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와이티 유럽개혁센터 선임 연구원은 13일 블룸버그를 통해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7개국) 내 힘의 균형은 냉전시대를 떠올리게 한다"며 "양측은 너무 끔찍해 쓰지도 못할 전쟁 억지력을 휘두르며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힘의 균형은 결국 (그리스의) 디폴트를 촉발하지 않는 선에서 양측이 채무 만기를 맘껏 주무를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ECB가 누구도 원치 않는 그리스의 디폴트를 억지력으로 삼아 채무 만기 연장을 두고 독일과 옥신각신하고 있지만, 결국 입장을 바꿀 여지가 크다는 의미다.
장 클로드 트리셰 ECB 총재는 당초 그리스의 채무 조정은 일체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특히 지난 9일에는 민간 투자자들이 비용 부담을 져야 하는 채무 조정은 엄청난 실수가 될 것이라며 일각에서 흘러나온 차환(롤오버)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이 그리스에 대한 분담금 지급을 중단할 수 있다고 엄포 놓자 트리셰는 입장을 돌렸다. 민간 투자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면, 그리스 만기 채권을 신규 채권을 매입해 해소하는 차환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트리셰의 입장 변화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에 ECB의 규율을 깨기 시작했다. 금융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에 무차별적으로 자금을 투입한 데다 지난해 5월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신청하며 위기의 전이 리스크가 커지자 유례 없이 재정위기국들의 채권을 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설립 조약상 ECB는 발행시장에서는 채권을 매입할 수 없다.
바클레이스캐피털에 따르면 ECB는 지난해 5월부터 10주 전 채권 매입을 중단하기까지 750억 유로 규모의 채권을 사들였다. 이 중 400억 유로 어치가 그리스 채권이다.
트리셰는 여전히 그리스 부채 만기를 7년 연장하자는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의 제안에는 반대하고 있다.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등 다른 재정위기국에 연쇄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국제 신용평가사들도 만기를 7년 연장하는 것은 디폴트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트리셰의 입장 변화 여지가 아직 남아 있다고 보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오는 23~24일 예정된 정상회의를 통해 그리스에 대한 추가 지원방안을 매듭지을 방침이다. 소식통에 따르면 EU와 IMF가 마련한 그리스 지원책에는 450억 유로의 추가 구제금융과 각각 300억 유로 규모의 자산 매각 및 차환 수입이 포함돼 있다.
쇼이블레는 민간 부문 투자자들이 차환에 참여하려면 ECB의 지원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질 모에크 도이체방크 이코노미스트도 "민간 투자자들의 차환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ECB가 유통시장에서 자산 매입을 재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