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성을 본딴 옛 관동군 사령부 건물(현 지린성 공산당위원회 건물), 그리고 지금은 웨이만황국박물원이 된 옛 만주국 궁전, 위만 중앙은행 건물 등이 대표적이다. 중국 내 반일감정이 확산되면서 일제 침략 유적지 창춘을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는 신문 보도까지 나올 정도다.
과거 일제 침략 역사의 상처를 가진 창춘이 현재 중국 자동차·영화의 중심지로, 그리고 더 나아가 21세기 동북아 물류 허브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 부여와 고구려, 발해 땅으로 우리 선조들의 터전이었던 창춘은 흉노·말갈·거란·여진·몽골·만주족 등이 번갈아 다스렸다. 1800년 청나라 때부터 비로소 '긴 봄'이란 뜻의 창춘이라 불렸다.
일본은 창춘을 현대화된 계획 도시로 건설하기 위한 ‘대(大) 신경 도시계획’을 구상했다. 19세기 파리 계획도시를 본따 설계된 창춘은 당시 대동광장(지금의 인민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로가 건설됐다. 도시는 상업·군사·주거·문화오락지구 등 기능별로 구획을 나눴다. 대규모 녹지가 조성되고 상·하수도 시스템이 완비됐으며, 전신주와 통신선을 지하에 매설하는 등 창춘은 현대화된 도시로 면모를 갖췄다.
이에 따른 인구도 급격히 팽창했다. 1932년 12만명이었던 창춘 인구는 1945년 71만명까지 늘었다. 특히 유동인구까지 더하면 120만명에 달해 한때 일본 도쿄 인구를 초월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중국 설립 후 국유기업 위주로 발전했던 이곳은 중국 개혁개방의 물결과 함께 떠오른 상하이·선전 등 주장·창장 삼각주 지역에 밀려 낙후 지역으로 몰락했다. 특히 창춘은 같은 동북 3성인 랴오닝성 성도 선양(瀋陽)이나 헤이룽장성 하얼빈(哈爾濱)과 비교해서도 경제개발에서 가장 뒤쳐졌다.
창춘에 다시 봄 바람이 분 것은 지난 2003년 당시 원자바오 총리가이곳을 방문한 후 '동북 3성 노후 공업지역의 부흥'이라는 국가적인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부터다. 여기에 지난 2009년부터 두만강 유역 경제 벨트인 '창지투(長吉圖·창춘-지린-두만강) 개방 선도구' 개발사업이 추진되자 창춘은 동북아 물류허브로 각광받으며 지역경제도 빠르게 고속성장하고 있다.
지난 해 중국 경기침체 속에서도 창춘시는 지역GDP 5000억 위안을 돌파하며 9% 성장률을 기록했다. 창춘시 경제성장률은 2011년 15.2%, 2012년 12%로 줄곧 두 자릿수를 유지해왔다.
창춘시는 중국 '동북의 디트로이트'로 불릴만큼 자동차가 지역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창춘시 대표 자동차 기업은 바로 이치(一汽) 자동차다. 지난 1956년 중국의 첫 번째 자동차를 생산한 이래 중국의 3대 자동차 그룹 중 하나로 급성장한 이치자동차는 현재 창춘시 산업의 50%를 담당하고 있을 만큼 지역경제에 이바지 하고 있다. 특히 훙치(紅旗)는 중국 국유 자동차기업인 이치자동차가 58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세단형 자동차로 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등 중국 역대 수뇌부가 톈안먼(天安門) 앞에서 군대사열을 할 때 탔던 차종으로 일종의 중국 정치권력을 상징해왔다.
창춘은 중국 최초 영화촬영소인 창춘영화제작소로 유명하다. 과거 일본인이 일제 중국 대륙침탈을 정당화하는 선전용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1937년 설립한 만주영화주식회사가 전신이다. 창춘에서는 2년에 한 번씩 국제영화제도 열린다.
창춘은 최근엔 관광지로도 부상하고 있다.
창춘의 추위는 매년 10월 말 시작됐다가 다음해 3월 말쯤 돼야 서서히 풀린다. 이 때문에 예전의 경우 4~5개월이나 지속되는 지루한 창춘의 겨울은 관광산업의 ‘불청객’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겨울철 추위와 눈을 독특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켜 나가면서 겨울철 창춘을 방문하는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여기에 일제 침탈 장소도 최근 각광받으면서 그 동안 백두산을 거쳐가기 위한 하나의 경유지로만 여겨졌던 창춘이 진정한 관광목적지로 거듭나고 있다. 지난해 창춘시 관광객 수는 4229만5000명으로 동북3성 도시 중 1위를 차지했다. 이에 따른 관광수입도 7000억 위안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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