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2허베이편> 2-1 "줘저우, 술로 흥한 장비 술로 망하다"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2-03-01 17:29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아주경제 배인선·김현철 기자) 삼국지연의는 장비를 평생 술독에 빠져 지낸 사람처럼 기술하고 있다. 술과 고기를 팔던 장비는 술집에서 유비를 만나 의기투합한다. 난세를 살아가는 장비에게 술은 쾌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재앙이기도 했다. 술때문에 평판을 잃었으며 술때문에 성(城)을 뺏았겼고 생을 마감하는 것도 결국 술때문이었다.

장비와 술은 불가분의 관계지만 술만 떼내면 장비는 냉정한 이성의 소유자였고 누구 못지않게 주도면밀한 지략가였다. 또한 따뜻한 정의를 나눌 줄 알고 의리 앞에 목숨을 걸 줄 아는 진정한 사나이였다.

“용감함이 비범하고, 거칢 속에 정교함이 있으며, 정의(情義)를 중시한다.”(勇武过人,粗中有细,重情義). 호랑이 같은 용맹한 장수로서 관우만큼이나 충직하게 유비의 곁을 지키던 '듬직한 아우' 장비에 대해 삼국지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초 취재진은 장비의 역사 속 숨결을 찾아 삼의궁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그의 고향 충의점(忠義店)으로 향했다.
 
 삼국시대 때 이 마을은 장비의 이름을 따 장비점(張飛店)으로 불렸으나 청나라 강희제 때인 1700년, 이곳 관리였던 동국익이 장비의 충성과 의리를 기리는 뜻에서 위령비를 세우면서 충의점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이곳에 유비, 관우, 장비 삼 형제가 실제 의형제를 맺은 장비의 집 뒤뜰 복숭아 밭이 있었다고 하니 삼의궁에서 우 주임과 맺었던 도원결의의 의식을 여기서 다시 한번 치러야되나 싶었다.
 
 △장비의 사당, 장환후묘
 
 
장비의 시호를 따서 이름 지은 장비의 사당, 장환후묘(張桓候廟) 입구.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 쓰고 비포장 도로를 달려 장비의 시호를 따서 이름 지은 장비의 사당, 장환후묘(張桓候廟)에 도착했다.
 
 
 장비의 호탕하고 당찬 이미지와는 달리 해가 어스름 질 무렵이라 생각보다 고요하고 호젓한 기분이 들었다. 입구 저 편에 장비의 검은 조각상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장비의 사당 입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장비의 조각상.

 
 유적 안내원은 “당나라 초기에 건설된 장비의 사당 역시 문화대혁명 당시 소실돼 2003년에 재건됐다”며 “실제로 남아있는 유적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입구를 지나 장비의 사당에 이르니 ‘후대에까지 영원히 이름을 남기다’라는 뜻의‘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친히 이곳을 방문해 장비의 충절을 기리며 썼다고 한다.
 
 
장비 사당 입구에는 청나라 건륭황제가 장비의 충절을 기리며 친히 썼다는 ‘만고유방(萬古流芳)’이라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후대에까지 영원히 이름을 남기다’라는 뜻.

 
 
 ‘雄赳赳吓碎老曹肝胆 , 眼睁睁看定汉室江山(웅규규혁쇄로조간단 안정정간정한실강산)’

기둥 양 옆에 쓰여진 대련(對聯 설명절 때 대문 양쪽에 붙여놓는 상서로운 내용의 글귀) 역시 건륭황제의 친필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장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조조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장비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한나라 영토를 지켰다’는 뜻이다.
 
 “장판포 전투에서는 장비가 고함을 지르자 조조 병사 100만명이 놀래 도망가고, 조조의 장수 하후걸은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삼국지의 한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고리눈을 부릅뜬 장비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기 장팔사모를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모습에 벌벌 떨지 않을 적군이 어디 있었으랴 싶었다.
 
 심지어 관우는 장비를“백만대군 속에서 대장의 목 베기를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 듯 하다(낭중취물 囊中取物)”라고 평가했다니 그 출중한 무예 실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당 안에 들어서니 약 3.5m 높이의 거대한 장비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신장 8척(약 184cm), 표범 같은 머리, 거무스름한 낯빛, 부릅뜬 눈, 호랑이 수염. 삼국지에 묘사된 모습 딱 그대로다. 금방이라도 천둥 같은 목소리로 “네 이놈”하고 외칠 것만 같다.
 
 
표범 같은 머리, 거무스름한 낯빛, 부릅뜬 눈, 호랑이 수염의 장비상.

 
 낮에 한잔 마신 장비주 때문에 취기가 채 가시지 않았는지, 지은 죄도 없는데 장비상은 사납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다.
 
 그 서늘한 눈빛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뒷편에 있는 장비의 묘(墓)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비 사당안에 있는 장비의 묘(墓). 장비의 유골이 묻힌 곳은 아니지만 현재 쓰촨성 랑중(?中)과 충칭시 윈양(云?)에 있는 실제 장비의 묘에서 가져온 흙을 장비의 고향에 마련된 이곳 사당에 뿌려서 만들었다고 한다.

 
 안내원은 “이 곳이 실제 장비의 유골이 묻힌 곳은 아니지만 현재 쓰촨성 랑중(阆中)과 충칭시 윈양(云阳)에 있는 실제 장비의 묘에서 가져온 흙을 장비의 고향에 마련된 이곳 사당에 뿌린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전투를 위해 랑중에 체류 중이던 장비를 그의 부하인 범강과 장달이 살해한 뒤 장비의 목을 베어 창장(長江)에 버렸다. 이후 한 어부가 그물에 걸린 장비의 머리를 발견하고 근처 윈양에 묻어주었으며, 몸은 그대로 랑중에 묻히게 된다. 부하에게 살해당한 것도 억울한 장비는 죽어서 몸과 머리가 따로 묻히는 기구한 운명을 맞는다.

안내원은 “사람들은 장비가 죽어서 몸은 랑중에, 머리는 윈양에, 그리고 영혼은 바로 이곳 줘저우에 있다고 말한다”면서 비록 장비의 시신은 이곳에 없지만 그 정신만은 이곳에 깃들여져 있다고 강조했다.
 
 장비묘를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오자 건너편에는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은 곳이라는 의미의 ‘도원삼결의고리(桃園三結義故里)’건물이 있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은 ‘도원삼결의고리(桃園三結義故里)’ 입구.

 
 훗날 이곳에서 ‘한소열제결맹고리(汉昭烈帝结盟故里 한나라 유비가 의형제를 맺은 곳)’라 쓰여진 비석이 발견되면서 바로 이곳이 도원결의의 장소로 알려졌다고 한다.
 
 2000년 전 그 때처럼 정원 곳곳에 복숭아 나무가 심어진 가운데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술잔을 높이 들고 의형제를 맺는 장면을 재미있게 재연해 놓은 커다란 조각상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순간‘이곳이 실제 도원결의의 장소라면 우리가 방금 전 삼의궁에서 본 결배석이나 복숭아 정원은 가짜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의 ‘짝퉁’에 속은 기분이다.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가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 장면을 실감나게 재연해 놓았다.

 
 △장비우물, 힘자랑 하려다 관우에게 한방먹은 장비
 
 다시 입구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려는 데 뒤편의 조그마한 정자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장비가 집 앞 우물 속에 돼지고기를 넣고 천근이나 나가는 돌을 얹어 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장비고정(張飛古井)이다. 그리고 우물 옆에는 청나라 강희제 때 줘저우 관리인 동국익(佟国翼)이 이 마을을 둘러보던 중 삼형제가 맺은 도원결의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한장환후고정비(汉张桓侯古井碑)’도 함께 세워져 있다.
 
 
장비가 돼지고기를 넣고 천근이나 나가는 돌을 얹어 놓았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장비고정(張飛古井).

 
 안내원의 옛날 이야기가 이어진다. 장비가 돌에 세찬 필체로 “돈 안 받을 테니 뚜껑을 열 수 있는 자는 안에 있는 고기를 가져가봐라”고 적었다는 삼국지 이야기다.
 
 하지만 힘이라면 둘째가라 서러운 관우가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그 덮개를 열고 고기를 꺼냈다.
 
 
천근의 돌을 들어올려 장비가 우물에 넣어놓은 돼지고기를 꺼내고 있는 관우의 벽화.

 
 설마했던 것일까. 가져가랄 때는 언제고 고기를 빼앗겨 화가 난 장비는 관우를 당장 찾아가 그가 팔고 있던 녹두를 으깨며 서로 뒤엉킨다. 우물 가장자리에는 마치 2000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진품' 우물인 듯 관우가 고기를 끌어올렸다는 쇠자국이 파여 있다.
 
 싸움은 어떻게 됐을까? 이를 지켜보던 유비가 이 둘을 말리며 나라를 위해 힘을 합치자고 제안함으로써 세 사람은 의기투합하고 그리하여 삼형제는 복사꽃 흐드러진 도원에서 역사적인 형제의 결의를 맺는다는 가슴 뛰는 이야기다.
 
 우물 뒤편 벽에는 이 가슴 뛰는 옛날 이야기를 길게, 마치 그림 한 장인 듯 이어지도록 그려넣은 속도(續圖)가 걸려있다.
 
 
장비 우물 뒤 건물 벽에는 장비의 우물 이야기를 속도(續圖)로 그려 놓았다.

 
 이 속도 중 유비가 관우와 장비의 양팔을 한쪽씩 사용하여 말리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 마리의 용이 호랑이 두 마리를 갈라놓았다’는‘일용분이호(一龍分二虎)의 전설이 아닌가.
 
 안내원은 “이 그림은 은연중 유비가 단순히 몰락한 황족의 나약한 후손이 아니라, 한쪽 팔만 사용해 장사중의 장사들인 관우와 장비까지도 제지할 수 있을 정도로 힘과 무예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의 우물이 실제로 장비네 집 옛 우물이 아니라 후대인 청나라 때 장비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만들진 것이라는 설명에 우리는 2000년 전 관우와 장비에 얽힌 무용담의 꿈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