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레스님 중광이 생전에 입었던 승복. |
(아주경제 박현주기자) 빠르면 5초, 또는 1분, 오래 걸릴때는 3년. 휘갈린듯, 낙서한 듯, 또는 도인처럼 그림을 그려냈다.
그는 80~90년대 연예인부럽지 않은 '스타 스님'이었다. 거침없는 기행과 독특한 작품으로 세상을 발칵 뒤집었다.
스님으로 화가로 작가로 영화배우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한 시절을 풍미했다.
미국 화단에서 '매드 몽크'로 '동양의 피카소'라는 찬사를 받으며 CNN, NHK에서 중광의 예술세계가 방영되기도 했다.
떠들썩하게 살았던 그는 "괜히 왔다 간다" 말을 남기고 2002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화업은 살아생전 극과 극의 평가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웬일일까. 이후 9년동안 그의 행적은 희미하게 사라졌다.
'걸레 스님' 중광(1935~2002). 생전, 불교계나 주류 미술계에서 이단아이자 기인으로 각인되어 있는 그가 다시 돌아왔다.
22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걸레스님’ 중광(重光)의 특별전 ‘만행 卍行’전이 개막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화단의 이단아이자 파계승으로, 정작 작품세계보다 기인적 삶이 더 큰 관심을 끌었던 중광스님의 예술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타계후 근 10년만에 처음 열리는 이 전시는 서화, 현대미술, 도자기와 행위예술 시 영화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던 스님의 열정을 느껴볼수 있다.
붓과 먹으로 달마와 학을 주로 그린 선화와 글씨, 아크릴과 브러시로 그린 추상과 구상의 유화작품, 도자기, 테라코타 등 150여 점과 스님이 직접 쓴 시 원고, 행위예술 모습을 담은 사진, 스님이 출연한 영화 ‘허튼소리’ ‘청송 가는 길’ 영상 등 50여 점이 선보인다.
중광스님이 1977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에서 낭송한 “나는 걸레/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라는 내용의 자작시 ‘나는 걸레’나 생전에 스님이 입고 다녔던 해진 옷도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중광의 작품을 ‘만물(萬物)이 부처다’ ‘만법귀일(萬法歸一)-모든 법은 하나로 통한다’ ‘나는 누구인가’ 등의 3가지 주제로 분류했다.
전시를 위해 30여명의 소장가들에게 1년간 작품을 모았다는 이동국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선(禪)을 코드로 동서를 넘나드는 중광예술은 천진(天眞)으로 집약된다"고 소개했다.
중광스님 전시기획자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 사진=박현주기자 |
그는 "중광예술의 생명력의 근원은 선으로,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되고 몸뚱아리를 먹통에 뒹굴려도 예술이 된다"며 "많은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과 어린이 형상뿐만 아니라 농도 짙은 에로티시즘마저도 중광의 천진무구한 본성이 드러나 중광 예술은 인간의 본성으로 돌아가자는 산정수행"이라고 설명했다.
중광의 작품속 화면은 동심과 성과 어머니와 같은 메시지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또 달마나 학에서 보이는 단 한번의 붓질이나 아크릴 범벅이 된 그림과 도자들은 추상 구상 서화 조각의 경계없이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중광스님. 동자, 66*43.5cm, 김옥수 소장 |
이번전시는 '어린아이 그림같은' 동심의 세계는 물론, 치졸하지만 치졸을 넘어선 그야말로 유치찬란천진난만하게, 종횡무진 선필을 휘둘렀던 중광스님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이동국 큐레이터는 “중광에 대해 대중이 기억하는 것은 그의 기행뿐이지만 그는 예술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던 사람”이라며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잊혔던 중광스님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이뤄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 개막에 맞춰 중광스님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 자리도 마련된다.
예술의전당 아카데미홀에서는 23일 오후 2시부터 중광스님의 작품세계에 관한 세미나가 열리고, 오는 8월6일 오후 2시에는 김수용 감독의 ‘나는 왜 ’허튼소리‘를 만들었나’가 특강이 이어진다.
또 스님의 가갸거겨 작품 이름을 딴 어린이 체험교실도 열 매주 3일간 열린다. 전시는 8월21일까지. 일반·대학생 5천원. 초중고생 3천원. (02)580-1300
중광스님. 남근상 |
◆ '걸레 스님' 중광= 본명은 고창률. 1935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1960년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출가, 스님의 길을 택했다. 여러곳의 사찰을 돌며 온갖 기행으로 1979년 조계종단으로부터 승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중광은 절간을 전전하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오현 스님을 만나 농암 '바위처럼 벙어리가 되어라'는 뜻의 법호를 받았다. 하지만 중광은 한곳에 머물거나 정진수행하는 것을 싫어했다. 무애의 길로 접어들어 기인으로 살면서 파격적인 선화를 그려내면서 화제를 모았다. 특히 단순하면서도 근엄한 분위기의 달마도는 중광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드러낸다.
중광스님은 예술에 심취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중하면서 대소변도 방에서 해결하고 자신의 남근에 붓을 달고 그림을 그린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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