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 36 허난성편> 4-1. 춘추루에 깃든 관우의 충정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2-02-07 15:29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아주경제 김효인 기자) 삼국지연의에서 관우(關羽)는 충의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그러한 관우의 충의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이 곳 쉬창(許昌, 허창)의 춘추루(春秋樓)이다. 취재팀은 허창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춘추루에 당도했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는 건 허창시가 관우의 충절을 이 곳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곳이 춘추루가 된 것일까?

서기 199년 유비군이 서주(徐州)에서 조조(曹操)에게 대패하여 유비삼형제가 모두 뿔뿔이 흩어지게 됐을 때 하비(下邳)성에 남은 관우는 조조에게 포위된다. 조조는 관우를 휘하에 두려고 관우의 옛 친구인 장료(張遼)를 보내 관우를 회유했다. 관우는 장료룰 통해 조조에게 3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지 절대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다, 두 형수를 극진히 모신다, 유비의 거처가 파악되면 즉시 떠난다.’는 3가지 조건이였다. 조조가 이 3가지 조건을 받아들이자 관우는 조조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된다.



조조는 관우와 유비사이를 이간시키려고 두 형수와 관우에게 한 방을 쓰도록 하지만 관우는 춘추를 읽으며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조조는 오히려 그에 감복하여 그에게 큰 저택을 주고 두 부인을 모시도록 한다.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을 모시며 항상 ‘춘추(春秋)’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에 이 곳이 춘추루 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춘추루 앞에 당도하자 곧 안내원이 취재팀을 맞이했다. 춘추루 입구 왼쪽에는 대나무 모양과 함께 시가 적혀 있는 비석과 오른쪽에는 관우의 모습이 새겨진 비석이 나란히 서 있었다. 비석들은 세월의 연륜을 말해주듯 여기저기 패여 있었다.



안내원은 “왼쪽에 있는 이 비석은 당시 관우가 조조에게 선물한 시죽도(詩竹圖)를 조각하여 새긴 것입니다. 대나무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줄기 한줄기가 시 한구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관우는 자신의 충절에 관한 한시를 이 곳에 새겨 조조에게 보냈지만 조조는 당시 그림에서 글자를 읽어내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자세히 살펴보니 규칙적이지 않은 하나하나의 대나무 잎사귀가 글자처럼 보였다.

시죽도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불사동군의 (不謝東君意) - 동군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단청독립명 (丹靑獨立名) – 붉고 푸르게 홀로 이름을 세울 것입니다.
막협고엽담 (莫嫌孤葉淡)- 마지막 남은 나뭇잎(관우)의 퇴색됨을 싫어하지 마십시요.
종구불조령 (終久不凋零 )-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진 않을 것입니다.

시죽도를 보니 관우가 결코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시문에도 능했던 인물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춘추루에 들어서자 관우가 수염을 쓸며 춘추전을 읽는 조각상이 눈앞에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이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안내원은 “붉은 색은 충절을 의미합니다. 경극에서도 관우 역할을 하는 사람은 붉은 색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특히 관우는 미염공(美髥公)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 이유는 관우의 수염이 아름답기 때문이었습니다.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위해 수염을 감싸는 비단주머니를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한헌제가 관우의 수염주머니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이를 신기하게 여겨 벗기도록 하니, 관우의 수염이 아름답다 하여 직접 미염공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고 설명했다.

조각상에서 어쩌면 관우의 손이 수염에 가있는 것은 관우의 아름다운 수염을 강조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관우상의 옆에는 조조와 관우가 헤어지는 모습을 묘사한 벽화들이 보였다. 안내원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쁘게 말을 타고 떠나가는 관우가 금은보화를 손에 들고 달려가는 신하들을 무시한 채로 조조에게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청렴한 성품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관우의 청렴함은 지금 같이 비리가 만연한 시대에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모범일 것이다.



춘추루를 지나니 곧 어마어마한 크기의 관성전이 취재진 앞에 그 모습을 보였다. 관성전을 오르기 전 좌측에는 관우의 청룡언월도를 놓은 다오러우 (刀樓), 우측에는 관우가 사용했던 인장의 큰 모형이 걸려있는 인러우(印樓)가 있었다.



관우가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는 동안 안량(顔良)을 선봉으로 한 원소의 군대가 조조의 진영 앞에 나타난다. 안량이 싸움을 걸어오자 위속(魏續), 송헌(宋憲), 서황(徐晃 )이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 때 화웅을 벴던 관우의 위엄이 다시 이곳에서 재현된다. 관우가 원소의 수하인 맹장 안량, 문추(文醜)를 잡자 조조군은 다시 승세를 잡게된다.

이렇게 관우를 강하게 한 것은 2가지였다. 바로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위해 준 적토마와 그의 무기 청룡언월도였다. 그러한 청룡언월도가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지만 실제모습과 비슷하게 만든 모형을 보기 위해 다오러우로 향했다.

안내원은 “당시 기록에 따르면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약 48kg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중량 단위에 맞추자면 25kg정도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결코 가벼운 무게는 아니죠. 이것을 들고 말을 타고 전투를 했던 관우가 당시 힘이 얼마나 장사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손으로 청룡언월도를 잡아보니 그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맞은편에 있는 인장은 관우가 당시 한수정후(漢壽亭侯)에 임명됐을 당시 조조가 보냈던 인장을 복원하여 큰 모형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모형 안에는 실제로 한수정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서 왜 조조가 한수정후라는 벼슬을 내렸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수라는 곳은 오나라에 속한 지금의 현(懸)급의 작은 도시이기 때문에 실제 지배력이 미치지 않았다. 정후라는 벼슬은 명목상의 영주였을 뿐이였다. 조조는 이처럼 관우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치밀한 계산에서 그에게 상을 내린 것이다.

곧 수십개의 계단을 올라 관성뎬(關聖殿, 관성전) 입구에 도착하니 어마어마한 높이에 용의 모양을 한 4개의 기둥이 눈 앞에 나타났다.


안내원은 “1995년 허창시 시민들이 2800만 위안의 성금을 모아 지어진 곳으로 4개의 기둥 무게는 총 10t 입니다. 기둥 중에 특히 유일하게 깨끗하게 빛나는 이 곳은 용의 발로 이 곳을 만지면 아이를 많이 낳는다는 얘기를 듣고 여기를 쓸고가는 사람이 많아 이렇게 닳게 되었습니다”


검은색의 기둥은 사람들의 손을 얼마나 많이 탔는지 다른 곳은 하얀 먼지가 낀 반면 용의 다리인 그 곳만큼은 햇빛에 빛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곳은 왜 관성전으로 불리고 있을까?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이는 훗날 사람들이 관우를 부르는 호칭의 격이 조조가 그에게 부여한 한수후(侯)에서 후대 사람들이 왕(王) 제(帝),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성(聖)이라고 높여 부르면서 관우를 모신 이 곳이 관성전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관성전 안을 들어가니 고개를 들어야 그 크기를 다 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금빛 조각상 세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조각상 높이는 15m 로 현존하는 관우 조각상 중에서 최고 높이를 자랑합니다. 양쪽 옆에는 관우의 부장인 왕보와 요화가 세워져 있습니다. 왕보(王甫)와 요화(廖化)는 관우의 부장들로 관우에 대한 충성이 높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관우와 함께 동상을 세워 놓은 것이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했던가? 이 왕보와 요화의 조각상을 바라 보니 바로 이 말이 만고의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