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산·면책자들이 은행연합회를 상대로 거액의 집단소송을 제기하는 등 금융권의 차별에 반발하고 나서면서 이들의 경제·사회적 위치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불가피해졌다.
현재 파산·면책자에 대해서는 법원이 조기 회생을 위해 면책 결정을 내린 만큼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가능하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인식과 금융권의 채무를 변제하지 않은 악성 채무자이기 때문에 징벌적 차별을 가해야 한다는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과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파산·면책자를 금융소비 계층으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가능하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데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 면책자를 둘러싼 '쩐'의 장벽
현재 파산·면책자들은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은행연합회는 이들의 파산기록을 '특수기록(1201)'으로 분류해 금융기관에 제공해왔다.
신원 조회 결과 특수기록이 발견되면 대출 신청은 물론 카드발급과 할부금융도 이용할 수 없다.
연합회는 지난 2일부터 신용정보법 감독규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파산기록을 '공공정보'로 분류하고 보존기간도 7년에서 5년으로 줄였지만 파산·면책자에 대한 차별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면책자 클럽의 허진 대표는 "5년 간은 금융기관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라며 "기존에는 연합회 신용정보관리규약의 적용을 받았지만 신용정보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법적 울타리까지 완성된 셈"이라고 비판했다.
민간 금융기관 뿐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공적 지원책에도 파산·면책자에 대한 배려는 전무하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친서민 정책 '결정판'으로 불리는 미소금융재단의 지원 대상에도 파산·면책자는 제외돼 있다.
허 대표는 "제도권 금융기관을 이용할 수 없으니 고금리 사금융으로 몰릴 수 밖에 없다"며 "파산·면책자 대부분이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하며 소득을 벌고 있는데 이같은 차별을 용인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집단소송을 이끌고 있는 법무법인 지평지성의 금태섭 변호사는 "파산 제도가 활성화하면서 면책자가 40만명을 넘고 있는데 아직까지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를 빌미로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은 통합도산법의 취지에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 파산자 급증…금융기관이 '봉'인가
지난 2003년 이후 카드사태, 금융위기 등을 겪으면서 파산·면책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지난 2004년 1만2000명 수준이던 파산·면책자는 지난해에만 11만9000명이 추가되는 등 892% 급증했다. 법원의 파산 선고 비율도 90%를 상회하고 있다.
면책은 말 그대로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던 채권을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으로 금융기관 입장에서는 건전성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익명을 요구한 금융권 관계자는 "돈을 떼 먹은 사람이 다시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누가 빌려주겠느냐"며 "금융은 신뢰가 가장 중요한 만큼 면책자에 대한 일정 정도의 불이익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여신을 취급하는 입장에서 면책자가 가장 무섭다"며 "연합회도 금융기관의 요구를 받아들여 파산기록을 공유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 차별 정당화 위험, 보존기간 등 완화해야
정치권과 전문가들은 파산·면책자에게 일정 기간의 자기반성 시간을 부여하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금융권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유원일 창조한국당 의원은 "최근 파산기록 보존기간이 7년에서 5년으로 줄었지만 이마저도 가혹한 측면이 있다"며 "2~3년 정도면 합리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밝혔다.
유 의원은 "미소금융을 포함해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등 공적 지원까지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문제"라며 "국정감사 과정에서 금융위원장에게 2년으로 완화하는 방안을 권고했지만 모럴헤저드에 대한 우려로 거부했다"고 말했다.
참여연대에서 시민경제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는 "기록 자체를 보존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지만 보존기간과 기록을 활용한 차별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할 수는 있다"며 "정의의 관점과 효율의 관점을 두루 살펴 합리적인 방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은행연합회로 신용정보가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는 의견도 있었다.
이성남 민주당 의원은 "연합회는 비영리 단체이면서 이익단체이기도 하다"며 "금융당국의 검사와 감독을 받지 않기 때문에 투명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연합회가 수집한 신용정보 자료가 방대하다보니 편의성 또는 관행적으로 연합회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며 "연합회의 기능을 재설정하기 위한 입법을 추진 중"이라고 전했다.
김 교수는 "파산기록은 금융기관 입장에서 요구할 만한 정보이기도 하고 면책자의 경제활동을 저해한다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며 "이해관계가 대치하고 있는 만큼 법원의 판결로 해결하기는 어려우며 국회나 정부의 입법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경제= 이재호 이미호 기자 gggtttppp@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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