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 달러는 물론 엔화와 유로 등 주요국 통화에 대해 초약세를 보이고 있어 물가 상승과 내수 위축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경기 부양을 이유로 원화 약세를 방관하고 있어 가시적 성과를 보이기에 급급한 나머지 서민경제의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 원화, 나 홀로 약세 = 올 들어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가 날개 없는 추락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6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041.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지난해 12월 930원대를 유지하던 원/달러 환율은 올해 1월 942.39원으로 뛰기 시작하더니 지난달 986.66원의 평균 환율을 기록하는 등 급등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달 들어서는 1000원대 벽마저 허물며 연초 대비 100원 가량 올랐다.
달러 뿐 아니다. 연초 100엔당 830원대를 유지하던 원/엔 환율은 16일 1000.86원까지 치솟았다. 4개월 만에 엔화 대비 원화 가치가 20% 가량 폭락한 셈이다.
원/유로 환율도 지난 1월 1370원대에서 최근 1620원대로 무려 250원이나 급등했다. 중국 위안화의 경우 1월 초 1위안 당 128원 수준이었던 것이 최근에는 150원대로 올라섰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의 영향으로 미국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달러에 대한 주요국 통화 가치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유독 원화만 약세를 면치 못하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글로벌 신용위기에 대한 우려로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심리가 커지면서 한국 등 신흥시장(이머징마켓)에 대한 투자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것을 가장 큰 이유로 꼽고 있다.
여기에 정부가 경상수지 적자폭을 줄이고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원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는 점도 원화 가치 폭락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시름 깊어지는 서민 경제 = 원/달러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물가 상승폭도 위험수위로 치닫고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4월 수입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31.3% 급등했다. 지난 1998년 5월 31.9%를 기록한 후 10년 만에 최고치다.
올 들어 수입물가 상승률은 1월 21.2%로 20%대로 진입한 후 2월 22.2%, 3월 28.0%, 4월 31.3%로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수입물가 상승폭은 1~2개월 후 소비자물가에 그대로 반영되는 만큼 지난달 4%대를 넘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당분간 더 오를 전망이다.
물가 상승세가 꺾일 줄 모르는 것은 달러에 대한 원화 가치가 계속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은은 수입물가 상승률 가운데 3분의 2 정도는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나머지 3분의 1은 원화 가치 하락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했다.
유럽과 일본 등은 자국 통화가 달러에 대해 강세를 보이면서 달러 표시 가격이 올라도 수입물가 상승률이 높지 않다.
수출경쟁력 하락을 우려해 위안화 평가 절상에 난색을 보여왔던 중국도 최근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위안화 강세를 용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원/달러 환율 불안에 따른 물가 상승은 내수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은이 발표한 올 1분기 소비재판매 증가율은 3.8%로 전년 동기 대비 1.9%포인트 급락했다.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급속히 냉각되고 있는 것이다.
◆ 여전히 성장에 목매는 정부 = 정부가 올 들어 갈수록 커지고 있는 경상수지 적자폭을 줄이고 당초 목표했던 5% 성장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가격 경쟁력을 높여 수출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원화 가치가 끝모를 추락을 계속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부가 팔장을 끼고 있는 이유다.
수출 증가 효과는 어느정도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6일 관세청은 4월 무역수지가 1억95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3월 8억2000만달러보다 크게 줄어든 수치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수출이 늘고 목표한 경제성장률을 달성하더라고 내수가 위축되고 신규 일자리가 늘지 않으면 서민들이 느끼는 체감경기는 나아질 수 없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광상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경제성장률이나 경상수지 적자폭은 통계에 불과할 뿐"이라며 "통계에 매달려 서민 경제를 외면하면 참여정부가 저질렀던 과오를 반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선임연구원은 "원화 가치가 낮아지면 국내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올라가 수출이 늘 것"이라며 "다만 원화 약세의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 중 어느 쪽이 큰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은도 최근 "국제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고 있어 국내 기업이 상품 가격을 낮출 수 있는 여력은 많지 않다"며 "가격보다는 품질로 승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분석 결과는 내놓은 바 있다.
송혜승 기자 hssong00@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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