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저장(浙江)성 동남부 연해안에 위치한 원저우(溫州)는 ‘온화한 지역’이라는 뜻으로 여름은 무덥지 않고 겨울은 혹한이 없다 하여 붙여졌다. 이곳에는 신석기 시대부터 도자기가 많이 났기 때문에 작은 사발이라는 뜻의 ‘어우(甌 ·구)’라는 약칭도 있다. 원저우를 가로지르는 강 이름도 어우강이다.
송나라 때 해상무역으로 번성했던 원저우에는 외세 침입이 빈번했다. 대만과 해협을 가운데 두고 마주보고 있는 탓에 대만 국민당이 틈만 나면 원저우를 통해 중국 대륙으로 몰래 침입했다. 최전방지역이었던 원저우는 일종의 ‘총알받이’로 낙인찍혀 신중국 설립 후 30년간 중국 중앙정부의 투자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농사 이외 마땅한 벌이가 없었던 원저우 사람들은 먼 곳으로 장사를 하러 떠나는가 하면 지하공장이나 가내수공업으로 푼돈을 벌며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다. ‘동방의 유태인’ 원저우 상인(원상· 溫商)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중국 개혁개방이 이뤄지기 전부터 이곳엔 벌써 자본주의가 싹 트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문화대혁명 시기 원저우는 ‘자본주의의 온상’으로 찍혀 홍위병의 집중 공격을 받기도 했다. 사회주의 국가 아래서 ‘자본주의 요람’ 원저우는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셈이다.
1990년대 원저우는 르네상스 시기를 맞이했다. 원저우 4대 명품인 구두·복장·장식등·라이터는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로 수출돼 팔려나갔다. ‘메이드 인 원저우’ 라이터는 한때 연간 생산량 5억5000만개를 자랑하며 전 세계 시장의 80% 이상을 점유했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발모제 101 발명자 자오장광(趙章光), 구두수선공에서 원저우 거상이 된 난춘후이(南存輝) 정타이(正泰)그룹 회장이 모두 원저우 출신이다.
1997년 원저우엔 민영기업이 5616곳, 자영업자가 19만호에 달해 민영경제가 전체 원저우 경제의 80% 이상을 차지했다. 원저우 경제는 1978년~2000년까지 평균 15.6%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는 같은기간 중국 평균인 9.5%는 물론 저장성 평균인 13.2%를 웃도는 수치다.
수출로 번 돈으로 원상들은 부동산·석탄·광산·황금 등에 투자하며 부를 늘려나갔다. 원저우 투기단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떼돈을 번 원상들은 차츰 실물경제에 투자하기보다는 돈놀이하는 고리대금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원저우 상인들은 예로부터 ‘신용’을 중시해 가족·친지들에게 돈을 빌려 사업하는 관행이 발달했다. 민간자본을 모아 기업 등 자금이 필요한 곳에 빌려주는 중개업자인 '인베이(銀背)'라는 전문직업이 생겨났을 정도다. 인베이는 ‘돈을 등에 업고 다닌다’는 뜻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사채놀이의 전주인 셈이다.
그러던 중 2011년 원저우발 금융위기를 초래하며 총체적인 난국에 빠졌다. 대외 수출시장 부진과 부동산 시장 둔화에 이어 신용경색 위기까지 겹치면서 원저우 기업들이 줄도산에 직면한 것. 기업인들이 야반도주하거나 자살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간 신용으로 쌓아왔던 민간 대출시장이 무너지며 원저우 지역경제마저 붕괴될 위험에 처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앞서 2012년 '금융종합개혁 시범구' 계획을 내놓는 등 원저우발 금융위기 진화작업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원저우 경제 ‘바로미터’로 불리는 부동산 경기도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원저우 집값은 2011년말부터 현재까지 36개월 연속 하락하며 중국 도시 중 역대 최장기간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집값은 3년전과 비교해 반토막이 난 상태다. 한때 항저우·닝보와 함께 저장성 3대 경제도시로 꼽히며 ‘부자도시’로 불렸던 원저우의 지난해 1인당 GDP는 겨우 4만3632위안(약 770만원)으로 저장성 도시 중 꼴찌로 추락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