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통치자를 막론하고 차남이나 셋째 아들이 영리한 경우가 많았다.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청나라 강희제(1654-1722)가 대표적인 사례다. 순치제의 셋째 아들이었던 그는 61년간 중원의 정치를 안정시키고, 역사서와 백과사전을 편찬하는 등 ‘중화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하지만 황제가 아들들 중 첫째를 제치고 대권을 물려주려다 피를 흘리는 경우가 빈번했다. 장남이 차남 또는 3남에게 대권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동생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차단키 위해, 또는 차남이 장남의 승계권을 차지하기 위해 피를 뿌렸던 것이다.
위나라 조조의 네 아들 가운데 문재(文才)가 가장 뛰어났던 인물은 조식(曹植)이었다. 조식은 10세 무렵에 시경과 논어, 초사를 줄줄이 욀 만큼 영특했다. 10대 때 그가 짓는 글들마다 대필 논란이 제기될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것이다.
서기 220년 조조가 사망하자 왕에 오른 장남 조비(曹丕)는 자기보다 재능이 뛰어났던 조식을 살해하기로 마음 먹는다. 혹시나 훗날 군신들이 자기를 밀어내고 조식을 왕으로 추대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궁으로 불려온 조식에게 조비는 ‘지금부터 일곱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명한다.
조식이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읇은 것이 유명한 칠보시(七步詩)다.
‘煮豆燃豆箕, 豆在釜中泣(자두연두기, 두재부중읍)….’ <콩을 삶으며 콩깍지를 태우니, 콩은 솥 안에서 흐느끼네/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는데 볼 때기가 이리도 뜨거운가?>
조식은 콩을 수확해 콩과 콩깍지를 분리한 다음 콩 깍지로 불을 때 솥 안의 콩을 볶는 상황을 떠올렸다. 같은 형제로 태어나 콩깍지(조식)가 다른 형제인 콩(조식)을 볶아대는데 뜨겁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형제간의 비애를 비유한 시였다.
시의 뜻을 음미하고 얕은 마음을 후회한 조비는 동생을 풀어주었지만 모반을 막기 위해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조식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41세의 나이에 천재적인 재능을 펴보지도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이런 경우에 비하면 조선시대 태종의 아들들은 도량이 대단했다. 셋째 충녕이 재능이 뛰어나 부친의 총애를 받는 것을 간파한 장남 양녕대군은 세자로 책봉됐었지만 고의로 방탕한 짓을 일삼아 스스로 세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효령대군 역시 세자자리를 은근히 넘보고 있었으나 부친과 형의 뜻을 알고는 절에 들어가 버리고, 셋째 충녕이 왕위에 올라 조선 최고의 성군(세종)이 됐던 것이다.
수십조원의 매출에다 수십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리고 있는 오늘날 재벌기업의 경우 어떤 자식에게 기업의 대권을 물려주느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한다.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세 아들(맹희, 창희, 건희)의 경영 능력을 테스트해 셋째를 낙점했다. 돌파력이 있으나 감정 컨트롤에 문제가 있는 형들보다 바둑 9단처럼 여러 수를 읽으며 미래경영을 꾸려나갈 재목으로 셋째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기대에 부응하듯 이건희 회장은 당시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반도체사업을 토대로 삼성을 세계 최고의 브랜드 반열에 올려놓았다.
8명의 아들을 두었던 정주영 회장은 장남(몽필)의 사망으로 실질적인 장남이 된 정몽구 회장의 능력을 못미더워했다. 눈을 감을 때까지 정몽헌 회장(5남)과 대권정리를 말끔하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대그룹은 결국 ‘왕자의 난’으로 그룹이 갈라지고 5남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제 고령이 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두 총수 모두 외아들만 두고 있다는 점은 묘한 아이러니다. 승계에 따른 잡음이 없다는게 장점이지만, 아들들을 경쟁시켜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아들이 그룹을 맡아 경영하다 망칠 경우 선친들과 평생을 거쳐 일궈놓은 기업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다.
문제는 두 총수 모두 고령이지만 아들들의 경험이 적다는 것이다. 정 회장처럼 철공소 같았던 인천제철을 밑바닥부터 키운 경험도, 이 전 회장처럼 허허벌판에 반도체 공장을 세워본 경험도 없다. e삼성처럼, 지난해 초의 기아차처럼 사업이 어려워지면 책임을 시장 상황과, 다른 CEO에게 돌리는 등 ‘온실 경영수업’만 받았을 뿐이다.
이재용 삼성 전무는 이혼 파문으로 제기되는 수신제가(修身 齊家) 논란을 말끔히 씻어내고 경영 능력에 하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본격적인 대권 이양 절차에 돌입한 현대기아차그룹의 정의선 사장은 글로벌 불황시대에 생존의 화두를 던지고 스스로 몸을 던져 입증할 필요가 있다.
삼성그룹, 현대차그룹의 차기 대권 승계는 해당 기업만의 이슈가 아니라 한국경제의 문제다. 두 외아들이 경영을 잘못했을 경우 대한민국 경제까지 파국으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박정규 편집국장 skyjk@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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