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파고는 중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중국의 수출 30%를 담당하고 있는 광둥(廣東)성은 피해가 막심했다. 2008년 한해에 7만여개의 기업이 도산했고, 수만명의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전세계 팩시밀리, TV, 에어컨의 절반을 생산해내는 광둥성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적인 수요급감으로 인해 공장을 돌리지 못하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당시 홍콩의 다궁보는 광둥에는 2007년 4800개의 완구업체가 있었지만 2008년 말에는 1500개밖에 남지 않았다며 하루에도 몇천명씩의 실업자가 출현하고 있고 보도했다. 중국 내외부에서 광둥성 정부의 강력한 재정정책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했다. 긴급 자금지원을 통해 도산을 막자는 여론이 팽배했다.
◆등롱환조(騰籠換鳥)
하지만 2007년 12월 부임해온 후 줄곧 등롱환조(騰籠換鳥•새장을 들어 새를 바꾼다) 정책을 펴온 왕양(汪洋) 광둥성 서기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왕양이 제창한 ‘등롱환조’는 낙후한 기업은 광둥성에서 과감히 퇴출시키고 그 빈자리를 첨단기술기업, 자본집약적기업, 고부가가치기업으로 채우자는 게 기본방향이다.
그는 취임초기 “우리는 노동집약적 기업들이 광둥의 동쪽끝이나 서쪽끝으로 이동해가길 원한다. 만약 광둥성을 나간다고 하더라도 붙잡지 않으며, 심지어 중국을 떠난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못을 박았다.
이 같은 방침의 일환으로 2008년 광둥성정부가 최저인건비를 올리고 노조의 파업을 사실상 방임하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인상됐고, 이는 지역 기업들의 인건비 부담 증가로 이어지던 차에 글로벌 금융위기마저 덮친 것.
왕양은 쏟아지는 비난에도 2008 10월 “광동의 펀더멘탈은 튼튼하다. 곤란이 있더라도 자신감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자. 각양각색의 반대의견에 흔들리지 말자“며 등롱환조 정책을 고수할 뜻을 분명히 했다.
이어 그는 “모두들 광둥성의 경제를 걱정하고 있고, 많은 이견들을 쏟아내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 어떤 이들은 올해 5만개의 기업이 도산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 기업이 도산했는가. 유명한 기업이 도산했는가. 아니다. 도산한 기업들은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노동집약적 생산구조를 지니고 있다. 경쟁력이 뒤떨어진 기업이 외부환경에 휩쓸려 도산하는 것은 시장경제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구조조정의 과정에 있으며, 지금 적극적으로 구조조정을 해나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물론 성정부는 사회보장체계를 동원해서 실직자들은 구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낙후한 기업들을 살리기 위한 정책을 쓰지 않을 것이다“고 일갈했다.
왕양의 발언이 중국사회에 불러온 파장은 엄청났다. 언론에서는 ”왕양이 광둥성 2000만 농민공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평론을 게재했다. 일부 학자들은 ”금융위기의 파고는 높지만 광동성정부의 정책으로 인한 파고는 더욱 높다”며 왕양을 겨냥했다. 또한 “광둥성 정부가 만약 편향된 정책으로 일관한다면 도미노 도산사태가 벌어져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는 경고도 쏟아졌다. 중국내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국무원 발전연구센터 연구원인 우징롄(吳敬璉)마저 ”광동성의 일부지역에서 산업구조조정의 개념이 잘못 적용되고 있으며, 잘못된 정책이 기업을 도산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에둘러 왕양을 비판했다.
◆원총리의 걱정에도 굽히지 않은 소신
사태가 심각성을 더하자 2008년11월 원자바오 총리가 급기야 광둥을 찾았다. 그는 지역경제를 시칠한 후 왕양과 황화화(黃華華) 광둥성 성장이 있는 자리에서 ”신속하고, 과감하면서도 정확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처리하라“고 주문했다. 어서 빨리 대규모 재정정책을 써서 도산을 막고 실업자 급증사태를 막으라는 뜻이었다.
당시 상황에서 강한 발언이었지만 이날 광둥성의 유력 기관지인 양청완바오(羊城晩報)는 원총리의 발언을 1면하단에 조그맣게 소개할 뿐이었다. 이로써 광둥성의 등롱환조 정책은 단순 경제정책에 대한 논란이 아닌 정치적인 논쟁으로 번져나갔다.
외신들은 ”원총리가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최측근인 왕양을 공개비판했다“ 고 타전했다. 또한 ”원총리가 공청단파에 일격을 날렸다“ ”중국정치권력에 모순이 터져나왔다“ ”왕양의 경제실력은 좋지만, 정치력은 약하다“는 기사들이 쏟아져나왔다.
왕양이 제창한 등롱환조 정책은 정치갈등으로 비춰지면서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모이면 등롱환조 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했고, 이 자리에 원 총리와의 갈등을 이야기했다. 왕양은 일순간에 중국 구조조정정책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후 왕양은 가급적 발언을 자제하면서도 자신의 등롱환조 정책을 고수해나갔다.
등롱환조 논쟁이 일단락된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2009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광둥대표단을 만나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전 방식을 전환하고 구조조정을 진행할 절호의 기회임을 강조했다. 후 주석이 “반드시 굳건한 믿음을 갖고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모두 실제에서 출발하여 중앙이 결정한 정책을 철저하고 창조적으로 실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후주석이 왕양의 등롱환조정책을 재차 승인한 것임에 다름이 없었다.
당시 홍콩의 명보는 왕양의 한 측근인사의 입을 빌어 “오늘은 광둥 대표단 및 광둥 전성 인민이 충분히 기뻐하고 감격할 만한 하루”라며 후진타오의 연설에 감격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후 왕양은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밀어붙였고 그는 등롱환조 정책을 통해 소신있는 관료로서의 강한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중국 최초의 산업구조조정 실험
왕양의 등롱환조 정책은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한 정책이다. 광둥성에서 퇴출시켜야 할 기업들은 실존하고 있지만 새로 들여올 기업들은 정해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등롱환조정책은 그동안 방향은 맞으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는 비평을 받아왔었다.
왕양 역시 구조조정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2011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광둥성은 최근 몇 년동안 대대적인 개혁을 해왔지만 아직도 자금상, 기술상의 문제가 있으며 관료들의 능력에도 문제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 기업들의 기술수준이 선진국에 미치지 못하며 인재들의 전문성이나 창의력이 아직 적정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다. 산업구조조정은 어려움이 많고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반드시 실현시켜 내야할 과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임금인상을 지속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왕양은 “광둥성은 지난해 최저임금을 21.1% 올렸으며, 올해에 추가로 18.6% 인상할 예정이다. 노동자임금인상은 소득분배구조 개선에 도움이 되며 인건비 상승은 기업들로 하여금 기술개발에 투자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것이다. 노동집약적 산업 위주의 구조를 탈피한다면 최근 빚어진 ‘농민공 부족사태’의 영향도 받지 않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왕양은 이 자리에서 첨단기업 유치와 지원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광둥은 중국을 이끌어나가야 하며 첨단과학기술에 기반을 둔 기업들을 유치해 나갈 것”이라며 “광둥에는 이미 전국 각지 과학연구기구와의 협력이 진행중이며, 적극적으로 창조적인 인재를 흡수하고 있다. 세계 일류 수준의 과학연구단체에 최고 1억위안의 연구경비를 보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왕양의 등롱환조 정책은 광둥성의 발전 뿐만 아니라 중국전체의 발전과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현재 중국은 전국적으로 산업구조조정을 꾀하고 있다. 더 이상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에 얽매이지 않고, 전국적으로 고부가가치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는 거시정책을 펴고 있다. 왕양의 등롱환조는 이에 정확히 부합한다.
또한 광둥성을 떠난 기업들은 중국 내륙으로 진출해 공장을 세우고 있다. 이는 중앙정부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서부대개발과 내륙지방 내수육성책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등롱환조의 대표적인 실천방안인 광둥지역 노동자의 임금인상책 역시 후 주석이 주창한 ‘조화사회’나 원 총리가 강조하고 있는 ‘인민의 행복감’에 부응한다.
왕양의 등롱환조는 광둥성에 국한된 정책이지만 사실상 중국 전국적인 경제상황을 내다본 대국적인 포석인 것. 이는 그의 꿈이 광둥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있음을 의미한다.
◆차기 부주석, 정협주석 유력시
왕양은 그동안의 성과와 명망, 그리고 후 주석의 신임을 바탕으로 2012년 10월에 열릴 공산당 제18대 전국대표대회에서 상무위원 진입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콩, 대만의 매체들이나 정치평론가들 미국의 연구소들의 논문은 모두 그를 유력한 상무위원 후보자로 올려놓고 있다.
특히 2010년 1월에 집중적으로 쏟아졌던 관영언론들의 왕양에 대한 찬사는 이 같은 분석의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중국 관영 신화사 산하 ‘재경국가주간(財經國家週刊)’은 2010년 1월호에서 “광둥에서의 왕양의 정무”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부하 직원에게 엄격한 왕 서기가 55세의 나이에 흰머리가 있어도 염색하지 않는 등 고위 간부로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자주 현지 시찰을 나서지만 언론에 관련 보도를 삭제하도록 하는 등, 묵묵하게 행동한다고 밝혔다. 관영 인민일보 산하 주간지 다디(大地)도 ‘소장파 왕양의 정치 궤적’ 편에서 “풍부한 지방 근무 경험과 중앙에서의 단련 과정을 거쳤으며, 공청단파의 색채가 선명한 소중한 경제 전문가”라고 극찬했다. 또한 매체는 “왕양은 이미 난관을 넘었다. 그의 미래는 전도양양하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능력을 따지자면 상무위원 중에서도 차기 국무원의 총리나 부총리직으로의 영전이 알맞지만 그 자리는 리커창 상임부총리와 왕치산 부총리가 버티고 있어 쉽지 않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중국의 한 정치학자는 “왕양은 상무위원에 진입한 후 중국 산업구조조정을 지휘할 힘을 지니게 될 것이지만 그의 직장은 국무원(총리나 부총리)이 아닐 것이다. 국가부주석이나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직이 유력해 보인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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