이사회 설계는 관장 개인의 리더 십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셈이므로, 이는 국회와 시민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과제다.
사실 필자는 지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일하면서 미술관의 독립운동을 한다는 심정으로 일했다. 하지만 10년 동안 한 일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문화부에서 나온 일반 행정직 공무원들이 전시과를 만들어, 미술관의 가장 핵심 업무인 전시기획과 실행 그리고 작품 수집을 담당하며 실행하던 것을 10여년 동안 싸우다, 설득하다를 거듭해 2004년 11월 직제개정을 통해 전시기획과 실행, 작품수집업무를 학예연구실로 이관하는 내규 개정을 10년 만에 성공했다. 내부 시행규칙 개정에 10년이 걸렸다는 것은 한국 공공조직의 고질적 병폐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학예 전문성을 강화하고 전시와 수집이라는 미술관의 핵심 기능을 통합 관리하겠다는 취지는 저항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다. 문제는 내용보다 조직 이기주의에 있었다.
우리나라의 정부 조직은 업무 재배치가 곧바로 직제의 변경으로 이어지는 구조이다. ‘과’가 셋에서 둘로 줄어들면 그 과의 수장인 과장 직위 하나가 함께 사라진다. 하지만 통상 ‘국’ 즉 사무국 단위가 하부에 일정 이상의 과를 거느려야 상급 직위인 국장 또는 사무국장급 자리가 인정되는 조직 관리 원칙상, 과가 셋에서 둘로 줄면 조직 유지의 최소 기준에 미달해 사무국장(3급) 자리가 사라진다. 즉 학예실로의 전시와 작품수집권의 이관은 표면적으로는 ‘전시과 폐지’라는 행정 기술적 조정이지만, 그 이면에서는 ‘3급 국장 자리의 소멸’이란 훨씬 무겁고 민감한 조직의 문제로 번진다.
여기서 저항의 실체가 드러난다. 문화부 소속 일반직 공무원 입장에게는 국립현대미술관 3급 국장직 하나와 과장직 하나가 자신들의 승진 경로 중 하나라는 사실과 순환보직을 위한 자리란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 따라서 과장직과 국장직이 1석씩 사라지면 문화부 조직 전체에서 3급, 4급으로 승진할 기회가 줄어든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따라서 이것은 더 이상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조직 개편 문제가 아니라 문화부 인사 체계 전반의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학예실에서는 전시와 작품수집업무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학예연구실업무라는 점에서 업무이관은 미술관의 전문성 강화를 위한 지극히 당연한 절차일 뿐이다.
정책적 목표와 관료 조직의 ‘자리보전’이라는 인사 이해관계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순간, 간단한 규정 개정 하나가 조직 개편이라는 정치적 협상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그 합의에 십 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되고 말았다. 이후 필자는 문화부 인사의 근간을 흔들었다는 역린을 건드린 죄(?)로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산적한 미술관의 문제를 알지만 3년이란 시간 동안 누구도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에 무리하게 나설 수 없다는 책임감이 필자를 미술관장 공모에 나설 수 없게 한다. 이것이 필자가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에 응하지 않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상화를 가로막는 것은 ‘책임운영기관’이란 제도 자체의 모순 때문이다. 책임운영기관이라는 지위는 자율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해 이중적이다. 관장은 기관장이면서 인사권과 작품심의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밖에 없다.
결국 미술관의 직제가 ‘학예 중심’이 아니라 ‘행정 중심’으로 설계되어, 결과적으로 미술관 본연의 기능을 책임지는 관장·학예연구실장보다 행정·예산을 다루는 기획운영단장에게 실질적 권한이 쏠려 있다는 점이 문제의 본질이다. 특히 미술관의 규정은 문화부에서 나온 기획운영단장과 '예산 및 행정관리 업무에 관한 사항은 협의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 전시나 작품 수집 등을 기획 실행시, 예산 집행 단계에서 반드시 기획운영단장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만사가 실질적으로 문화부와 기획운영단장이란 행정에 종속 되어있다.
게다가 학예연구실장은 임기제 계약직으로, 정규 공무원 라인과 별도의 불안정한 지위에 있다 보니 조직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적 취약성이 문제다. 이런 신분상의 불안정성은 학예 조직 전체의 사기, 장기 기획력, 대외 협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불합리한 일이 국립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사실상 국내 미술관 행정의 표준 역할을 해왔기에, 그 구조적 결함이 방치되면 지방 공립미술관들도 같은 한계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
물론 국가기관으로서 최소한의 통제는 불가피하고, 관장 권한 확대가 자의적 운영으로 이어질 위험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있다. 허나 이는 개편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이런 일이 계속되는 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정상화, 선진화’는 미술관 내부의 전문적 판단만으로는 결코 완결될 수 없고, 문화부와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의 혁신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미술관 다운 미술관을 위해 터놓고 맞짱토론을 해보자. 경제만 선진국이면 뭐 하는가? 문화도 제도도 함께 선진국으로 가보자.
문득 드는 생각은 이런 미술관의 처지를 알았다면 지금 미술관장직에 도전한 이들이 과연 공모에 응했을까? 알고도 응모했다면 이런 부조리를 척결하고 바로잡겠다는 의지가 있어서일까? 혹 이런 미술관의 사정도 모르는 사람이 관장에 응모했다면 그런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다. 제발 기우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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