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을 개혁하는 데 가장 시급한 일은 '안정성'이라는 18~19세기의 덕목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본시장에서 횡횡하고 있는 투기는 반드시 규제해야 할 악덕이다"
터키 증시에 상장된 은행 중 자산 순위 1위인 이쉬은행의 에르신 어진제 행장은 이번 금융위기로 이쉬은행의 보수적인 전략과 문화가 옳았다는 것이 입증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19세기 고문서를 간직하며 그 안에 적힌 은행 경영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고문서에 담긴 은행의 최우선 덕목은 '안전'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안정성 수호자'로 이름이 높은 어진제 행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 은행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이쉬은행의 성공 비결을 소개했다.
어진제 행장은 1975년 앙카라에 있는 미들이스트테크니컬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이쉬은행에 투신했다. 1924년 터키공화국 출범과 함께 설립된 이쉬은행은 당시만 해도 규모가 작았지만 지금은 터키 최상위 민간 상업은행으로 손꼽힌다. 이스탄불에 있는 본점 건물인 이쉬타워는 터키에서 가장 높다. 보수적인 경영 전략에 비하면 상당한 성공을 거둔 셈이다.
어진제 행장의 조심성을 읽을 수 있는 사례가 하나 있다. 몇 해 전 외국 자본이 고속 성장을 하고 있는 터키시장에 매료돼 터키의 대형은행 지분을 인수하거나 소규모 은행 인수에 나섰을 때다. 당시 씨티그룹과 포르티스, 유니크레딧과 같은 글로벌 은행들도 이쉬은행에 눈독을 들였지만 어진제 행장은 유혹을 뿌리쳤다.
그는 "소형 은행들도 장부가치 몇 배 이상으로 팔려나가던 때라 200억 달러에 지분을 넘길 수도 있었다"면서도 "국제 금융시스템의 불안한 현실을 감안하고 제의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빠져 나가면서 위기에 내몰린 동유럽 금융기관들의 현실을 보면 어진제 행장의 선견지명이 빛을 발한 것이다.
세계적인 컨설팅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부실대출 예방과 재무 능력, 주주 구성 등의 면에서 이쉬은행을 가장 안전한 투자처로 꼽았다.
하지만 10년 전 어진제가 행장 자리에 올랐을 때만 해도 이쉬은행은 지금처럼 안전한 은행이 아니었다. 그는 전임자가 부실 대출 스캔들로 물러나면서 갑작스럽게 행장에 올랐다. 어진제 행장의 개혁 드라이브도 번번이 주주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쉬은행은 터키 공화국을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소유였다가 지금은 보수 야당인 인민공화당(CHP)이 28%의 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어진제 행장은 변화를 거부하는 주주들을 설득하기보다는 전통을 중시하는 기존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대신 은행의 정치적인 중립을 위해 은행 연기금이 41%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점을 활용해 이쉬은행의 이미지를 '보스 없는 민간은행'으로 만들어 나갔다. 어진제 행장은 이를 이쉬은행 안정성의 비결이라고 강조하고 "이쉬은행이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공공기관 역할을 하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1980년대 민영화된 영국 브리티시텔레콤(BT)의 사례를 본보기로 일반인들에게 주식을 공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주식시장에 대한 불신이 깊은 터키 투자자들이 10%의 지분을 보유하게 되는 성과를 올렸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어진제 행장이지만 경영자로서의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소매금융은 물론 IB 부문에서도 경쟁력을 강화하려고 전력을 다하고 있다. 또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그는 "터키 은행권은 규모가 두배는 더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진제 행장은 올해 자산 규모를 10% 늘리고 현재 수익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데 전망은 긍정적이다. 최근 터키 정부가 내수 진작을 위해 세제를 완화한 데다 단기채와 장기채간 금리 격차로 기준금리가 인하된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정은선 기자 stop1020@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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