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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시대 핵심100인]<10>류윈산-③타자수 출신, 선전분야 최고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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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5-0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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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 조용성 특파원) 류윈산(劉雲山) 중앙선전부 부장의 원적은 산시(山西)성 신저우(忻州)지만, 출생지는 네이멍구(內蒙古) 툼드(土默特 투모터)유기(右旗)다. ‘기’는 소수민족이 많은 네이멍구 자치구 특유의 행정구역으로 다른 지역의 현(縣)에 해당한다. 류윈산은 네이멍구 지닝(集寧)시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사회첫발을 내딛었으며, 1969년 투모터 유현의 타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타자원으로 일을 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그는 문장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통신원이 되어 자치구에 보고를 하고 신문초고를 전보로 보내는 일을 했다. 당시 그는 인민일보나 신화사 등 지방신문들이 본사기자, 본사통신원의 명의로 기사를 게재했다.

평범하던 그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74년 그보다 4살 위인 톈충밍(田聰明) 당시 신화통신 네이멍구 분사 기자를 만나면서부터다. 류윈산은 톈총밍의 추천을 받아 그해 말 신화사 기자로 채용됐다. 이듬해부터는 톈총밍과 함께 신화사 네이멍구 분사에서 일을 한다.

4년후인 1978년 저우후이(周惠)가 네이멍구 공산당위원회 서기로 보임됐다. 저우후이는 톈총밍을 맘에 들어했고 신화사 네이멍구분사에서 있던 그를 자신의 비서로 발탁한다. 이후 톈총밍은 1980년 자치구 당위원회 정책연구실 부주임에 오른다. 톈총밍의 지원을 받은 류윈산 역시 저우후이의 신임을 얻어 1981년 중앙당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고, 1982년에는 공청단 네이멍구 부서기에 오른다. 류윈산이 당시 공청단 제1서기였던 왕자오궈(王兆國) 전인대 위원장이나 서기처 서기였던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류옌둥(劉延東) 서기 등 공청단 세력과 인연을 맺은 것도 이 시기다. 



◆38세에 찾아온 행운

1983년 톈총밍은 네이멍구 비서장에 올랐으며 정책연구실 주임을 겸임했다. 톈총밍은 류윈산을 천거해 1984년 네이멍구 선전부 부부장으로 올라서도록 한다. 1985년에는 공산당 중앙에서 네이멍구의 공산당 간부 중 30대 인재 한 명을 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저우후이는 톈총밍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아타깝게도 톈총밍은 당시 40세를 갓 넘겼었다. 때문에 저우후이 서기는 톈총밍의 추천을 받아 류윈산을 중앙에 천거했다.

이로써 류윈산이 1985년 9월 중국 공산당 제12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에서 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오르게 된다. 당시 그는 38세로 최연소 후보위원이었다. 제2세대 핵심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집권하던 시절 그와 함께 중앙위원이 된 사람은 대부분 제3세대 인사였다.

4세대 지도부 역시 후진타오 주석과 우방궈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는 원자바오 국무원 총리,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 모두 그에 비해 각각 2년, 7년, 12년씩 늦게 중앙위원회에 진입했다. 후 주석은 1982년 후보위원이 됐고 우 위원장은 류 부장과 같은 해 후보위원으로 선출됐다.

1986년 류윈산은 후보위원의 신분으로 네이멍구 선전부장으로 승진했다. 네이멍구지역의 당 간부들은 류윈산은 자치구 선전부장을 하던 기간에 무척 겸손했고 업무를 중시여겼다고 평가하고 있다. 류윈산은 네이멍구 지역을 샅샅이 돌아다니며 선전작업을 하고 지역의견을 수렴하는 등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46세 차관급으로 베이징 입성

1990년 톈총밍은 네이멍구를 떠나 티베트의 부서기로 이임한다. 당시 티베트 서기는 후진타오였다. 톈총밍이 떠난후 그는 네이멍구의 지방으로 가서 기층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91년 그는 네이멍구 비서장을 그만두고 츠펑(赤峰)시 서기로 발령받는다. 1992년 네이멍구 부서기로 승진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츠펑시에서 서기를 맡았다. 그해 10월 열린 당대회에서 그는 다시 한번 후보위원으로 뽑히게 된다.

이후 1993년 그는 46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중앙선전부 부부장으로 베이징에 입성한다. 당시 중앙선전부장이었던 딩관건((丁關根)은 류윈산을 자신의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당시 중앙선전부 관료들은 류윈산에 대해 머리가 정말 비상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 때부터 류윈산은 그동안 자신을 지원해준 톈충밍보다 앞서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류윈산은 아직까지도 톈총밍을 선배로서 깍듯하게 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톈총밍은 2000년에서 2008년까지 신화사 사장을 역임했다.

◆역대 최연소 선전부장

2002년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후진타오 주석에게 당 총서기 지위를 넘겨주던 해 장쩌민은 여러명의 심복을 후 주석 주변에 심어놓았다. 이들은 장 전주석의 퇴임후에도 여전히 유지되던 영향력의 원천이 된다.

허궈창(賀國强) 당시 중앙조직부장(현 기율위원회 서기)과 함께 대표적인 장쩌민 측근인사가 바로 류윈산이다. 그는 2002년 딩관건의 후임으로 당 선전부장에 임명됐다. 류윈산은 장 주석의 정치이론 개발에 깊숙이 간여한 것은 물론 그의 노동자윤리운동도 지원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쩌민은 선전부 부장을 놓고 류윈산과 바이커밍(白克明) 허베이성 서기, 천쯔리(陳至立) 국무위원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을 했지만 결국 선전부 부부장으로 9년을 근무해온 류윈산을 선택한다. 이로써 네이멍구의 한 농촌 타자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33년만에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와 언론을 총괄하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당시 류윈산은 55세로 역대 선전부장 중 최연소를 기록했다.

중앙선전부는 중앙조직부와 함께 공산당 중앙판공실의 양대 핵심부서로 은 역대 공산당 정권 중에서 최고위층의 심복이 책임자를 맡는 요직이다. 중앙조직부가 간부의 승진, 이동, 공산당과 국무원의 인사와 조직을 통제하는 반면 중앙선전부는 정부 및 공산당 고위간부의 선전과 언론통제를 담당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시절에는 중앙선전부가 조직부에 앞섰으나, 장쩌민이 등장한 이후 조직부가 선전부의 상위부서로 바뀐다. 류윈산은 이후 선전부 부장으로 기사방향과 편집방향을 설정해 미디어 장악과 통제를 강화했고, 지시를 어기거나 민감한 문제를 보도한 일부매체에 대해 정간조치를 내렸다. 폭동이나 시위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대한 보도를 할 경우 신화사 보도와 통일시킬 것을 지시했다.

◆리창춘과 찰떡궁합 과시

그의 상급자는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이다. 1998년부터 광둥성 서기로 활동해 온 상하이방의 거두 리창춘은 2002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된 후에는 정신문명건설위원회 주임이 되어 선전부문을 맡고 있다.
리창춘은 선전이나 이데올로기계통에서 일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류윈산의 의견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류윈산은 결코 자기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각에서 류윈산이 ‘자신의 의견을 내지 않고 리창춘의 의견만을 내세우는 수행원’이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리창춘의 의견이 곧 류윈산의 의견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2009년 이후 류윈산은 부쩍 언론노출을 늘렸으며 자시감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차기 이데올로기담당 상무위원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것. 



◆아들도 초고속승진, 금융업체 회장

류윈산의 아들인 류러페이(劉樂飛)는 중신산업기금(中信産業基金)의 사장과 수석투자담당관을 거쳐 현재는 회장겸 CEO로 활동하고 있다. 1973년생인 그는 39세의 나이에 중국의 대표적인 금융그룹인 중신집단(中信集團, CITIC)의 주력계열사이며, 중신증권이 대주주로 있는 중신산업기금의 회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류러페이는 1995년에 런민(人民)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사회과학원에서 석사공부를 했다. 하지만 석사학위는 취득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영어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학위를 따는 데는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후 2006년에는 상하이에 있는 CEIBS에서 MBA코스를 졸업했다. 이 곳에서 재무금융분야 공상관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런민대학을 졸업하던 1995년 국무원 재정부에 취업한 류러페이는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쳐 부처장 직위까지 올라섰다. 그가 25세때인 1998년에는 국가야금부 산하 국영기업의 부총경리로 자리를 옮겼으며, 2004년에는 중국 인허(銀河)증권의 투자관리총부의 총경리가 됐다. 33세때인 2006년에는 중국 최대의 보험회사인 중궈런서우(中國人壽)의 수석투자관(최고투자담당임원, CIO)에 올랐다.

33세의 젊은이가 중국자본시장에서 가장 큰 기관투자가인 중궈런서우에서 약 1조위안의 자금을 주무르는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이후 2009년 1월 류러페이는 중신그룹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중신산업기금으로 자리를 옮겼고, 중신산업기금 산하의 사모펀드인 몐양커지청(綿陽科技城)기금의 자금모집을 총괄했다.

류러페이의 주도하에 2010년1월 90억위안(한화 약 1조5000억원)의 자금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이 같은 성과로 그는 중신산업기금의 회장에 취임하게 된다.

몐양커지는 대형금융기관과 국유기업, 상장사와 저명한 민간기업에 투자하며, 모집금중 20억위안은 전국사회보장기금으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냈다. 그는 중국 인터넷 포털 시나닷컴과의 인터뷰에서 “중신산업투자기금을 미국의 KKR 같은 세계 정상급 사모펀드로 키우겠다”며 “90억위안의 사모펀드는 성장기와 성숙단계에 있는 기업에 집중 투자해 수익률을 극대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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