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란에서 수피즘과 루미로, 제국에서 인간의 마음으로, 근현대 이슬람과 AI를 지나 다석의 ‘얼나’까지…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드는가
이슬람교 첫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아라비아 사막의 히라산 동굴로 들어갔다. 무함마드가 받았다고 믿은 최초의 계시에서 출발해 메카와 메디나, 꾸란과 움마,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따라가면서 “인간은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무함마드 사후의 세계로 들어갔다.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 우스만과 알리, 후세인과 카르발라, 수니와 시아, 우마이야와 아바스,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를 지나면서 신앙이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가 권력을 만나며 권력이 제국과 문명을 만들어가는 길을 보았다. 알콰리즈미의 수학과 이븐 시나의 의학, 이븐 루시드의 철학을 만나면서 사막에서 출발한 신앙이 어떻게 세계적인 지식문명의 한 축으로 성장했는지도 살펴봤다. 그리고 “신에게 복종한다는 신앙이 인간의 권력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다.
이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이야기다. 제국에서 다시 한 인간에게로 돌아갈 시간이다. 칼리프의 궁전에서 인간의 마음으로, 법과 제도에서 영성으로, 권력에서 사랑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꾸란을 다시 펼쳐 그 깊은 곳에서 정의와 자유, 자비와 생명, 인간의 다양성에 관한 목소리를 들어보고, 수피들을 만나 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식민주의와 근대화, 세속주의와 종교정치, 여성과 인권, 지하드와 극단주의를 지나 21세기의 AI까지 온 뒤 마지막에는 한국의 다석 유영모를 다시 만날 것이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드는가.
신은 하나다,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다
이슬람을 이해하려면 결국 꾸란으로 돌아가야 한다. 꾸란은 114개의 수라로 이루어져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역사적 이야기로 연결되는 책은 아니다. 창조와 심판, 예언자와 인간, 신앙과 불신, 정의와 자비, 가족과 공동체, 전쟁과 평화, 가난과 부, 죽음과 내세에 관한 가르침과 이야기가 서로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한 가지가 있다.
타우히드, 곧 신은 하나라는 믿음이다.
알라는 한 분이며 그분과 나란히 놓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인간도, 돈도, 권력도, 국가도, 종족도, 지도자도 절대자가 될 수 없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명제가 아니라 인간의 오만에 대한 경고다.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신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왕을 절대화하고 국가를 절대화하며 돈을 절대화하고 자신의 생각을 절대화한다. 오늘에는 기술과 과학, 심지어 인간 자신의 지능을 절대화할 위험도 있다.
타우히드는 그 모든 인간의 우상 앞에서 말한다.
절대자는 인간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슬람의 유일신 신앙은 영성의 문제로 들어간다.
적에게도 정의로운가
꾸란을 전쟁의 구절만 골라 읽으면 전쟁의 책처럼 보일 수 있고 자비의 구절만 골라 읽으면 자비의 책처럼 보일 수 있다. 경전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문장만 떼어내는 일이 아니라 전체 맥락과 해석의 역사를 함께 살피는 일이다.
그 가운데 오늘의 세계가 특별히 주목할 만한 구절이 있다. 꾸란 5장 8절은 어떤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정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이끌게 해서는 안 되며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 경건에 더 가깝다고 가르친다.
친구에게 공정하기는 비교적 쉽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의롭기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적에게도 같은 정의를 적용할 수 있는가. 전쟁 중에도 상대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는가.
정의가 내 편에게만 적용된다면 그것은 정의라기보다 편파일 수 있다. 이 점에서 꾸란의 이 구절은 우리가 「아시아의 영성」을 관통하며 붙들어온 진리·정의·자유 가운데 ‘정의’와 직접 만난다.
정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
적에게도 적용될 때 비로소 원칙이다.
또 하나 중요한 구절이 꾸란 2장 256절이다. “종교에는 강제가 없다”는 문장이다. 다만 이 구절의 역사적 적용 범위와 다른 구절들과의 관계를 두고 전통적인 이슬람 주석과 법학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해왔다는 사실까지 함께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이 문장은 믿음과 강제의 관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사람의 몸을 굴복시킬 수는 있어도 마음속 신앙까지 강제로 만들 수 있는가. 신앙이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한다면 강제와 신앙 사이에는 근본적인 긴장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것은 오늘의 종교에도 중요한 질문이다. 나에게 신앙의 자유가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종교를 믿을 자유가 있어야 하며, 현대의 보편적 자유라는 관점에서는 아무 종교도 믿지 않을 자유 역시 존중돼야 한다.
나의 자유만 자유일 수는 없다.
타인의 자유까지 인정할 때 자유는 원칙이 된다.
다름은 제거할 대상이 아니라 알아갈 이유다
꾸란 49장 13절도 오늘의 다문화·다종교 세계에서 되새길 만하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고 여러 민족과 부족으로 만든 까닭을 ‘서로 알아가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놀라운 역설이 있다. 인간은 다름을 싸움의 이유로 만들기 쉽다. 피부색이 다르기 때문에 싸우고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싸우며 언어와 종교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다름을 제거하라고 하지 않는다.
서로 알라고 한다.
모두 똑같아져야 평화로운 것이 아니다. 다른 채로 함께 살아갈 수 있어야 진정한 평화다.
이것은 「아시아의 영성」이 수많은 종교를 차례로 살펴보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힌두교를 불교로 만들 필요가 없고 불교를 기독교로 만들 필요도 없으며 기독교를 이슬람으로, 이슬람을 유교로 만들 필요도 없다.
다름을 없애는 것이 회통은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이해하는 것이 회통이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여기에서 이번 원고에서 특별히 정확히 해둘 대목이 있다. 꾸란 5장 32절이다.
이 구절을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구절’이라고 표현하면 오늘날의 이스라엘 국가나 현대 이스라엘 국민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원문의 표현은 ‘바니 이스라일(Banī Isrāʾīl)’, 곧 ‘이스라엘의 자손(Children of Israel)’이다. 현대 국민국가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꾸란의 경전적·고대 종교사적 맥락에서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내려진 규범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구절은 바로 앞에서 아담의 두 아들, 곧 이슬람 전승에서 하빌과 카빌로 불리는 인물들의 살인 이야기를 전한 뒤 이어진다.
꾸란은 그 문맥에서 이스라엘의 자손에게 한 생명을 부당하게 죽이는 일을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에 비견하고, 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모든 사람을 살리는 것에 비견하는 규범을 주었다고 서술한다.
따라서 이를 이슬람이 모든 상황에 대해 직접 선언한 현대적 인권조항처럼 문맥을 떼어 확대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만, 한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드러내는 강력한 경전적 표현이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여기에서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기준 하나를 생각한다.
종교는 생명을 살리는가. 아니면 죽이는가.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반복되는 순간 인간은 가장 무서운 모순에 빠진다. 생명을 창조한 신의 이름으로 생명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든 폭력을 신성화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가장 엄격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이 정말 신의 뜻인가, 아니면 인간의 욕망에 신의 이름을 붙인 것인가.
꾸란의 수라 대부분은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라는 의미를 가진 바스말라로 시작한다. 알라를 가리키는 중요한 이름 가운데 ‘아르라흐만’과 ‘아르라힘’이 있으며 자비와 긍휼의 의미를 품는다.
그런데 왜 자비의 신을 믿는 인간이 서로 싸우는가.
이 질문은 이슬람만의 질문이 아니다. 사랑의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 왜 종교전쟁을 벌였는가. 자비를 강조하는 불교사회에서 왜 폭력이 일어났는가. 인을 말하는 유교사회에서 왜 신분차별과 억압이 존재했는가.
문제는 종교가 무엇을 가르치는가에만 있지 않다.
인간이 그 가르침을 어떻게 살아내는가에 있다.
경전은 인간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 맞게 경전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마지막 시험장은 책이 아니다.
인간이다.
법에서 마음으로, 복종에서 사랑으로
이슬람 문명이 제국과 법학, 철학과 과학으로 뻗어가는 동안 또 하나의 흐름이 깊어졌다. 수피즘이다. 수피즘을 이슬람과 별개의 종교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슬람 내부에서 발전한 다양한 영성적·신비주의적 전통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외적인 율법과 의례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하루 다섯 번 기도하면서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할 수 있고 라마단에 금식하면서 가난한 사람의 고통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으며 메카를 순례하면서 이웃을 미워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신앙은 어디까지 들어가야 하는가. 마음까지 들어가야 한다.
수피들은 그 길을 찾았다. 겉으로 신에게 복종하는 것을 넘어 마음 깊은 곳에서 신을 사랑하고 자아의 욕망을 비우며 신과 가까워지는 길을 찾으려 했다.
이슬람의 길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초기 수피 전통을 이야기할 때 빼놓기 어려운 인물이 8세기의 여성 신비가 라비아 알 아다위야다. 그녀에게 귀속되어 전해지는 영성의 핵심은 강렬하다. 천국이라는 보상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고 지옥의 형벌이 두려워서도 아니라 오직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신앙의 동기가 보상과 공포를 넘어 사랑으로 올라간다.
착하게 살면 천국에 가기 때문에 착하게 사는가. 악하게 살면 벌을 받기 때문에 악을 피하는가. 아니면 선 그 자체가 옳기 때문에 선을 선택하는가.
신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가 아니라 내가 신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묻는 순간 종교는 거래에서 영성으로 넘어간다.
11세기의 알가잘리 역시 이슬람 지성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법학과 신학에 정통했고 철학을 깊이 연구했지만 지식과 명성만으로 내면의 확신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는 외적인 지식과 내적인 영성을 연결하려 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신 앞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다르다. 종교학자가 된다고 자동으로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며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자동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듯 꾸란을 많이 안다고 자동으로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알가잘리의 문제의식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지식이 나를 바꾸었는가.
우리가 유대교 이야기에서 던졌던 질문과 다시 만난다. 지식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지식에서 지혜로 가야 한다.
루미, 사랑 앞에서 ‘나’를 내려놓다
그리고 13세기에 잘랄 앗딘 루미가 나타난다. 오늘날 루미는 이슬람권을 넘어 세계적으로 읽히는 시인 가운데 하나지만 그를 단순히 종교를 초월한 현대식 ‘힐링 시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그의 사상과 시는 꾸란과 무함마드, 이슬람 신앙과 수피 전통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언어는 경계를 넘어간다.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 인간과 신, 자아와 초월자의 관계를 끊임없이 노래한다. 루미에게 사랑은 감상적인 감정에 머물지 않는다. 자아가 깨지는 사건이며 인간이 자신만을 중심에 놓는 ‘나’에서 벗어나 더 큰 존재를 향해 움직이는 힘이다.
그렇다면 이슬람교 이야기 1편에서 시작한 ‘복종’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앞에서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다. 복종이 사랑을 만나면 영성이 된다.
지하드, 가장 어려운 싸움은 어디에 있는가
현대 세계에서 이슬람과 관련해 가장 오해가 많은 단어 가운데 하나가 ‘지하드’다. 지하드는 흔히 곧바로 ‘성전’으로 번역되지만 그 의미와 역사적 사용은 훨씬 복잡하다. 기본적으로 노력하고 분투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며 이슬람 전통에서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도덕적·영적 분투에서 무력투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돼왔다.
따라서 지하드를 오직 테러와 동일시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고, 반대로 이슬람 역사에서 지하드가 무력투쟁의 의미로 사용된 사실을 지워버리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빛과 그림자를 함께 보아야 한다. 그것이 기본이고 원칙이며 상식이다.
오늘의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인간이 싸워야 할 가장 어려운 상대는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타인인가. 아니면 자기 안의 탐욕과 증오, 오만과 폭력성인가.
세상을 정복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패배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가장 어려운 싸움은 어쩌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지 모른다.
근대의 충격, 이슬람은 다시 자신에게 묻다
근대에 들어 이슬람 세계는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유럽의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군사력과 자본주의가 세계질서를 바꾸었고 여러 이슬람 지역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나 강한 정치적 영향 아래 들어갔다.
“왜 우리는 뒤처졌는가.”
이 질문은 이슬람 세계의 지식인들을 흔들었다. 어떤 사람은 서구의 과학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이슬람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이슬람과 근대성을 조화시키려 했다.
오스만제국의 해체 이후 민족국가들이 등장하면서 세속주의와 이슬람 정치사상의 관계도 새로운 문제가 됐다. 종교는 국가에서 어디까지 역할을 해야 하는가. 샤리아는 현대법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가. 민주주의와 이슬람은 양립할 수 있는가. 종교적 전통과 개인의 자유는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슬람과 여성을 이야기할 때도 단순한 결론은 위험하다. 이슬람권은 하나의 사회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와 이란, 중앙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역사와 법,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문화는 서로 다르다.
꾸란이 등장한 7세기 아라비아의 역사적 맥락에서 여성에게 재산권과 상속 등 일정한 법적 권리를 명문화한 측면을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오늘날의 보편적 성평등 기준에서 이슬람 법과 관행의 일부를 비판하고 재해석하려는 흐름도 존재한다.
여기에서도 경전과 인간의 해석을 구별해야 한다. 무엇이 종교의 핵심인가. 무엇이 특정 시대의 문화인가. 무엇이 남성 중심 사회가 종교의 이름으로 굳힌 관행인가.
이 질문은 이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대교에도 기독교에도 불교에도 유교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전통을 존중한다는 것은 과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반복한다는 뜻이 아니다. 살아 있는 전통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21세기에 들어 이슬람은 테러와 극단주의의 이미지와 자주 연결됐다. 그러나 세계의 방대한 무슬림과 1400년의 이슬람 문명을 폭력적 극단주의 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은 사실에도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동시에 종교의 이름을 내건 폭력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외면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구별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이슬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운동을 구별해야 하고, 평범한 무슬림의 신앙생활과 폭력적 극단주의를 구별해야 하며, 정당한 비판과 종교에 대한 혐오도 구별해야 한다.
언론의 기본은 구별하는 데 있다.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순간 사실은 사라지고 편견이 시작된다.
AI라는 새로운 힘, 인간은 다시 무엇에 복종하는가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이슬람’이라는 말은 신에게 자신을 맡기고 복종한다는 의미와 연결되어 있으며 ‘살람(salām)’, 곧 평화와도 언어적으로 관련된 어근을 공유한다.
그러나 언어의 뿌리가 같다고 현실의 평화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신에게 복종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권력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도 있고 신의 정의를 말하면서 자신의 복수를 정의라고 부를 수도 있으며 신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복종은 어디에서 증명되는가.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다.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다.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에서다.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서다.
꾸란이 적대감 때문에 정의를 버리지 말라고 하고, 여러 민족과 부족이 서로 알아가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는 대목은 바로 이 질문과 만난다.
평화는 적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정의를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리고 인류는 이제 또 하나의 거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AI다.
AI는 종교를 믿는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신앙이나 영성을 가진다고 현재로서는 말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AI를 만드는 인간은 도덕적 선택에서 자유롭지 않다. 누구의 데이터를 사용할 것인가.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할 것인가. 누구를 감시할 것인가. 어떤 편견을 학습시키거나 줄일 것인가. 전쟁에서 생사를 결정하는 일을 어디까지 기계에 맡길 것인가. 인간의 일자리와 존엄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AI 시대의 문제는 기술의 문제이면서 결국 인간의 문제다.
여기에서 1400년 전 이슬람의 질문이 다시 살아난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힘의 절대적 주인인가.
아니면 그 힘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인가.
타우히드를 AI 시대의 기술윤리와 그대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정신에서 하나의 질문을 얻을 수는 있다.
인간은 자신의 창조물을 우상으로 만들 것인가.
AI가 인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더 빠르게 판단한다고 해서 그것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AI를 만든 인간 자신도 절대자가 아니다. 인간의 지능도 오류를 범하고 인간의 욕망도 위험하며 인간의 권력도 타락할 수 있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지능만이 아니다. 그 지능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지혜다.
그래서 인간 중심 AI, Human-centered AI, HAI는 중요하다. 기술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 자체가 탐욕과 증오에 사로잡혀 있다면 ‘인간 중심’만으로 충분한가. 인간의 욕망을 더욱 효율적으로 충족시키는 AI가 정말 인간을 위한 AI인가.
그래서 Spirituality-centered AI, SAI, 영성 중심 AI라는 방향을 생각해볼 수 있다.
특정 종교의 교리를 AI에 입력하자는 뜻이 아니다. 기독교 AI, 불교 AI, 이슬람 AI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인간보다 더 큰 가치, 생명의 존엄, 절제와 책임, 나눔과 평화, 미래세대와 자연에 대한 책임을 기술의 방향 속에 넣자는 것이다.
할 수 있다고 모두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질 수 있다고 모두 가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길 수 있다고 상대를 모두 파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강해질수록 절제가 필요하다. 그것이 영성이다.
다석의 ‘얼나’, 서로 다른 길이 만나는 곳
이슬람 3부작의 마지막에서도 다시 다석 유영모를 만난다. 다석은 기독교를 깊이 공부했지만 불교와 유교, 도교의 사유를 함께 읽으며 동서양의 영성을 한국인의 언어 속에서 만나게 하려 했다.
그가 인간 안에서 구별한 것이 ‘제나’와 ‘얼나’다. 제나는 욕망과 소유, 명예와 권력을 움켜쥐며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으려는 나이고, 얼나는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넘어 더 큰 진리와 생명을 향해 솟나는 참된 나다.
이슬람의 알라와 다석의 ‘하나’를 신학적으로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수피즘의 신적 사랑과 다석의 얼나 역시 같은 종교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길이 하나의 질문에서는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가.
무함마드는 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라고 했다. 수피들은 자아를 비우고 신을 사랑하려 했으며 루미는 사랑 속에서 인간의 좁은 자아가 깨지는 길을 노래했다. 다석은 ‘제나’를 넘어 ‘얼나’로 솟나라고 했다.
모두 같은 종교는 아니다. 같은 교리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오만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는 서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이 「아시아의 영성」이 찾는 회통이다. 다름을 없애는 회통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면서 더 깊은 인간의 질문으로 내려가는 회통이다.
진리·정의·자유, 그리고 복종에서 평화로
이제 다시 우리가 처음부터 붙들어온 세 단어로 돌아간다.
진리, 정의, 자유다.
진리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고 정의는 내 편과 상대편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며 자유는 나의 자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까지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함께 갈 때 평화가 가능하다.
진리 없는 평화는 거짓된 침묵이 될 수 있고 정의 없는 평화는 억압의 현상유지가 될 수 있으며 자유 없는 평화는 강요된 복종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는다. 진리와 정의와 자유가 함께 숨 쉬는 질서다.
이제 이슬람 3부작을 돌아본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무함마드와 히라산, 메카와 메디나, 꾸란과 다섯 기둥을 만났고 “인간은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를 물었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무함마드 사후의 칼리프와 알리, 후세인과 카르발라, 수니와 시아, 우마이야와 아바스, 바그다드의 지식문명을 따라가며 “신에게 복종한다는 신앙이 인간의 권력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물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다시 꾸란으로 돌아와 정의와 자유, 다양성과 생명의 문제를 살펴보고 수피즘과 라비아, 알가잘리와 루미를 지나 근대 이슬람과 여성, 인권과 극단주의, 그리고 AI 시대까지 걸어왔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드는가.”
대답은 종교의 이름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이슬람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자동으로 평화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며 기독교인이라고 자동으로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불교인이라고 자동으로 자비로운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며 유교 경전을 읽는다고 자동으로 어진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의 진실은 이름이 아니라 삶에서 드러난다.
하루 다섯 번 몸을 낮추면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한다면 그 기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마단에 굶으면서 굶주린 이웃에게 무관심하다면 그 금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메카를 순례하면서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증오한다면 그 순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꾸란을 암송하면서 정의를 버린다면 그 암송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모든 것은 다시 인간에게 돌아온다.
신 앞에서 몸을 낮추는 일이 인간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신의 자비를 믿는 일이 약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신의 정의를 믿는 일이 적에게까지 정의로운 것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신은 하나라고 고백하는 일이 서로 다른 인간을 하나의 인류로 바라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그때 비로소 복종은 평화로 갈 수 있다.
아브라함은 떠났다. 모세는 자유를 향해 걸었다. 예수는 사랑하라고 말했다. 무함마드는 인간에게 하나의 신 앞에서 오만을 내려놓으라고 했다. 그리고 수피들은 다시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가 신을 두려워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사랑의 깊이로 나아가려 했다.
그러나 21세기의 인간은 다시 거대한 힘 앞에 서 있다. 돈의 힘, 국가의 힘, 군사력의 힘, 과학의 힘, 그리고 AI라는 새로운 지능의 힘이다.
힘은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 지혜로워지고 있는가. 정보는 더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 진실해지고 있는가. 무기는 더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 평화로워지고 있는가. AI는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더 인간다워지고 있는가.
그래서 유대교 이야기에서 시작해 기독교를 지나 이슬람까지 걸어온 서아시아 영성의 긴 길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모인다.
지식에서 지혜로, 부에서 나눔으로, 힘에서 책임으로, 오만에서 겸허로, 지능에서 영성으로.
그리고 이슬람은 여기에 마지막 한마디를 더한다.
복종에서 평화로.
그 복종은 인간 권력에 대한 맹목적 굴복이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욕망과 오만을 절대화하지 않는 절제여야 한다. 다석의 말로 하면 제나를 끝없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얼나로 솟나는 길이어야 하며,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AI 역시 인간의 탐욕을 무한히 증폭시키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과 생명, 문화와 자연을 지키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아시아의 영성」이 이슬람의 긴 길을 지나 도달한 마지막 자리다.
히라산의 동굴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메카와 메디나를 지나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로 갔고 카르발라의 피와 제국의 권력을 지나 수피의 고요한 마음으로 들어갔다. 라비아의 사랑과 알가잘리의 성찰, 루미의 영성을 지나 마침내 AI 시대의 인간 앞에 섰다.
이슬람교 이야기 1편에서 물었다.
인간은 무엇 앞에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2편에서 물었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신앙이 인간의 권력과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3편에서 마지막으로 묻는다.
신에게 복종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을 더 평화롭게 만드는가.
그 대답은 꾸란의 글자 속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모스크의 높이에도, 신자의 숫자에도, 국가의 힘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도 정의로운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의 존엄을 인정하는가. 힘을 가졌을 때 약자를 보호하는가. 부를 가졌을 때 나누는가. 지식을 가졌을 때 생명을 살리는가.
그리고 신을 말하면서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가.
사막에서 시작된 이슬람의 긴 여정은 결국 다시 인간의 마음으로 돌아온다. 신은 하나라고 고백하면서 인간을 끝없이 갈라놓는다면 아직 길은 끝나지 않았다. 신 앞에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하려는 욕망까지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복종은 겸허가 되고, 겸허는 자비가 되며, 자비는 평화가 된다.
오만에서 겸허로, 권력에서 책임으로, 율법에서 영성으로, 제나에서 얼나로, 그리고 마침내 복종에서 평화로.
그것이 이슬람 3부작의 마지막 길이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인류가 다시 걸어야 할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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