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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업성유적지 입구 조조상 |
아주경제 배인선 김현철 기자= 형형색색으로 치장한 1000개의 문과 10000개의 창문, 140여 칸의 방. 1000여 년 전 조조가 건안문학을 읊으며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던 역사의 거대한 흔적 속에 섰지만 언덕에서 바라본 드넓게 펼쳐진 평야는 온통 옥수수밭뿐이다. 분명 당시는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냈으리라. 하지만 세상 부귀영화가 속절없다는 말처럼, 조조의 그 화려했던 성들은 어느 사이엔가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져 몽환적 너울거림이 된 지 오래다.
사라진 업성(鄴城) 유지(遺址)만큼 공허해진 마음 탓일까.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즈음인데도 한편으로는 옥수수밭의 스산함과 어우러져 마치 초겨울 찬바람이 가슴을 저미는 듯하다. 그나마 뭉툭하게 솟아 남아있는 금봉대의 한 부분만이 그 화려했던 역사를 회고하는 응어리인 듯 묵직하게 다가왔다.
建高門之嵯峨兮 (건고문지차아혜)
浮雙闕平太情 (부쌍궐평태정)
立中天之華觀兮 (입중천지화관혜)
連飛閣平西城 (연비각평서성)
臨仰水之長流兮 (임앙수지장류혜)
望園果之滋營 (망원과지자영)
전각은 우뚝 치솟아 있고
두 개의 대궐은 푸른 하늘 위로 떠오른 듯하구나.
화려한 궁궐 한복판에 서서 바라보니
구름다리가 서쪽까지 이어졌구나.
궁궐을 끼고 도는 장하(漳河)는 끝도 없이 이어져 흐르고
저 멀리 과수원에 알차게 여문 과일을 바라본다.
조식(曹植) <동작대부(銅雀臺賦)> 中
관도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조조는 잇따라 원소의 근거지를 공격, 업성을 차지한다. 그 후 조조는 대량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화려한 누각과 궁궐을 짓는 등 신도시를 건설한다. 그리고 이곳을 천하 통일의 둥지로 삼고 북방 지역의 정치·경제·문화 도시로 발전시켜 나간다. 일부 사서에서 “조조의 근거지 업성이 당시 한 헌제가 머물던 도읍 쉬창(許昌)보다 더 크고 번성했다”라고 기록했을 정도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사실상 황제를 끼고 한나라 조정을 장악한 조조. 그는 ‘황제’라는 칭호만 얻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인 황제나 다름없었다. 업성은 바로 조조가 패업의 야망을 불태우던 주요 활동 무대였다. 취재진은 진시황의 아방궁만큼이나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자태를 뽐냈다는 조조의 업성 유적지를 찾아 한단(邯鄲) 린장(臨漳)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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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조조가 군사를 몰래 이동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허베이성 한단시 린장현 업성유적지 전군동. |
린장현 시내에서도 서남쪽으로 20㎞가량 드넓게 펼쳐진 옥수수밭을 풍경 삼아 낡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니 취재진은 어느새 업성 유적지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에 있는 족히 15m는 돼 보이는 조조의 동상이 그나마 이곳이 옛 업성 유적지라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을 뿐이다.
가늘고 길게 찢어진 두 눈, 엷은 입술, 짙으나 숱이 많지 않은 수염,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생김새.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그대로다. 다만 허리춤에 기다란 칼을 찬 채 정면을 바라보는 조조의 두 눈은 침입하는 적군을 살피기라도 하듯 날카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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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군동 내부. |
조조의 동상을 뒤로한 채 우리는 업성 유적지 안으로 들어섰다.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과거로 성큼성큼 들어갈 것만 같았지만 그 옛날 영화롭던 삼대(三臺)는 무너져 흔적도 없다고 하니 탄식이 절로 새어 나온다. 육조고도(六朝古都)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웅장함은 온데간데없고 옥수수밭 속에 간신히 그 흔적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안내원은 “이곳은 조조가 위왕(魏王)으로 책봉받은 뒤 16년간 거주한 것으로 어찌 보면 쉬창보다 더욱 조조의 도읍지라 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특히 “이곳은 이후에도 후조(後趙), 염위(冉魏), 전연(前燕), 동위(東魏), 북제(北齊)의 수도였으며 약 370년간 6개 왕조의 도읍으로서 북방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중요한 곳”이라고 말했다.
조조는 당시 도시를 건설할 때 화려한 궁궐뿐만 아니라 삼대의 건설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대란 조조가 지은 거대한 3개 누각을 말한다. 조조는 당시 이곳 서쪽 성벽에 금봉대(金鳳臺), 동작대(銅雀臺), 빙정대(氷井臺)를 세웠다.
조조가 북방을 성공적으로 평정하고 기주로 돌아온 당시, 남쪽 땅속에서 찬란한 빛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군사를 시켜 그곳을 파 보았더니 구리로 만든 동작새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를 기념키 위해 조조가 동작대를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곳은 왕실의 연회장뿐만 아니라 성벽 수비를 위한 군사적 기능을 갖추어 조조 정치권력의 상징으로 불리기도 한다. 각 누각의 높이가 금봉대와 빙정대가 24m, 중간의 동작대가 30m에 이르고 각 대마다 방이 100여 칸씩 있었다고 전해지니 멀리서 바라보면 정말 세 봉우리의 산과 같았으리라.
조조는 여기에 각 대 사이에 구름다리를 놓아 서로 연결시키기도 분리시키기도 했다고 하니 가히 업성이 ‘난공불락의 인공 요새’라 불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훗날 수나라 양견이 누군가 이곳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해 업성을 흔적도 없이 몽땅 불태워 버렸을까?
우리는 조조가 세웠다는 3개 누각 중 유일하게 그 터만 10m가량 남아 있는 금봉대에 올랐다. 금봉대는 본래 금호대(金虎臺)라고 불렸다. 그러나 후조(後趙) 3대 황제인 무제(武帝)의 이름인 석호(石虎)와 겹친다 하여 ‘호랑이 호’대신 ‘봉황 봉’을 따서 금봉대라 명명했다.
금봉대 위에 오르니 이 근처 마을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곳곳에 촌락이 들어서 있고 옥수수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저 멀리 징주(京珠)고속도로 위에는 차들도 쌩쌩 달린다. 저 드넓은 땅 아래 어딘가에 과거 조조의 화려한 궁궐과 성벽이 파묻혀 있으리라. 안내원은 “이곳에서 60보 정도 걸어가면 동작대 옛 터가 나온다.”라며 지금은 겨우 3m가량의 터만 남아 흙무더기밖에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과거 동작대에서 조조는 많은 문인들을 모아 놓고 함께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예술을 즐겼다. 냉철하고 잔인하기만 한 조조의 또 다른 이면에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적 면모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조는 ‘오로지 재주가 있는 이를 천거하면, 나는 그를 등용해 쓰겠다.(唯才是擧 吾得而用之)’는 정책 아래 전국에서 유능한 문인과 학자들을 동작대로 불러들여 그 재능을 펼치도록 했다.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중원이 어지럽던 시절, 문인들은 조조 덕분에 이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펼칠 수 있었고 덕분에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물론 지금은 나무에 가려 동작대의 흔적도 잘 보이지 않지만 당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포부를 잃지 않았던 영웅들의 그 기상과 정신만큼은 아직도 곳곳에 깊숙이 녹아 있는 듯했다.
조조가 쓴 시는 지금까지 20여 수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어 ‘시로 쓴 눈물의 역사’라 불리기도 한다. 세간에서는 조조를 ‘난세의 간웅’이라 폄하해 왔다.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조조의 문학은 천박하다며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조의 평이하면서도 자유롭고 거리낌없으며 소박하고 정제된 문체는 당대 으뜸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대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李白)은 건안문학이 당시 문학의 최고 경지를 개척했다고 예찬했다.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 역시 ‘조조를 문장 개혁의 시조’라고 격찬하기도 했으니 그 예술적 경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양파 껍질처럼 한 꺼풀 벗길 때마다 새로운 매력이 드러나듯 업성 유적지에서 발견한 조조의 매력은 끝이 없다. 취재진은 조조가 뛰어난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 그리고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금으로 말하면 뛰어난 도시설계자였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내원은 “업성의 도시설계는 향후 장안성과 자금성, 그리고 저 멀리 일본 나라궁의 구조까지 영향을 미치는 등 고대 건축사에 이정표를 남겼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훗날 수나라 양수가 업성을 불태우고 장하(漳河)의 물이 범람하면서 조조의 휘황찬란한 업적과 함께 이 2000년 전의 고도는 땅속에 영원히 파묻히고 만다.
안내원은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학자들이 지난 28년간 업성 유적지를 발굴 중이며, 이곳 지하에는 업성 유적지가 그나마 잘 보존돼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땅 아래도 50㎝만 파고들어 가면 성곽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이를 제대로 보존할 수 있는 기술력이 낮아 다시 파묻었다고 안내원은 덧붙였다.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 했던가. 업성 유적지를 한 바퀴 돌고 나오는데 과거 부귀영화를 자랑하던 옛 도읍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옥수수가 바람에 처량하게 흔들리며 약 2000년 전 업성의 흥망성쇠를 노래하고 있는 듯해 가슴 한편이 아련했다.
『삼국지연의』에서 나관중은 조조를 ‘태평성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으로 묘사한다. ‘간웅’이라는 이미지로 굳어져 후대에까지 제대로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영웅’ 조조. 이로 인해 그의 도읍 업성은 유비의 청두(成都)나 손권의 난징(南京)이 지금도 건재한 것과 달리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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