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고교 야구를 주름 잡았거나 혹은 잠재력을 인정받은 세 명의 투수가 드래프트 빅3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원상(28·당시 북일 고등학교 현재 LG 트윈스), 한기주(28·광주 동성고등학교 현재 기아 타이거즈), 그리고 나승현(당시 광주제일고등학교)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 세 선수의 고교 시절은 화려했다. 유승안 경찰청 감독의 아들로 이미 이름이 알려졌던 유원상은 187cm의 키에 탄탄한 체격을 바탕으로 그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학창 시절 미국 유학 이후 야구 명문 천안 북일 고등학교에서 뛰며 12회 무등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받는 등 맹활약했다.
나승현은 사이드암으로는 드물게 150KM 가까운 강속구를 던지는 드문 투수였다. 역시 야구 명문 광주제일고등학교에서 활약하며 3학년때 81이닝을 던져 0.67의 방어율을 기록했고, 팀의 35회 봉황대기 준우승과, 제59회 황금사자기 우승을 이끌고 황금 사자기 MVP에 선정되며 이름을 떨쳤다.
지역연고 지명에 따라 당시 고교 최대어 한기주는 역대 고졸 최고 계약금 10억원을 받고 KIA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덕분에 같은 지역의 나승현은 2차 드래프트로 밀렸고, 당시 2차 1번을 가지고 있던 롯데 자이언츠는 빅3중 한 명을 지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롯데는 나승현에게 2차 지명 최고액인 3억원의 계약금을 쥐어주며 기대를 높였다. 유원상도 천안 북일고에 1차 지명 받고 계약금 5억5천만원(옵션포함)을 받으며 화려하게 프로에 입단했다.
프로 입단 후 제구력 난조로 1군에 오르지 못한 유원상을 제외하고 나승현과 한기주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고교 시절 이미 최고 구속 152km를 찍었던 한기주는 곧바로 주전 투수로 활약했다. 시즌 초 선발로 출발한 후 후반기에는 불펜으로 나와 140⅔이닝을 던지며 10승11패 방어율 3.26으로 활약했다. 또 이듬해부터 마무리로 변신해 2007~2008시즌 연속 20세이브 이상을 거두며 맹활약했다. 특히 2008년에는 방어율 1.71의 뛰어난 성적으로 올림픽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 나승현도 데뷔 첫해부터 마무리로 활약해 이 시즌 16세이브를 거두며
마무리 부재에 시달리던 롯데 팬들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두 선수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기주는 2009년 부진하며 마무리 자리에서 밀려났고, 그 해 팀의 우승을 지켜본 후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이후 2011~2012시즌 재기를 노렸지만 다시 어깨 수술을 하며 마운드에서 사라졌다. 프로 데뷔 이후 수술을 5번이나 받은 한기주는 2015년 다시 돌아와 드디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승현은 데뷔 시즌 이후 바로 부진의 늪에 빠졌다. 2007년 이후로 계속해서 성적이 나빠지더니 2011년 이후는 아예 1군 마운드에 오르지 못했고, 결국 올 시즌 팀에서 방출 당했다.
반면 프로 생활 초창기 부진했던 유원상은 큰 임팩트는 없이 꾸준히 마운드에 등판하고 있다. 2010년까지 기복 있는 투구로 한화 팬들을 실망시켰던 유원상은 2011년 LG로 트레이드 된 후 필승 불펜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잔부상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꾸준히 LG마운드의 힘이 됐다. 하지만 빅3라는 명성을 얻었던 유망한 선수들은 안타깝게도 그 정도의 이름값은 하지 못했다.
오히려 박경완 이후 최고의 재능이라 불렸던 포수 이재원, 청소년 대표팀 출신 타자 손용석 등이 프로에서 더 좋은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많은 재능들이 쏟아져 나온 2006년 신인 드래프트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바로 SK와이번스가 팔꿈치 수술 전력으로 인해 지역연고지명에서 외면하고, 롯데가 ‘한기주의 라이벌’ 나승현을 위해 포기했던 드래프트 2차 2번 류현진이 바로 그였다. 류현진은 데뷔 첫해 데뷔 첫 해 다승왕, 최다탈삼진, 평균자책 부분 1위로 투수 3관왕에 오르며 프로야구 사상최초로 신인왕과 최우수 선수상을 동시에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고, 한국에서 뛰던 7년 동안 프로야구를 지배한 리그 ‘에이스’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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