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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시대 핵심100인]<5>왕양-②극빈층 노동자의 초고속승진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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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4-1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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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왕양(汪洋)은 1955년 3월 안후이성 쑤저우(宿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으며 어머니는 소학교 선생님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몸이 좋지 않아 어머니가 홀로 생계를 꾸려나가다시피 했다. 때문에 왕양은 8살때부터 짐수레를 미는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왕양은 소학교에 입학해서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 1972년 17세이던 왕양이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했다. 생활은 몹시 곤궁했으며 당시에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었던 탓에 왕양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72년 6월 쑤현(宿縣)의 한 식품공장에 노동자로 취직했다.

왕양은 부지런했고, 총명한 만큼 쉽게 일을 배웠다. 기술적으로도 우수했고 인간관계도 좋았으며 리더십이 있어서 생산소조의 조장을 거쳐 직장주임으로 발탁됐다. 입사한지 3년이 지난 1975년 그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왕양은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에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 문학, 경제, 과학기술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섭렵했으며 ‘사상이 확실하고 지식을 갖춘 공산당 간부’가 됐으며 1976년 쑤현의 57간부학교(마오쩌둥의 ‘5•7지시’에 따라 문혁기에 각지에 설립된 간부재교육 학교)의 교원으로 임용됐다. 이후 교원연구실 부주임, 학교당위원회 위원으로 3년만에 초고속 승진했다.

왕양은 57간부학교 교원을 맡고 있을 때 인연을 만난다. 당시 동료였던 주화성(祝華生)은 왕양에게 그의 누이인 주화광(祝華光)을 소개해 줬다. 주화광의 아버지 주젠위안(祝建遠)은 문화대혁명 전에 현급의 중층간부인 쑤현의 부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는 문혁기에 비판을 받았지만 70년대 중반 본래 직장으로 복귀했다.

문혁이 끝난 후 왕양은 주화광의 아버지가 구입한 책들을 그로부터 빌려 읽었다. 왕양의 총명함과 근면함, 인품을 높이 산 주젠위안은 주화광과 왕양의 결혼을 승락했으며, 이후 왕양이 쑤현 공청단 부서기에 취임하던 1981년 결혼을 한다. 그때 왕양의 나이 26세였다.

결혼 후 두 사람은 딸을 낳았다. 딸은 베이징대학을 나와 지금은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공청단에서 후 주석 만나

문혁이 종결되고 개혁개방의 기운이 꿈틀대던 무렵인 1970년대 말 중국공산당은 우수한 청•장년 간부 양성과 발탁에 힘썼다. 중국공산당 중앙당교도 중앙의 청•장간부 양성 지시에 따라 각종 청•장년 간부양성 과정을 개설해 지방의 당 조직으로부터 추천받은 간부후보생을 양성했다.

1979년 장인의 추천을 받은 왕양은 중앙당교 이론선전간부 정치경제학습 과정에 입학했고, 중앙당교에서 일 년여 양성교육을 받는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쑤현지구 공청단 부서기로 발탁됐다. 그는 10년만에 식품공장의 노동자에서 쑤현지구의 공청단부서기로 초고속승진을 한 것. 1982년에는 공청단 안후이성 선전부 부장으로 옮겼으며 1983년에 28세의 나이에 안후이성 공청단 부주석에 오른다. 
왕양 서기가 지난해 11월 12일부터 27일까지 개최된 광저우아시아게임에 참석해 자원 봉사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왕양이 안후이성 공청단부서기에 취임했을 때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상무서기를 맡고 있을 때였다. 왕양은 업무 관계로 후 주석을 비롯해 왕자오궈(王兆國) 전인대 부위원장, 리위안차오(李源朝) 중앙조직부장, 리커창(李克强) 부총리, 류윈둥(劉延東) 국무위원 등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 때문에 왕양은 공청단파로 분류되지만, 그는 지근거리에서 후 주석과 리커창 부총리 등과 교분을 쌓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청단파 ‘성골’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게다가 왕양이 공청단 중앙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안후이성 공청단에만 머물렀던 점도 그가 당시 후 주석과의 교분이 깊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후 커리어에서 후 주석의 신임을 얻어 공청단파의 핵심에 진입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30대 시장의 사상개혁, 덩을 놀래키다

1984년 왕양은 안후이성 정부로 들어갔다. 성체육운동위원회 부주임으로 청장급 간부가 됐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 살이었다. 그곳에서 4년을 일한 후 1988년 왕양은 퉁링(銅陵)시 시장에 임명됐다.

안후이성은 당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반대중과 관료들의 사고방식이 극히 보수적이었다. 관료들은 ‘홍두문건(紅豆文件, 당과 정부의 지도기관이 내놓은 공식문서)’에만 기초해 문제를 처리했을 뿐 융통성을 찾기도, 신속한 일처리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때문에 덩샤오핑(鄧小平)이 추진하던 개혁개방에도 미온적이었다.

왕양은 퉁링시가 구리광산 한 곳에만 의지하며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모두가 변화를 도모하려 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기에만 급급했다. 그는 퉁링시장으로 3년을 근무한 후 문제는 시민과 시 공무원들의 사상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1991년 11월 지역신문인 퉁링일보에 ‘잠에서 깨라, 퉁링’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게 했다. 글은 적나라하게 퉁링의 낙후함을 파헤쳤다. 안후이성의 다른 지역에 비해 경제력이 떨어졌으면서도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아 격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글에서 퉁링은 경제건설에 대한 관념부족, 상품경제관념부족, 정신적인 나태, 개혁에 대한 의지부재, 대외개방관념 부족 등 5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강하게 질타했다.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공개된 데이터에 날카로운 분석이 더해져 이 글은 소문을 타게 된다.

안후이성 성정부에서는 왕양에게 사태가 확대되지 않도록 하라는 무형의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퉁링의 소문을 들은 베이징의 경제일보는 “잠에서 깬 것은 퉁링만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특집란을 개설해 전국적인 사상개혁을 주창했다. 큰 반향이 일었고 왕양의 지명도는 높아졌다.

왕양의 평판은 덩샤오핑의 귀에도 들어갔다. 1992년 덩샤오핑이 남순강화를 마치고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안후이성 펑푸(蚌埠)역에서 왕양을 접견했다. 베이징에 돌아온 덩샤오핑은 주룽지(朱鎔基)에게 “안후이의 젊은 왕양은 사상이 있다. 양성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왕양은 시위원회 간부들을 거느리고 상하이시와 장쑤(江蘇)성, 저장(浙江)성을 시찰해 그곳의 경험을 배웠다. 동시에 퉁링에 자본을 도입해 구리를 중심으로 하는 비철금속공업 체계를 만들었다. 동시에 다각도 경영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퉁링은 안후이성 북부 도시 가운데 GDP가 매년 12% 전후로 증가하는 성장률이 가장 빠른 도시가 됐다.

왕양은 또 공공교통망 확대, 과학기술단지의 설립 등으로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1993년 왕양은 안휘성 부성장으로 승진하며, 38세의 나이로 전국에서 가장 젊은 부성장이 됐다. 1995년에는 성위원회 부서기를 겸임했다.

◆후진타오, 원자바오의 신임을 얻고

그는 중국사회가 이미 이념에서 벗어나 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발전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학력과 지식이 이후 간부로 장래에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임도 알았다. 그는 1993년부터 95년까지 중국과학기술대학 관리과학학부의 관리과학전공연구생과정에 들어가 공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1999년 3월부터 5월까지 중앙당교 성•부급 간부연수반에 들어가 후진타오 교장의 문하생이 됐다.

그리고 조직과 인사를 담당하고 있던 후진타오가 제안하고 주룽지가 동의해 왕양은 1999년 초에 베이징으로 전임됐다. 왕양은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 겸 당조부서기에 임명돼 국가의 계획 제정 등을 담당했다. ‘제11차5개년계획’ 제정에 참여한 가장 젊은 부주임이 됐다.

원자바오는 각 방면과 협조하면서 과감한 판단을 내리는 왕양의 능력을 높이 샀다. 그가 총리에 임명되던 2002년 왕양을 장관급인 국무원 부비서장에 발탁했다. 국무원판공청 상무활동을 담당해 중앙과 지방, 각부와 위원회 사이에 연락과 협조를 진행하는 중추역을 맡았다. 왕양은 원자바오과 협력해 여러가지 문제를 처리하고 고도의 재정경제 수완을 발휘했다.

2005년12월 왕양은 원자바오의 지명을 받고 중앙정치국상무위원의 동의를 받아 중국공산당 충칭(重慶)시 서기에 임명된다.

그는 충칭에 도착하자마자 “사람의 생명은 가장 귀한것이며, GDP가 사람의 생명에 우선할 수 없다”고 일성했다. 충칭지역의 혹독한 근무환경과 산업재해를 지적한 말이었으며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왕양 서기는 최근 열린 광동성 언론인 모임에서 광동성 매체들이 2011년 양회 관련 보도를 매우 성공적으로 해냈다며 찬사를 보냈다.


◆충칭 도시개혁을 총설계하다

2007년6월 왕양은 15년 예정으로 충칭의 중심 시 지역의 인구를 980만 명으로 늘이고, 더불어 3만㎢ 범위에 세 개의 고속도로와 복합 기능을 가진 4대 도시를 건설하며, 그 구역에 거주할 1600만 명이 한 시간 내에 도심지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도시건설이 완료되면 누구나 사회공공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며 청사진을 발표했다.

4대도시계획에 따르면 푸링(涪陵)은 공업기지와 도시 종합 서비스 기능을 갖춘 도시로, 장진(江津)은 에너지 기지•물류 기지로, 융촨(永川)은 장강(長江) 경제 벨트와 청두(成都)•충칭을 잇는 경제 벨트의 핵심도시로, 창서우(長壽)는 중공업 화학, 야금, 석유, 천연가스 산업단지의 핵심지역으로 건설된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연간 생산량 300만 톤의 충칭강철공장은 이미 창서우구 얀자(晏家) 공업단지로 이전시켰다. 충칭시 최초의 지하철도 2007년6월부터 정식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인구 3100만 명 가운데 2000여 만 명이 농민인 충칭시의 현실을 고려해 국무원에 건의해 2007년6월 충칭시에 ‘도시-농촌 통일발전개혁 시범구 설립계획’을 인가받았다. 계획은 도시와 농촌의 경제 격차해소를 위한 새로운 도시 발전 모델을 담고 있다.

황치판(黄奇帆) 상무부시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산악 지역에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개발업자에는 도로에 인접한 일부 토지를 취득할 있도록 해 민간투자를 유치하도록 했다.

왕양은 2007년 광둥(廣東)성 당서기로 발령났고 그해 11월30일 충칭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임을 아쉬워했다. 현지 기업가인 랴오창광(廖長光) 씨는 “그는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려고 애썼고, 청렴했다. 서민에게는 친근하고 올바르며 진실하게 대했다”면서 “한번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고 기업들이 보낸 기념품도 모두 돌려보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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